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필 깎는 아들의 모습을 보면서

전국적으로 연필깎기운동을 일으켜 보면 어떨까?

등록 2000.08.22 15:08수정 2000.08.23 1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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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가 30대 후반이나 40대에 접어든 사람들은 초등학교(그때는 국민학교였겠지만) 시절 연필을 깎던 기억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무뎌진 연필을 날렵하게 깎아놓으면 마음이 괜시리 뿌듯해지기도 하거니와 무뎌져 잘 써지지 않던 글자가 날카로운 연필 끝에서 다시 진하고 분명하게 나타나는 것을 보면서 즐거움을 느끼던 추억이 기억날 것이다.

연필 끝이 진하게 그리고 '슥슥' 절도있는 소리를 내며 종이 위에 분명한 궤적을 남기는 순간의 즐거움을 만끽하는 것은 연필을 막 깎고 났을 때 얻어지는 노동의 대가이기도 했다. 공부하는 것이 지루해지면 괜시리 연필이나 깎고 싶어지는 충동을 느끼기도 했을 것이다.

당시에는 대체로 깔끔 떨고 공부 잘하는 녀석들은 연필도 가지런히 잘 가지고 다녔고 필통에 연필들이 잘 장전되어 있지 않으면 마음의 평정을 찾지 못할 정도였지만 공부보다는 놀기 좋아하는 녀석들의 필통 속에는 몽당 연필들이 끝이 모두 부러진 채 나뒹굴고 있기가 일쑤였다.

저녁 때 숙제를 마치고 잠자리에 들기 전에 연필을 잘 깎아 필통에 채워 넣는 것이 대부분의 조무래기들의 중요한 일상이었다.

20~30년 전에는 연필을 넣는 필통이 조무래기들의 신분을 결정해주는 잣대이기도 했다. 대부분 철제 필통이던 것이 플라스틱이 대중화되면서 삐까번쩍한 플라스틱 필통이라도 하나 등장을 하면 그걸 구경하러 아이들이 들려들고 신제품 필통의 주인 녀석은 괜히 어깨에 힘도 한 번 줄 수 있었다.


요즘 젊은 애들이 새 휴대폰으로 폼 잡는 것과 닮은 꼴이다. 플라스틱 필통 중에서도 투명한 플라스틱 필통은 더 삐까번쩍해 보였는데 그것이 현재 유행하는 속이 들여다 보이는 누드 제품의 원조가 아닐까 싶다.

요즘 대형 할인 매장의 문구 코너에 가보면 고풍스런 철제 필통을 볼 수 있는데 패션과 마찬가지로 필통도 복고풍이 등장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면 실소를 금할 수가 없다. 하지만 옛날 생각나는 필통을 접할 수 있다는 것은 생활 속에서 발견할 수 있는 작지만 큰 즐거움 중의 하나다.


인간이 수많은 발명을 하면서 연필 이후에 만년필도 발명을 했고, 볼펜도 발명을 했지만 썼다 손쉽게 지을 수 있는 도구로는 연필만한 것이 아직 없어 수 백년 간을 연필은 조무래기들의 필수품이 되고 있다. 요즘 아이들이 연탄을 잘 모르듯 컴퓨터 때문에 연필이란 것이 박불관에 가서나 볼 수 있는 물건이 될 듯 싶은데도 그렇게 되지 않는 것을 보면서 연필에 대한 인식을 다시금 하게 된다.

어제 저녁에 초등학교 6학년인 아들 녀석이 방 한 가운데 휴지통을 놓고는 그 앞에 빳빳하게 서서 뭔 짓인가를 하는데 보니 마치 죽창을 만드는 폼으로 연필을 잡고 칼로 툭툭 연필을 깎고 있는 것이다.

우리들은 책상머리에서 왼손 끝의 세 손가락으로는 연필을 감아쥐고 왼손의 엄지와 인지로는 칼잡은 오른손을 도와가며 정성스럽게 연필을 깎았는데 녀석은 농부가 고추밭에 말뚝을 세울 요량으로 나무 막대의 끝을 잡고 나무 막대의 다른 끝을 칼로 툭툭 잘라내며 뾰족하게 만드는 그런 폼으로 연필을 난도질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도 그 폼으로 조금 거칠기는 하지만 연필이 깎여나가는 것이 신기하다.

요즘은 손으로 돌리는 것이든 전기 모터로 돌리는 것이든 연필 깎는 기계가 없는 집이 거의 없다. 옛날에는 칼의 주용도가 연필 깎는 것이었는데 이제는 연필이 아닌 다른 무엇인가를 자르는 것이 칼의 주목적이지 연필 깎는 것이 주목적이 아니다.

그러다 보니 아이들이 연필을 깎고 있는 모습을 보기가 거의 불가능하고 아이들은 연필 깎는 기술을 전수 받지도 훈련 받지도 못했다. 연필 깎는 기계가 고장나는 바람에 제나름대로 위기를 극복해가는(?) 아들 녀석을 보며, 이 기회에 손의 기예를 살릴 수 있도록 연필깎기를 사주지 말고 칼로 연필을 깎는 전환점으로 삼을 것인지 주말에 같이 쇼핑 나가 좋은 전기식 연필 깎는 기계를 사줄 것인지 갈등하게 된다.

전국민적으로 연필 깎기 운동을 일으켜 보면 어떨까? 연필 깎기 기계 생산업체의 생존이 달린 문제라 안되는 이야길까? 문명이 발달할수록 환경 파괴와 인간 능력 상실 쪽으로 가속화하며 치닫고 있고 사회는 더 복잡한 상호 관계 속에 얽혀들고 있음을 연필을 들여다보며 절감한다.

그것을 보고 있노라니 연필처럼 남을 위해 깎여주고 자신을 죽여 가며 남을 위해 헌신하는 것이 또 있을까 싶은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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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현대자동차 연구소 엔지니어로, 캐나다에서 GM 그랜드 마스터 테크니션으로 지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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