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태지는 투항하지 않았다

'말'지 10월호 기사에 대한 반론

등록 2000.09.24 21:57수정 2000.09.25 0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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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태지에게 '사회적 기대'를 하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의 사회적 영향력을 떠올린다면, 그가 '음악인'으로 봐달라고 한다고 해서 순수 음악인으로만 보이지는 않을 수도 있다. 그리고, 그가 부담을 느끼지 않고 싶다고 해서, 우리가 부담을 주지 않아야 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이번 10월호의 말지의 기사에서는, 그러한 부담이 상당 부분 편견과 잘못된 정보에 근거하여 무리하게 '과도'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우선, 표지를 화려하게 장식한 '투항자로 돌아온 저항군'이라는 제목부터 그렇다. '투항자'라고? 서태지가 '적'에게 '무기'를 버리고 '항복'한 사람인가?


기사를 읽은 본인은 그의 '적'은 언론과 대중음악의 구조적 한계와 어두운 부분 - 즉 기자의 표현에 따르면 여의도 권력과 스타시스템 - 이고, 그는 '무기'인 자신의 음악, 타협받지 않는 창작과 표현세계를 '버리고' - 즉 현실과 타협하고 돌아온 것이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 밖에 없다. 직접적인 비판이나 비난은 없고 오히려 '아쉬운' 부분으로 표현했지만, 요지는 이것이라고 해석된다. 그럼 이 관점에서 쓰여진 기사는 과연 어떠했나?

컴백쇼에 대한 부분을 보자. 기자는 아주 중요한 부분을 놓쳤다. 새로운 형식, 즉 방송용이 아닌 공연을 기대한 기자는 실망한 듯 보인다. 그러나 한가지 짚어보고 싶다.

그 컴백쇼에 참여한 팬들 중 상당수는 헤드뱅잉과 슬램의 공연문화는 커녕, 하드코어류의 음악조차 생소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을 앞에 두고 공연해야 할 서태지가 그러한 '공연문화'를 위해 노력해야 했다고? 만약 이러한 분위기에서 그러한 '슬램'을 위해 무대의 경계를 허물어뜨렸다면 과연 '에너지 충돌'이 일어났을까? '팬들의 충돌'이 일어나지 않았을까.

이번 공연은 애초 당시 스탠딩 공연으로 기획된 것도 아니었다. '태지팬들의 질서의식'을 믿고 더 많은 팬들과 함께 하기 위해, 도중에 바뀐 것이었다. 사실, 스탠딩 콘서트조차 대중음악 공연문화에서 생소하지 않은가.

그리고 팬들이 그날, 자신들의 열정을 발산시키지 못해 아쉬워했는가? 아니, 상당수는 '만족'해 했다. 대부분 처음 접해봤을, 스탠딩 콘서트에서의 열광적 분위기에 도취해 있었다. 나는 서태지 본인의 "슬램은 음악을 즐기기 위한 문화인데 우리 나라에서는 소수만이 즐긴다. 우리 팬들도 즐기게 됐으면 좋겠다. 그래서 뮤직비디오에도 포함시킨 것이다"는 말에 적극 공감한다.


비약일 수 있겠지만, 모든 것이 제약된, 심지어 음악을 즐기는 문화마저도 제약된 현실 속에서 이러한 시도가 '자유'를 찾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말하는 태지에게 더욱 강한 신뢰를 갖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본인은 감히, '팬들의 열광은 슬래머들이 대신했다' '서태지의 현재와 따로 놀았다'는 해석은 기자의 편견에서 비롯된 것이라 판단한다.


