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길도에서 보내온 시한편>
"요새 나는 말없는 것들이 부럽습니다"

등록 2000.11.25 05:31수정 2000.11.27 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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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 것도 남기지 않는 삶

늦가을 들면서 밤에 자주 문 밖을 나서는 버릇이 생겼습니다.
지나가는 바람 소리에도 문을 열어 보고,
창문으로 들어온 달빛의 움직임에도 자주 잠을 깹니다.
책상 앞에 앉았다가 오늘도 댓잎 바람 소리에 문을 열고
마당으로 나왔습니다.


봉순이는 제 새끼들을 모두 끌어안고 잠이 들었는지 기척도 없습니다.
꺽정이는 여전히 집으로 들어가지 않고 서리를 맞으며 웅크려 자고 있습니다.
비온 뒤끝이라 그런지 밤 공기가 찹니다.
하지만 하늘이 그렇게 맑고 푸를 수가 없습니다.

요새 나는 말없는 것들이 부럽습니다.
말없는 바위와 돌들, 말없는 나무와 풀들, 말없는 구름들, 별들.
요새 나는 흔적 없이 살다간 사람들이 부럽습니다.

무언가를 이루고 남기는 것은 중요합니다.
하지만 아무 것도 남기지 않고 가는 사람이야말로 실로 놀라운 사람입니다.
흔적을 남기지 않은 사람들이란 본디 무소유의 삶을 살다간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여전히 버려야 할 것이 너무도 많습니다.
벌써 새벽 닭이 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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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이자 섬 활동가입니다. 사단법인 섬연구소 소장을 맡고 있으며,<당신에게 섬><섬을 걷다><전라도 섬맛기행><바다의 황금시대 파시>저자입니다. 섬연구소 홈페이지. https://cafe.naver.com/island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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