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노동에 시달리는 헌책방 노동자

헌책방 주인들도 `노동자'인데

등록 2000.11.15 11:28수정 2000.11.15 1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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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화점이란 데는 고등학생 때 동무들이랑 학교 끝내고 놀러갈 때 가 보고 그 뒤론 잘 가지 않았습니다. 어머니가 백화점 가자고 이끌어도 썩 내키지 않아 어머니를 괴롭혔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릅니다. 그냥 가면 될 일인지도 모르나 백화점이란 데 가는 게 참 껄끄럽더군요.

이 백화점이란 델, 사랑이와 가끔 가곤 하는데(구경하러) 갈 때마다 백화점 직원들이 걸상도 없이 내내 서 있는 모습을 봅니다. 언제더라, 인천 고향 동무가 군대 가기 앞서 돈벌이로 백화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할 때 얘기를 들으니 참말로 힘들어 하더군요. 앉지도 못하고 수많은 사람을 마주하며 앵무새처럼 한 얘기 또 하고 또 하기를 날마다 되풀이하잖습니까.


간부나 사장이야 돈 주고 사람 부려 돈을 긁어모으듯 벌겠지만 `고용된' 이들이 일하는 환경은 그야말로 엉망이라 할 수 있는 곳이 백화점이라고 봅니다. 이 백화점만큼이나 중노동에 시달리는 곳이 또 헌책방이 아니겠냐 하는 생각이 듭니다. 농사꾼도 힘들고 공장 노동자도 힘들어 어느 곳 하나 일이란 게 쉬운 곳은 없습니다.

여기서 힘들다고 하는 건 쉬고 싶어도 마음 놓고 쉬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일감은 장사를 제대로 하려면 어쩔 수 없이 부쩍 늘 수밖에 없다는 뜻도 있고요.

그래서일까요? 헌책방을 오래 한 나이 드신 분들은 책방에 있을 때면 내내 앉아계시곤 합니다. 힘이 드니 자전거를 타고 다니기 버거워 오토바이를 몰게 되고요. 혼자는 힘이 드니 젊은 사람을 쓰기도 하고요.

하지만 무엇보다 한 해 내내 쉬는 날이 없다는 일이 그야말로 `중노동'에 시달린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공장 노동자나 사무직 노동자는 명절이면 떡값이 나오고 상여금도 있습니다. 하지만 장사꾼에겐 상여금이란 없고 늘 버는 날찍(수입)이 있을 뿐입니다.

여기에 헌책방 하는 분들은 주말에도 쉬는 날에도 명절에도 쉬지 못해요. 용산 <뿌리> 아저씨는 명절이나 제삿날이나 잔칫날이면 고향에 꼬박꼬박 내려 가려 하지만 그렇게 내려간 날도 책방 문 열어야겠다는 생각 때문에 저녁에라도 문을 엽니다.


인천 <아벨서점>은 설날과 한가위에도 문을 엽니다. 성탄절에도 열고요. 저로선 명절 치닥거리(?)가 끝나고 피붙이도 모두 집으로 돌아가고 애쓰신 어머니 아버지도 곯아떨어져 집이 조용할 때면 전화를 걸어 책방 문 여셨냐고 묻고 찾아가기엔 좋습니다. 하지만 이런 명절에도 책방 문을 열어야 마음이 아늑하고 그런 날에도 찾아올 손님을 기다리니 '노동 시간과 강도'를 헤아린다면 중노동에 시달린다고 말할 수 있겠죠.

그러나 헌책방을 꾸리는 분들이 책짐 나르는 일이나 한 해 내내 쉬는날 없이 책방 문을 열거나 아침부터 밤 늦게까지 책방 문을 열어두는 일을 자신이 하는 즐거운 일로 여긴다면 얘기는 달라지겠죠.


