나는 또 어디로 불어가게 될까요

보길도에서 보내는 편지 -2-

등록 2000.06.26 17:33수정 2000.06.27 1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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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이 되면서 비바람이 더욱 거세집니다. 예상대로 오늘도 막배는 뜨지 못했습니다. 오늘 나가야 할 사람들은 늦게 부두에 도착한 것을 안타까워하고 지금 막 배에서 내린 단체 여행객들은 섬에 들어온 것을 후회하며 안내자를 책망합니다.

하지만 바람이 불어오는 것을 누가 알겠습니까.
파도를 일으키는 저 바람의 속도는 내일도 배가 뜨지 못할 것을 예고합니다. 어디로 떠날 것도 아니면서 배가 묶이면 나도 마음 무거운 돌처럼 가라앉습니다.


빗방울이 굵어지자 나는 차밭 일구던 손을 멈추고 청별까지 왔습니다.
배가 묶일 때를 기다려 떠나지 못해 초조해 하는 여행자들을 관찰하고 싶었던 것일까요.

무표정한 얼굴로 나는 여행자들 틈에 끼어 바다를 건너다 봅니다.
자동차에 탄 중년의 사내가 이 섬을 빠져 나갈 길이 아주 없는지 물어 옵니다. 나는 완도 석장리에서 출발한 화물선 한 척이 여객선이 묶여 있는 이곳 청별까지 오지 않고 중리까지만 왔다가 돌아가리란 사실을 알면서도 굳이 알려주지 않습니다.

사내에게서는 초조한 느낌이 묻어나지 않습니다. 초조해 보였다고 한들 내가 무심하지 않았겠습니까. 파도에 밀려 바닷물이 선착장 안쪽 도로까지 흘러듭니다. 바닷물은 저렇듯 땅 위를 수시로 넘나드는데 심약한 나는 한 순간도 바다 쪽의 경계를 넘지 못합니다.

여객선 매표원은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사무실 문을 닫아 겁니다. 여행자들의 거친 항의에도 뒤돌아서는 매표원의 표정은 변함이 없습니다. 가망없는 불평들을 뒤로한 채 걸어가는 매표원의 등이 단단한 성곽처럼 견고해 보입니다. 장제섬을 돌아온 바람이 노화도로 향합니다.

노화도 선창가 건물들에 하나 둘 불이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도시화된 노화도의 밤 거리가 바람에 출렁입니다. 나룻배가 끊기자 나는 5분 거리도 안 되는 저 섬에 마저 갈 수가 없습니다. 노화도로 건너간 바람은 이제 또 어디로 불어갈까요.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듯이 나는 늘 내 운명의 주인으로 살고 있다고 믿지만, 돌이켜 보면 단 한 번도 나는 내 운명의 진정한 주인이었던 적이 없었습니다. 밤이 깊어져도 바람은 잠들 기미가 보이지 않습니다.

20년을 바람처럼 떠돌다 다시 보길도까지 왔습니다.
그러나 나는 내 여정의 끝이 이 곳이 아닌 것을 압니다.
이제 나는 또 어디로 불어 가게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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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이자 섬 활동가입니다. 사단법인 섬연구소 소장을 맡고 있으며,<당신에게 섬><섬을 걷다><전라도 섬맛기행><바다의 황금시대 파시>저자입니다. 섬연구소 홈페이지. https://cafe.naver.com/island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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