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빈 외교통상부장관의 폭탄주 발언이 물의를 빚고 있다. 이 장관은 출입기자단과 폭탄주를 돌리던 자리에서 올브라이트 미국무장관을 포함한 여성들을 성적으로 비하하는 저질 발언을 했다는 것이다.
<오마이뉴스>를 통해 보도된 내용을 보면 아무리 술자리였다고 해도, 일국의 장관으로서는 생각하기 어려운 수준 이하의 발언을 이 장관은 거리낌 없이 내뱉었다. 나는 혹여라도, 우리 사회의 술문화에서 그런 정도의 음담패설은 아무 것도 아니지 않느냐, 왜 새삼스럽게 이러느냐는 항변을 이 장관이 하는 일이 없기를 바란다.
아무리 술자리에서였다 해도, 이 장관이 외교 주무장관의 신분으로서 외교적 문제를 야기할 수준 이하의 발언을 한 것은 분명 심각한 문제였다. 또한 장관과 기자단과의 관계라는 것도 일단은 공적인 관계가 기본이기 때문에 '술자리에서는 흔히 있는 일'이라는 식의 변명이 통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기자단과의 술자리를 마련한 이 장관은 분명 공인의 신분이었다. 이 장관이 사적인 우의를 다지기 위해 사비를 털어 그런 자리를 마련한 것은 아니지 않은가. 이 장관은 공인으로서의 몸가짐을 제대로 하지 못한데 대해 마땅히 부끄러워 하고 응분의 책임을 져야 한다.
물론 이같은 술자리 발언을 보도하는 것이 적절했느냐 하는 반론이 있을 수 있다. 대꾸할 가치조차 없는 음담패설류의 발언을 굳이 공론화시키고 외교적 문제까지 초래하는 것이 적절한 일이냐는 반론은 나름대로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더욱이 국익에 부담을 줄 수 있는 외교적 문제에 대한 보도에 신중한 자세를 유지해 왔던 우리 언론계의 분위기에서 <오마이뉴스>의 보도가 돌출적으로 받아들여질지도 모른다.
나는 이 장관의 발언에 대한 보도 여부는 각기 장단점이 있는 문제라고 생각한다. 외교적 문제를 우려하여 보도를 자제하는 것이 옳으냐, 아니면 외교적 문제를 감수하면서라도 우리 내부의 문제를 바로잡기 위해 보도를 하는 것이 옳으냐 하는 것은, 두 가지 가운데 어느 쪽에 우선적인 가치를 두느냐에 따라 판단이 다를 수 있는 문제라고 생각한다.
여기서 <오마이뉴스>는 후자를 선택한 셈이다. 보도의 적절성 여부에 대한 반론제기는 가능하겠지만, 이번 보도가 갖는 객관적 정당성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나는 이 장관의 발언에 대한 이번 보도가 한 개인의 수준미달을 확인하는 호기심 차원을 넘어, 보다 사회적 의미를 갖는 논의로 발전되기를 기대한다.
폭탄주 문화가 어디 어제 오늘의 이야기였던가. 고위공직자, 정치권, 검찰, 언론계, 심지어 군에 이르기까지 폭탄주 돌리기는 자신들의 힘과 권위를 확인하는 의식(儀式)처럼 되어 있다. 폭탄주를 통해 뭉치려하고 자신들의 우월적 정체성을 확립하려는 문화는 결국 패거리 의식, 권위주의 의식의 표현일 뿐이다.
그러나 누구도 폭탄주 돌리기를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정당이나 국회 주변에서는 전날밤의 폭탄주 돌리기 무용담을 늘어놓는 '높은 분'들의 모습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폭탄주 문화를 비판하는 기사를 게재한 언론사의 수많은 기자들도 폭탄주 대열에 팔걷고 나서곤 한다.
나는 지금 바람직한 술자리 문화 이야기를 늘어놓으려는 것이 아니다. 문제는 폭탄주 문화가 결코 술자리 문화로 끝나지 않는다는 데 있다. 폭탄주 문화는 향응, 밀실, 거래, 담합, 패거리같은 어두운 단어들과 중첩되어 있다. 폭탄주를 돌리는 그 밀실에서 어떠한 정서적 '결의'가 이루어지고 있는지, 그 의식에 끼지 못한 사람들로서는 알 수 없는 노릇이다. 그러나 흔히 정치권에서 폭탄주 돌리기를 '기자 관리'의 왕도(王道)로 꼽고 있는 이유가 무엇인가를 가늠하기는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이 장관의 발언이 보도되자, "술자리에서 한 얘기조차 그렇게 공개되면 어떡하냐"는 반응도 있다. 정서적으로는 이해가 되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러나 술자리에서 한 얘기조차 이렇게 알려짐으로써, 적어도 일국의 장관 자리에 있는 공인이라면 앞으로는 술자리에서도 그런 얘기는 삼가하는 계기가 될 수 있지 않겠는가.
이 장관은 "폭탄주를 마시지 않고는 한국을 논하지 말라"고 말했다 한다. 한국의 정신을 폭탄주 정신으로 생각하고 있는 그의 무모함이 놀랍기만 하다. 그러니까 이런 사고도 칠 수 있는 것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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