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 노조 오늘 12시 경영진 규탄대회
독도 관련 모리 일본 총리의 회견 내용을 삭제하고 방송한데 대해 박권상 사장이 직접 나서 국민에게 공개 사과해야 한다는 안팎의 여론이 높다.
한·일정상회담 직전인 지난 21일 KBS1TV를 통해 방송된 특별회견에서 모리 요시로 일본 총리가 "독도는 일본땅"이라고 주장한 인터뷰 내용을 삭제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KBS에는 시청자들의 항의 전화가 잇따랐다.
또한 언론들은 모리 총리의 망언을 보도하면서 "KBS가 국익을 핑계로 모리 총리의 발언을 삭제한 것은 정권의 눈치를 보기 위해 국민의 알권리를 박탈한 것"이라며 비난하고 있다.
또 16개 시민단체로 구성된 '독도수호를 위한 국민연대'(대표 신용하)가 어제 낮 12시 일본대사관 앞에서 '모리 총리 망언을 규탄하는 집회'를 가지는 등 시민단체의 반발도 거세지고 있다. 인터넷 KBS 홈페이지에는 수많은 네티즌들이 'KBS는 겁쟁이인가?' '알권리를 삭제하다니, 과연 KBS가 공영방송인가?' 등의 글을 올리며 국민 앞에 공개 사과와 삭제된 인터뷰 내용의 방송을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정작 파문을 일으킨 KBS는 지난 27일 오후 5시 뉴스에서 외교통상부의 입장을 한 차례 보도했을 뿐 이러한 여론을 철저하게 외면하고 있다. 심지어 민주당과 한나라당, 자민련, 민주노동당 등 정당의 논평조차도 보도하지 않는 등 침묵을 지키고 있다.
이에 대해 사내에서는 "우리가 잘못을 시인하지 않고 침묵을 지킨다면 KBS에 대한 국민들의 불신만 심화될 것이라며 박권상 사장이 직접 나서 국민에게 사과해야 한다"는 여론이 높아지고 있다.
특히 '국익을 해치는 프로그램은 안된다'는 박 사장의 태도가 모리망언 삭제사건을 빚은 계기로 작용했다는 점에서 박권상 사장이 책임지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는 것이다.
한편 조합은 오늘 오후 2시 본사 라디오 공개홀에서 제55차 대의원대회를 열어 정리해고 저지와 사내개혁 쟁취를 위한 투쟁 일정을 확정한다.
조합은 오늘 대의원대회에서 "KBS노동조합은 단체협약 등을 통해 기 합의된 사내개혁 과제의 이행과 정리해고 저지 등 조합의 7대 요구 관철과 박 사장의 독선경영 저지를 위해 파업을 결의하며, 경영진 퇴진 투쟁을 포함한 부분파업, 총파업 등의 투쟁방법과 시기에 대하여는 비대위에 위임한다"는 내용의 파업찬반투표안을 상정할 예정이다.
조합은 이에 앞서 오늘 낮 12시 민주광장에서 사내개혁 촉구와 정리해고 저지 집회를 열어 KBS가 처한 총체적 혼란의 원인이 된 박 사장의 독선경영을 규탄한다.
박 사장의 위선, "국익보다 진실에 충성하라"
박권상 사장 글 따로 행동 따로
KBS가 어쩌다가 이 지경이 됐는가. 일본 모리 총리의 '독도 망언'을 삭제한 사건은 박권상 사장이 취임한 이후 질곡 상태에 빠져버린 KBS의 현주소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독도 망언' 삭제 사건이 공개된 후 정치권과 국민들 사이에서는 KBS에 대한 비난 여론이 빗발치고 있다.
그러나 사측은 DJ의 방일을 앞두고 이 인터뷰가 방송될 경우 "한·일 정상회담에 미칠 악영향과 국익을 고려했다"는 황당하고 어줍잖은 논리만 내세우고 있다. 과연 사측이 말하는 '국익'이 무엇인지, '국익'이 언론의 게이트 키핑(GATE KEEPING) 과정에서 국민이 알아야 할 '팩트'를 걸러내고 은폐하는 여과 기준이 되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언론'과 '국익'의 관계를 복잡하게 따질 것 없이 우리의 박권상 사장이 남긴 명문을 도용해 보자.