그리고 기자는 컴백쇼를 '여의도의 권력과 결탁'했다고 평했다. '팬들은 마치 녹화장의 쇼케이스 같았다. 음향효과역의'라는 말은, 서태지가 '팬'- 혹은 그로 대변되는 자신의 주체적 모습 - 대신 '방송'을 선택했음을 말하고 싶은 듯 들리지만, 아니, 본인은 결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서태지가 자신의 음악을 많은 이들에게 들려주기 위한 매개체로, 그리고 '팬'을 만나기 위한 매개체로 '방송'을 선택한 것일 수도 있음은 왜 고려하지 않는가? 그는 '들려주기'위해, 혹은 '함께 즐기기 위해' 음악을 만드는 사람이다. (그렇지 않다면 음반을 왜 발표하겠는가) 그가 음악을 전달할 매체로 가장 대중적인 방송을 선택했음을, 그리고 오히려 그를 기다려온 수많은 팬들에게, 그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 서태지의 '배려'였던 것이라 봐야 하지 않을까.

어떤 존재가 '악'영향을 끼치고 있다 하여, 그 존재 자체를 부정할 수는 없다. (전혀 악영향을 주지 않는 사회적 존재도 있던가?) 방송도 마찬가지다. 지금의 '여의도 권력'이 방송의 '본질'적 모습은 아니지 않은가. 언론 본연의 임무를 망각하고 자본주의 논리를 따라가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생긴 '악'의 부분이 아니던가.

그는 '가요순위 프로그램에는 출연하지 않을 것'이라고 컴백 즈음부터 밝혀왔다. 그리고 지금, 그는 자신의 무대는 현재 방송 프로그램들과 맞지 않다며 현재의 쇼프로 등에는 출연하지 않겠다고 말한다. 그가 기자가 말하는 '시도'를 시작한 것이라 보는 것은 무리일까?

이 기사를 쓴 기자는 기사 말미에 서태지가 '말'지 와의 인터뷰에서 '저항가수임을 인정했다'고 덧붙였다. 그는 저항하려 한 적이 없다는 논리가 제기되는 것을 의식한 듯하다. 그래, 그는 그가 거부하든 거부하지 않든, 이미 대중음악계에서, 한국 문화계에서 '저항'의 상징일지도 모른다. 본인도 그가 '저항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그가 이번에 결국 '저항'대신 '투항'을 선택했다고 볼 수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기자의 질문, '공연장 하나 만들어 컴백쇼를 하는 것, 혹은 콘서트장에 방송국을 불러들이는 형식'의 사회적 기대는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실례로, 3집 발표 때 서태지와 아이들은 콘서트를 통해 컴백했고 KBS가 그를 녹화방영하기도 했었다. (물론 그 효과는 기대 이하였다)

그러나 그 기대는, 이제 막 그 역할을 해내려고 하는 이의 '시도' 자체를 지나치게 무시한 것은 아닐까.

덧붙이는 글 | 본인은 서태지의 팬이다. 4년 7개월을 그 누구못지 않게 기다려온 팬이라 자부하고 있다. 그렇기에 본인의 입장은 서태지, 그를 아끼고 사랑하는 입장임을 밝힌다. 그의 팬이니 이러한 의견이 주관적이라 할지 모르겠지만, 어차피 그 누구의 입장도 주관이 아니던가? 제 3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팬과 팬이 아닌 사람, 그리고 그 정도의 차이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서태지 팬으로서, 그리고 '말'지의 정기 구독자로서 느낀 이번 기사는, '말'지가 '말'지 자체의 사회적 역할에 부담을 느끼고 사안에 접근한 것은 아닌가 생각된다.

덧붙이는 글 본인은 서태지의 팬이다. 4년 7개월을 그 누구못지 않게 기다려온 팬이라 자부하고 있다. 그렇기에 본인의 입장은 서태지, 그를 아끼고 사랑하는 입장임을 밝힌다. 그의 팬이니 이러한 의견이 주관적이라 할지 모르겠지만, 어차피 그 누구의 입장도 주관이 아니던가? 제 3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팬과 팬이 아닌 사람, 그리고 그 정도의 차이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서태지 팬으로서, 그리고 '말'지의 정기 구독자로서 느낀 이번 기사는, '말'지가 '말'지 자체의 사회적 역할에 부담을 느끼고 사안에 접근한 것은 아닌가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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