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십니까. 김현종(전 중앙일보 정치부 기자)입니다. 앞으로 영국을 중심으로 한 유럽이야기를 정기적으로 들려드리겠습니다. 영국 또는 유럽은 미국보다 군사, 금융, 산업 분야에서 처집니다.
이른바 국력은 미국이 강합니다. 유럽 인구 3억5천만명과 미국 인구 2억3천만명을 대입해도 그렇습니다. 그렇지만 이곳에는 사람이 있습니다. 다소 근원적인 고민이 있는가 하면 때로 치사한 다툼이 있고, 예술이 있는가 하면 요리도 있습니다.
한마디로 사람을 도구가 아닌 사람 자체로 봅니다. 그 테두리 안에서 사랑도 우정도, 미움도 갈등도 이루어집니다. 다만 이를 통괄하는 규칙은 우리보다 훨씬 엄해 보입니다.
영국 사람, 나아가 영국의 사람사는 이야기를 잘 전달할 수 있도록 최선을 하겠습니다. 틀린 점이 있거나 궁금한 점이 있으면 언제든지 이메일 jongk21@yahoo.co.kr 또는 hyun-jong.kim@green.oxford.ac.uk로 연락주십시오.
감사합니다.
정치와 돈,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인가 봅니다. 지금 영국은 집권 노동당 정부의 현직 장관과 전직 장관이 돈 문제를 놓고 크게 다퉈 화제입니다.
어디서나 힘센 사람들 싸우는 얘기는 불구경만큼 재미있습니다. 언론도 온통 도배질이고 대부분 사람들이 그 얘기만 나오면 반색을 하고 한마디씩 합니다. (영국사람 의외로 수다스럽습니다)
첫 번째 주인공은 피터 만델슨 북아일랜드 담당 장관입니다. 토니 블레어 총리의 최측근입니다. 만델슨은 야당 시절에 동료인 저프리 로빈슨의원에게서 37만파운드(한국돈 6억원상당)를 시중 이자보다 아주 싸게 빌려 근사한 집을 샀습니다. 장관이 된 지 1년7개월만에 이게 언론에 터지면서 말썽이 나자 그만 두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당시 한국 언론에도 크게 보도가 되었습니다. '영국, 새 정부의 도덕적 위기' 운운해서 말입니다. 이제 그 2탄이 터지고 있습니다. 공동 주인공인 로빈슨의원, 가난한 노동당에서 가장 부자의원이었습니다. 친구에게 돈 빌려준게 문제가 돼 그만 두고 지금껏 놀고 있습니다. 둘이 같이 장관직을 그만 둘 때도 그는 "그 돈은 내가 그냥 조건없이 빌려준거야"하고 덮어주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정확히 일주일 전부터 언론을 통해 대대적 공세를 펴고 나왔습니다. "사실은 그때 만델슨이 다 죽어가는 소리로 돈 빌려달라고 했어, (그 친구 거짓말쟁이야)" 로빈슨의원은 조만간 이런 내용을 소상히 담은 책을 발간할 예정입니다.
로빈슨과 만델슨, 지난번에는 동일한 금전 스캔들에 휘말렸지만 같은 동료 장관으로서 서로 감싸는 처지였습니다. 이제 2라운드는 전직과 현직 간의 감정다툼으로 번지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만델슨은 그 다음 개각(99년10월)에서 현재의 북아일랜드 장관으로 재기용되었고 로빈슨은 여전히 놀고 있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 주인공, 토니 블레어 총리입니다. 집권당간부들끼리 언론을 통해 치고받고 하니까 당수이자 총리로서 창피한 일입니다. 창피한데 그치지 않습니다. 언론은 돌연 어제부터 "총리가 야당 총재할 때 로빈슨한테 4억원의 정치자금을 개인적으로 얻어 썼다더라" 하는 의혹을 제기하기 시작했습니다. 말하자면 정치자금법을 위반했다는 겁니다. 사태는 갈수록 불거지고 있습니다.
사람들의 관심은 왜 로빈슨이 이 시점에서 만델슨을 물고 늘어지느냐는데 우선 있습니다. 또 블레어 총리의 자금수수 여부도 관심입니다. 만델슨과 로빈슨 문제, 우선 인물 연구가 필요합니다.
현직 실세인 만델슨 장관은 누가 뭐래도 블레어총리의 오른팔입니다. 97년 5월 총선 승리의 밤에도 만델슨은 블레어 총리 집에서 조각을 함께 구상했습니다. 말소리가 사근사근하고 패션감각도 좋습니다. 노동당 정부의 특징중 하나가 장관들이 턱수염을 기르는 것인데 - 좌파지성인들의 특징이라고 합니다- 피터는 수염이 없는 깔끔한 비즈니스맨의 외모입니다.
그는 공식적으로 북아일랜드 장관이지만 그보다는 총리의 분신으로서 다방면에 활동하고 있으며 언론관계도 그의 주영역중 하나입니다. 지난달 노동당 대회 때에는 텔레비전에 나와 총리의 정책 전반을 설명하기도 했습니다. 말하자면 보사부장관이 총리를 대변해 TV대담에서 이것저것 다 설명하는 식입니다. 유력 언론사의 사장, 간부를 수시로 만나 협조를 부탁하고 정보를 전달합니다.