1956년 11월 이집트의 나세르 대령이 수에즈 운하를 '불법'으로 국유화하자 영국 정부는 무력으로 수에즈 운하를 점거하였다. 압도적 여론의 지지를 받았다. 그러나 <옵서버>지는 '국제깡패 행위'라고 자국 정부를 규탄하였다. 영국 대부분의 시민은 이런 정부의 결단에 박수갈채하였으나 일간지에서는 <가디안>지, 주간지에서는 <옵서버>지만이 정면으로 반기를 들었다. 역사의식에서 우러난 '양심의 소리'였다.(영국 정론지 <옵서버>, 강원일보)
박 사장은 또 자신의 평론집에서 장구한 언론생활에서 터득한 교훈을 다음과 같이 비장하게 서술하고 있다.
44년 긴 언론생활에서 내가 터득한 한 가지 교훈이 있다. 언론, 그리고 언론인은 진실, 어느 단편적인 사실이 아니라 어느 한 사실을 둘러싼 포괄적인 진실을 발견하고 이를 정직하게 알리는 데 1차적 충성을 다해야 하는 것이다 … 개인의 이해 관계, 소속사의 방침, 사회와 국가의 이익에 대한 충성심보다 진실에 대한 충성심을 앞세운다는 것은 말하기도 쉽지 않고 실천은 더욱 어려운 일이다. 그렇지만 실로 인간과 인류를 사랑하고 평화와 조화를 이룩하려면 진실에 대한 충성을 앞세워야 하는 것이 언론의 기본 철학이라고 확신한다.(박권상 평론집,<오늘 그리고 내일> 서문 중에서)
참된 저널리스트는 허위를 물리치고 진실을 찾아야 하고 억압에 대한 저항, 자유를 택하면서도 그러나 늘 독립된 입장을 고수한다는 것, 어느 개인, 어느 집단, 어느 세력에도, 그들과 뜻을 같이 하는 경우에조차, 거기에 스스로를 100% '코미트'해서는 안된다는 언론의 원칙이 있다. 나는 이 원론적 직업관을 소중히 생각하면서… (평론집, <감투의 사회학> 서문 중에서)
구구절절이 금과옥조 같은 말씀이다. 대한민국 언론인들이 평생 지표로 삼을 만한 경구이다. 그런데 왜 박 사장이 입성한 뒤 KBS에서는 '국익' 등의 이유로 일본 총리 망언이 삭제되고 <추적 60분>과 드라마가 불방되는 사태가 잇따라 발생하는 것일까. 왜 KBS의 현업자들과 데스크들이 사장님의 '원론적 직업관'을 하찮게 여기는 것일까.
그 이유는 다름아니라 박 사장의 '글 따로, 행동 따로'에 있다. 박사장의 위선과 기막힌 생존술이 우리 조직 내에 이미 독버섯처럼 퍼져 있는 것이다.
논점을 바꿔 박사장의 '예전' 입장과는 배치되지만 언론이 '국익'을 고려할 수도 있다는 측면에서도 '독도 망언' 삭제 사건을 살펴보자.
과연 망언 삭제가 국익에 도움이 되었는가. 주지하는 대로 모리 총리의 망언은 우발적으로 나온 것이 아니다. 제작진이 주한 일본 대사관을 통해 사전 질문지를 보냈고, 거기에는 독도에 대한 일본 정부의 기본입장을 묻는 것이 포함돼 있었다. 며칠 뒤 한국 대통령과 회담을 가질 일본 총리는 한국의 공영방송과의 단독 회견에서 "독도는 우리 땅"이라고 명확하게 밝혔다.
이 문제를 전혀 언급하지 않고 투자 유치와 북한 지원을 요청하는 한국 대통령을 일본 총리는 속으로 얼마나 우습게 생각했을까. 한국을 대표하는 언론 기관에 '독도는 우리 땅'이라고, 일본 총리로서는 처음으로 한국 언론에 대고 천명했는데도 스스로 놀라 은폐해버리는 것들이라고…
예상치 못했던 일본 총리의 '직설적' 표현에 제작진이 인터뷰 직후 현지에서 본사 CP에게 편집 가능 여부를 의논하고, 편집하는 게 좋겠다는 입장을 제시했다는 것은 십분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보도본부 간부들이 이 문제에 대해 회의까지 열었고 그 과정에서 보도제작국 일부 기자들이 모리 총리의 발언을 그대로 방송하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을 개진했는데도 끝내 삭제결정을 내렸다는 것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특히 보도제작국 책임자는 일본 총리의 독도 망언이 여러 차례 있었기 때문에 굳이 다룰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고 하나 70년 대 이후 일본 총리의 직접적인 독도 영유권 주장 발언은 처음이었다. 우리 정부는 독도에 대해서 '침묵이 금'이라는 어정쩡한 태도를 취해왔지만 공영방송인 KBS도 충격적인 망언에 대해 침묵해야 했을까.