저도 남이 보기엔 몸을 축내며 사는 듯하지만 책을 읽고 헌책방을 다니고 사람을 만나고 글을 쓰고 소식지를 만들어 거저로 주는 일을 즐거이합니다. 돈이 없다고 소식지를 돈 받고 파는 법 없이 살아왔죠.

이런 일을 스스로 즐길 줄 알고 흐뭇하게 생각하듯 헌책방 임자분들도 '남'인 제 눈길로는 중노동에 시달린다고도 하겠지만 `나'인 당신들 눈으로는 자신이 죽는 날까지 힘차고 꿋꿋하게 할 자랑스럽기도 하고 뿌듯하며 즐거운 일이겠죠.

그러나 '주 40시간 노동'을 이야기하고 '주 5일 근무'를 이야기하는 마당에 우리네 노동 현실은 어둡기 짝이 없습니다. 영국 헤이온와이를 다녀온 분은 그곳 책방들은 모두 저녁 다섯 시나 여섯 시 무렵이면 문을 닫는답니다. 그리곤 자기가 즐기는 `취미'나 `일'이나 `다른 잔치' 따위를 즐긴답니다. 아침 열 시 즈음부터 저녁 대여섯 시까지는 먹고사는 일을 하고 그 뒤 모든 시간은 자기 자신을 생각하고 자신이 즐기는 일을 하는 때로 삼는답니다.

우리도 이렇게 할 수 있을까요? 이렇게 하다간 굶어죽기 딱 알맞다고 하겠죠. 밤 늦게까지도 문을 닫지 못하는 길거리에 가득한 가게들을 보세요. 구멍가게는 요새 밤 한두 시까지도 문을 열어요. 24시간 편의점이 있어 좋다고도 하지만 좋은 사람이 있다면 그 `좋음'을 누리게 하려고 고생하는 사람이 있게 마련 아닙니까. 밤 늦게 잠을 못 자는 사람은 낮에 어떻겠어요. 밝은 햇볕 나는 낮에는 쿨쿨 자기 바쁠 수밖에 없죠. 사람이 이렇게 해서 제대로 살 수 있겠습니까.

외대 앞 <신고>를 보면 아침 아홉 시 반이나 열 시부터 저녁 열 시나 열한 시까지 문을 엽니다. 하루에 열둘에서 열세 시간 일합니다. 한 해 내내 쉬는 날이 없으니 한 주에 무려 85-90시간을 일하는 셈입니다. 엄청나죠? 용산 <뿌리>도 낮 두 시부터 새벽 두 시까지 일하니 마찬가지고요. 하루 열 두 시간을 책방 살림 하는데 쓰기에 우리나라 헌책방 하는 분들은 "책을 많이 갖고 있어도 가지고 있는 책을 읽을 짬"과 "갖고 있는 책을 요모조모 따져보며 연구하고 공부할 짬"이 없습니다.

그래서 겉핥기로 이러저러한 책은 많이 알지만 속 깊이 읽지 못해 책 손님들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지 못해요. 이 대목은 헌책방 하는 분들이 모두 안타깝게 생각하는 대목이기도 하고요. 영월 책박물관 하시는 분은 어찌 책방 살림 꾸리는지 모르겠으나 박물관을 열고 책을 펴내는 모습을 보니 자기 공부할 시간을 갖는 듯합니다.

다른 분들도 이렇게 `자기 시간'을 갖는다면 무척 높은 눈높이와 깊이로 책 이야기를 할 수 있다고 봅니다. 다들 책 떼거나 사오고 책방 문 열기에 쫓기고 바빠서 못할 뿐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헌책방 꾸려오며 겪고 보고 느낀 일이나 앞으로 하고픈 일을 말씀해 달라 하거나 글 한 번 써달라 하면 다들 손사래 치며 못 하겠다고 뒤로 빼시죠.