로빈슨의원은 정치인인지 사업가인지 애매합니다. 그는 76년부터 고향인 코벤트리에서 국회의원을 하고 있는데 정치적 두각을 나타내기보다는 사업가로 성공했습니다.
모든 사람이 그를 좋아합니다. 왜냐, 사람이 선량하고 밥값을 잘 내기 때문이랍니다. 영국 기자들 말에 따르면 그의 지갑은 최소한 수표나 50파운드 지폐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번 일이 터지고 어떤 여기자가 그의 집에 찾아가 인터뷰를 요청했습니다. 밤늦게 찾아가기 미안해 삼페인을 하나 사가지고 갖는데 그보다 몇배 좋은 샴페인을 다시 선물로 주었답니다. 그는 "인생의 즐거움 중의 하나가 (있는 사람 것) 서로 나눠 갖는 것"이라고 공공연히 말합니다. 로빈슨은 노동당이 집권한 후 직책도 급여담당 국무상을 맡았는데 이는 우리로 치면 공무원 급여 뿐만 아니라 정부예산 편성도 다 책임지는 자리입니다.
로빈슨의원이 말하는 사건의 진상은 이렇습니다. 두 사람은 야당을 하며 20년전부터 알고 지내는 사이입니다. 97년 총선을 앞두고 노동당이 각종 여론조사에서 이기기 시작하며 기세를 올릴 때 하루는 만델슨이 "난 집에 가면 정말 썰렁해, 제대로 쉴 수가 없어"라며 신세타령을 하더니 새집 살 돈을 좀 빌려달라고 했다는 겁니다.
이런 얘기를 하며 저녁밥을 먹고 있는데 차기 총리, 즉 토니 블레어 당수가 휴대폰으로 3번이나 만델슨을 찾았습니다. 로빈슨은 바로 돈을 꿔줬습니다. 그러나 두 사람 사이는 점차 멀어지기 시작했습니다.
만델슨이 빌린 돈으로 집을 사더니 집들이 파티에도 자기를 초대를 하지 않았다는게 로빈슨의 주장입니다. 어쨌건 그후 총선에서 승리해 두 사람이 다 장관이 됐습니다.
장관간의 금전 거래라는 희한한 일은 이 사실이 가디언지에 특종 보도되며 정국 쟁점으로 커졌습니다. 둘이 다 도덕적 책임을 지고 사표를 썼습니다. 다만 둘 다 "서로 좋은 마음에서 빌려주고 빌려받은 것이다"고 덮어버리면서 더 이상 쟁점은 되지 않았습니다. 만델슨은 지금도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정리된 일을 이 시점에서 로빈슨의원이 치고 나온 이유는 무엇일까.
우선 서운함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자기는 쉬고 있는데 계속 잘 나가는 만델슨을 보고 배가 아팠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번 폭로로 타격을 입혀 최소한 내년 총선 후에는 장관을 더 못하도록 상처입히려는 것이다. 이건 누구나 알 수 있습니다.
영국 언론들은 이와함께 보다 심층적인 접근을 합니다. 로빈슨은 당내 2인자인 고든 브라운 재무장관 계보이고, 만델슨은 블레어 총리 계보인데 두 사람간의 대리전으로 해석하는 겁니다.
사실 지난 9월에 총리하고 재무장관이 은근히 크게 다퉜습니다. 유류세 인상에 항의해 농부들이 데모를 벌이고 이에 유조차 기사들이 동정파업을 벌여 전국적인 석유 파동이 났습니다. 시민들은 빵, 우유 사재기를 벌였습니다. 블레어 총리는 당시 사태 수습을 위해 이해당사자들을 만족시킬 보완책 마련을 지시했고 재무장관은 "농민에 대한 세금 감면 등 조치는 있을 수 없다"고 원칙론을 고수해 며칠동안 정부가 혼선을 일으켰습니다.
당시 상황은 재무장관이 불리했는데 고든 브라운 재무장관측은 이 때도 만델슨이 언론인들을 만나 자신을 공격하는 기사가 나가도록 조장했다고 의심했습니다.
영국의 총리와 재무장관은 우리와 다릅니다. 당내 최다계보 보스와 제2계보 보스인 경우가 많습니다.
블레어총리의 자금수수 부분은 일단 문제제기 이후 조용합니다. 당 대변인은 "모두 공식적으로 기부한 것이기 때문에 문제될 게 없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야당인 보수당의 윌리엄 헤이그 당수는 신이 나서 배후 규명, 진상 조사를 촉구하고 나섰습니다.
영국을 흔히 정치 선진국이라고 합니다. 실제 그렇습니다. 제도적인 측면, 관행적인 측면 다 그렇습니다. 다만 이번 고프리 전 장관의 복수혈전을 보면서 사람 사는 동네는 어디나 다 똑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영국 사람들 눈은 파랗습니다. 그러나 피는 똑같이 빨갛습니다. 돈과 권력, 친밀함과 서운함에서 싸움이 빚어지는 것도 똑같아 보입니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