과연 그것이 국익을 위한 것이었을까. 괜히 떠들면 일본의 술책에 말려들 뿐이라는 지적도 있지만 그래도 일본 총리의 발언을 국민들에게 그대로 전달하고 사후에 어떻게 대응하는 것이 과연 '국익'에 도움되는 것인지를 국민 여론에 물어보는 것이 언론으로서의 정도임은 너무나 분명한 일이다.
결과적으로 KBS의 망언 삭제 파문으로 대통령의 일본 순방과 정상회담은 독도 영유권을 드러내놓고 주장한 일본 총리에게 투자 유치를 구걸한 조공외교의 표본이 돼 버린 셈이 됐다. 이쯤해서 우리의 박사장이 예전에 대 일본 굴욕외교를 준엄히 꾸짖는 명문장을 감상해 보자.
날로 들어서는 고급호텔에 가면, 일본인들이 활개를 치고 젊고 예쁜 우리 아가씨들이 그들에게 매달려야 하고, 서울 강남 일대에 가면 일본 요정, 일본 음악, 일식 간판이 요란하다. 얼마 안가 우리는 다시 한번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는 게 아닐까 심히 우려되지 않을 수 없다. 총칼로 점령당한 식민지가 아니라 돈의 힘에 우리 스스로 매달리는, 그런 신판 식민지 말이다. "돈이 오는 데 명령이 온다"고 하지 않았던가 … 일부 지각 없는 사람들이 "우리가 너희들(일본)의 안보를 위해 공헌하고 있으니 돈을 더 달라"식의 논리를 부끄러움없이 전개하는데 … 염치도 쓸개도 아예 내팽개친 사람들이 아닌가. 한심스럽기 그지없다.(일본이 다시 일어난다, 1985, 열매)
만일 일본이 북한과 국교를 정상화한다면 경제협력이 뒤따를텐데, 낙후된 북한 경제 사정에 비추어 북한 또한 일본 경제에 예속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그렇게 될 때, 일본은 경제력을 가지고 남북한을 분할통치할 수 있는 지레를 가지게 된다. 생각만 해도 끔찍스런 일이다… 대안은 우리 스스로 강해지는 것이다. 경제적으로 군사적으로 일본의 침략에 대응할 수 있는 힘을 길러야 1백년전 무력한 우리 조상들이 자초한 치욕을 반복하지 않는다. (스스로 강해져야, 1994년, 경남일보)
우리는 박 사장이 자유주의자를 자처하고 있음을 잘 알고 있지만 적어도 그의 글에 나온 대로의 일본관을 보면 강경한 민족주의를 넘어 약간은 국수주의 쪽으로도 기울어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박사장이 수장인 KBS의 뉴스는 일본 총리의 망언은 자진 삭제하고 양국 정상의 '대 한국 투자 확대'와 '대북 공동 지원' 합의 사실만 충실히 보도했다. 박사장은 을사보호조약 90년이 되던 해에 장지연 선생의 '시일야 방성대곡'을 길게 인용하면서 우리 언론을 질타한 바 있다.
장지연은 이 논설문으로 64일 간의 옥고를 치렀으나 이 논문 한 편은 2천만 민족의 분노를 대변했고 정기를 일깨웠다 … 그러나 장지연이 살아있다면 나약하고 약삭빠르고 돈벌이에 연연하는 한국 언론을 어떻게 평가할까. 부끄러운 일이다.(일요신문, 1995)
박 사장의 가정법대로 장지연 선생이 살아있다면 일본 총리의 망언을 알아서 삭제하는 KBS를 어떻게 평가할까. 진짜 부끄러운 일이다. 박권상 사장은 이번 사태에 대한 책임을 지고 즉각 대국민 사과문을 발표해야 한다. 그리고 KBS는 삭제한 문제의 일본 총리 발언을 지금이라도 그대로 방송하고 미온적인 우리 정부에 확고한 대응방안을 촉구하는 한편 국민의 여론을 수렴해야 한다. 그것만이 국민의 알권리를 침해한데 대해 반성하고 실추된 KBS인들의 명예를 회복시키는 길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KBS 노동조합 9월 29일자 특보에도 실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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