어쩌다 읽고픈 책을 사는 때에도 집에 갖다 두기만 하고 한 해가 다 가도록 한 장도 못 펼치기도 한답니다. 이러한 데에 정부 문화관광부 뒷배가 있다면 이 분들을 `무형문화재'와 비슷하게 `무형문화 지킴이'로 뽑아서 자신들이 책 공부를 하고 자신이 눈길두는 밭을 깊이 있게 파헤치고 비교연구-책과 책 비교-를 하며 문화와 나라와 겨레에 이바지할 수 있다고 봅니다. 그렇죠?

이 분들이 책방 살림을 마음 놓고 할 수 있도록 얼마만큼 가게세나 직원을 두는 삯을 뒷배한다면 얼마만큼 가르친 뒤 마음 놓고 하루에 서너 시간이라도 자기 시간을 가질 수 있지 않을까요? 그러면서 무척 깊이 있게 책을 사 보는 연구가들과 이야기 나눌 짬을 가지며 자신들도 나름대로 또 다른 밭을 갈고 닦는 한편 공부하는 밭을 바라보는 눈길도 닦을 테고요.

그렇게 하면 직원들도 그러한 모습을 어깨 너머로 보고 배우면서 열 해, 스무 해가 지나면 독립해서 책방을 열 수 있고 정부 운영 도서관에 들어가 꽤나 이로운 일을 할 수도 있을 테고요.

아무튼 대가리-이 말이 좀 상스럽습니까? 하지만 이렇게 상스러운 말이 나오도록 문화 정책 하나 내놓지 못하고 엄한 데 돈 쓰는 일만 배우고 일류대학교 나오고 유학도 다녀온 분들인지라 `대가리'란 말을 쓸 수밖에 없습니다-가 빈 사람들이 문화관광부에서 아까운 세금만 써버리고 있어 무슨 생각이든 엮어내지 못하는 것도 문제입니다.

아구야. 이런 얘기가 갑자기 왜 나왔지? 어쨌든. 헌책방 주인분들이 중노동에 시달린다는 얘기를 하려던 건데. 그리고 이 문제는 이분들이 자기 스스로만 애써서 풀 수 있는 문제는 아닙니다. 이건 `문화'이며 '문화 인력'을 정부가 얼만큼 잘 살려 쓰며 나라와 겨레를 북돋우냐 하는 문제와 걸린 일입니다.

정책만 잘 펼치면 헌책방 개인으로도 좋고 책 손님에게도 좋고 나라 문화에도 좋은 일을 얼마든지 할 수 있고, 그러면서 중노동에 시달리는 문제도 손쉽게 풀 수 있습니다.

덧붙이는 글 | 하지만 우리나라는 '헌책' 문화뿐 아니라 '새책' 문화도 제대로 없어서 도서관 자료구입비나 출판유통 현대화에 쏟는 예산은 다 해도 100억이 안 됩니다. 하지만 국립국어연구원에서 다달이 내는 소식지를 찍는 데는 세금을 몇 억씩 선뜻 집행하더군요. 부실 은행과 기업을 살리는 데 쓴다는 몇십 조 가운데 1/100이라도 출판 문화, '책 문화 유산'을 담고 있는 '헌책방 문화 살리기'에 쓴다면 우리 나라에도 `한국의 헤이 온 와이'를 지금 당장이라도 열 수 있습니다.

덧붙이는 글 하지만 우리나라는 '헌책' 문화뿐 아니라 '새책' 문화도 제대로 없어서 도서관 자료구입비나 출판유통 현대화에 쏟는 예산은 다 해도 100억이 안 됩니다. 하지만 국립국어연구원에서 다달이 내는 소식지를 찍는 데는 세금을 몇 억씩 선뜻 집행하더군요. 부실 은행과 기업을 살리는 데 쓴다는 몇십 조 가운데 1/100이라도 출판 문화, '책 문화 유산'을 담고 있는 '헌책방 문화 살리기'에 쓴다면 우리 나라에도 `한국의 헤이 온 와이'를 지금 당장이라도 열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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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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