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아지 '봉순이' 해산기

보길도에서 보내는 편지.6

등록 2000.07.21 00:57수정 2000.07.22 15: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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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풍우 몰아치던 지난 밤, 나는 문득 어느 먼 곳으로부터 들려오는 생명의 소리를 들었습니다. 잠결이었지만 너무도 뚜렷한 소리의 길을 따라 나는 한 없이 걸어 갔습니다.

거기 새 생명들이 꿈틀거리고 있었습니다. 봉순이가 다섯 마리의 새끼를 순산했습니다. 교미를 시킨 지 정확히 두달, 딱 60일만입니다.


그때가 밤 10시경이나 됐을까, 오늘이나 내일쯤 해산을 할텐데, 걱정스런 마음에 나는 잠못들고 있었지요. 세살문을 열고 나가 봉순이 집으로 전등을 비추자 이게 웬일입니까. 애벌레 몇마리가 봉순이 배에 착 달라붙어 꿈틀거리고 있는 게 아닙니까.

아직 눈도 뜨지 못한 네 마리의 강아지, 어미 젖을 빨기 위해 굴러 다니는 그것들은 아주 큰 배추벌레의 모습 그대로였습니다.

나는 무엇보다 먼저 봉순이를 닮은 호랑이 무늬를 찾았습니다. 달랑 한 마리, 어째 호피는 한 마리뿐인가. 이렇듯 내 욕심부터 챙기고서야 봉순이를 돌아봤습니다. 봉순이는 탈진했는지 봉순아 봉순아 불러도 알아듣지 못하고 가쁜 숨을 몰아쉬기만 합니다.

그렇게 한참을 봉순이와 새끼들을 지켜보고 있는데 봉순이가 다시 몸을 뒤척이며 배에다 힘을 줍니다. 아직 덜 나온 놈이 있나. 봉순이가 고통스럽게 몸을 뒤트는데 또 한덩어리의 생명이 쑥 빠져 나옵니다.

봉순이는 새끼를 가두고 있던 투명한 막을 걷어내 먹어치우고 새끼의 숨통을 틔워줍니다. 제발, 이놈은 호피라야 하는데. 나는 마음이 급해 불빛을 비추고 또 비춰봅니다. 거무스름한 것도 같은데, 뚜렷하게 보이질 않습니다.

봉순이가 새끼의 몸을 깨끗이 핥아낸 뒤 물끄러미 나를 봅니다. 나는 실망스런 얼굴로 봉순이를 다그칩니다. 이제 더 안 낳을 거니, 하나만 더 낳아라. 너 닮은 범구 하나만 더 낳아.


매정한 내 얘기를 알아 듣는지 마는지 봉순이는 지 새끼들 씻겨주는데 정신이 없습니다.

개의 출산 과정을 바로 옆에서 지켜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지만 사람들의 호들갑스런 출산과는 달리 조용하게 그리고 누구의 도움도 없이 다섯 마리씩이나 낳고도 스스로 뒷마무리까지 갈끔하게 해내는 봉순이의 해산 풍경은 참으로 감동적이었습니다.


모든 생명 있는 것들은 저렇듯 말없이 자기 몫의 운명을 감당해 내는데 사람인 나만 늘 허덕이며 비명을 질러대고 힘겨워합니다.

새끼들은 아직껏 눈을 못 뜨고 걷지도 못합니다. 그저 지렁이처럼 꿈틀거리며 기어다니기만 할 뿐이지요. 강아지들은 보통 태어난 날로부터 10여일이 지나야 눈을 뜨고 걷기 시작한다고 합니다. 이제 일주일 뒤면 저 다섯 마리의 강아지들은 또 다른 세상을 보게 되겠지요.

하지만 나는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내가 다 기를 형편이 못되니 잘해야 한 두 마리 빼고 나머지는 팔거나 누군가에게 줘야 합니다. 이 지방에서는 대부분의 개들이 식용으로 길러집니다. 머지않아 내 손을 떠나갈 저 어린 생명들의 운명도 거기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겠지요.

사람이든 짐승이든 새 생명이 태어났다고 해서 마냥 기뻐하고 탄생의 신비를 찬양하고 축복해 줄 수만 없는 이유가 이와 같습니다.

한낮의 폭염이 지나가고 폭풍우 몰아치는 밤이면 여름이지만 이곳은 제법 싸늘한 한기마저 돕니다. 오늘 새벽에는 너무 쓸쓸해서 거의 울어버릴 뻔 했습니다. 참았지만 여름내 마음 속 눈물은 그치지 않을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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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이자 섬 활동가입니다. 사단법인 섬연구소 소장을 맡고 있으며,<당신에게 섬><섬을 걷다><전라도 섬맛기행><바다의 황금시대 파시>저자입니다. 섬연구소 홈페이지. https://cafe.naver.com/island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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