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년만에 만난 나의 남자친구

초등학교 때의 감정이 아직도 끊어지지 않고...

등록 2000.12.14 19:42수정 2000.12.15 1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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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나오리라곤 도착할 때까지도 짐작하지 못했다. 나보다 늦게 도착한 초등학교 시절 같은 반 여자 아이로부터(이젠 아이가 둘 딸린 아줌마가 되었지만) 우리 동기 남자아이들은 모두 결혼한 것 같다는 말을 맥빠져 하며 들을 때 네가 저쪽에서 나타났다.


이런 만남이 내게 어떤 사랑의 시작을 가져다 줄거라는 가능성을 전혀 믿지 않으면서도, 또 사랑을 꿈꾸는 것이 사랑에 목말라하는 내게 어쩔 수 없는 본능같은 욕구였다면 감정적인 측면에서 어쩌면 너의 등장은 하나의 출렁임이었는지도 모르겠다.

17년만에 만난 동기들의 모습이 익숙해지는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앨범을 잃어버린 원죄로 모든 기억까지 묵혀 둔 난, 좀처럼 기억하지 못해 친구들로부터, 그리고 너로부터 핀잔을 듣긴 했어도, 너에 대한 기억만큼은 참으로 선명하게 살아있음을 너도 눈치챘을거다.
좋아하는 아이들끼리 앉혀 준 담임의 한 가지 칭찬할 덕목이 우리를 짝지워주었으니까.

너와 난, 서른이라는 뻔뻔함으로, 그리고 그리 부끄러워하지 않는 솔직함으로 꽤나 그 자리에서 서로를 챙기며, 좋아했음을 주위 친구들에게 과시했지. 그 사이에 녹아 들어간 너와 나의 감정은 실제로 어느 정도였을까. 헤어지고 난 후 지금까지 먹먹한 내 가슴처럼 너도 창밖을 보며 담배를 한숨과 함께 토해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넌 내 눈을 바로 보지 못했다. 이상한 일이다. 유부남인 네가 뭐가 꺼릴 것이 있어서.....반대로 난 네 눈빛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너의 작은 쌍꺼풀진 눈과.....아, 그런데 네 얼굴이 기억나지 않는다. 그렇게 많이 들여다보았는데.....어쩔 수 없는 내 모순이다. 인간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 바보.

넌 보자마자 날 구박했다. 내 못된 성격을 핀잔하며, 책상 금가르기 싸움을 나만의 독점물인냥 공격했다. 난 우리 문화가 그랬다고 변명했지만, 넌 그걸로 날 공격하는 것을 즐기는 것처럼 보였다.

"치졸해. 성격도 못됐구. 선 넘어갔다고 지우개까지 짤랐어! 내가 가져라 가져 하고 참았지."
웃음을 머금고 어색함을 일시에 무너뜨리기엔 사실 네 방법만큼 좋은 것도 없겠지.


"친구 중에 하나가 동창 모임에 나갔는데 오랜만에 만난 아이들이 예전엔 잘 나가는 대기업 다녔는데 지금은 어쩐다, 예전에는 뭐였는데 지금은 어쨌다면서 체면 내세우는 일이 많았다고 하더라. 우린 그런 모습이 없어서 참 좋아."

".......나도 나올 때는 그러려고 했어. 그런데 네 얼굴 보니까 그렇게 못하겠더라.......".


그렇게 대답하고 넌 술을 많이 마셨다. 담배도 자주 피웠고, 자리에서도 자주 일어났다. 그리고 핸드폰 통화가 잦았다. 난 부인 전화가 아닐까 생각했다.

"울 학교 선생님이 동창 모임에 나갔는데. 아직까지 결혼도 안 하고 뭐했냐고 남자 동기들이 하도 구박해서 기분 나빠 다시는 안 가겠대. 나도 그럴까봐 무지 떨었거든. 니들은 안 그래서 너무 좋다. 히~"

" 걔네들 20대지? 그게 20대와 30대의 차이야. 30대가 되면 사는 것이 힘들거든. 무슨 대학 나왔냐, 뭐하고 사냐. 그런 거 하나도 묻지 않잖아. 그냥 앉아서 떠들다 오는거야."

우린 모여 앉아 옛 기억을 더듬기에 바빴다. 초롱초롱한 기억으로 옛 일을 족집게처럼 집어내는 옆의 친구를 보면서 난 새삼 놀라고 있었다. 난 내가 언제부터 안경을 쓰기 시작했는지도 잘 모르는데, 내 옆자리에 앉은 여자친구와 너는 내가 6학년 때부터 안경을 쓰기 시작했다고 주장하고 있었으니..... 나에 대해 많은 것을 기억하는 네가 난 참 좋았다. 내가 좋아했던 네가 기억해 주어 더 행복했다. 내가 안경 쓸 것 같다고 네게 얘기를 했었던가? 모르겠다.

너와 헤어지고 사춘기 시절은 너에 대한 기억으로 보냈다. 교회도 다니지 않고, 이성을 접할 기회가 없던 내게 넌 대학 들어가기까지 온전히 유일한 마지막 이성이었다.

성수역 앞에서 지하철을 기다릴 때마다 가끔 난 널 떠올렸다. 너를 생각나게 하는 지하철역. 그 뒤 대학에 들어가고, 남자를 대하고, 만나고, 좋아하게 되면서 넌 내 기억에서 완전히 뒷걸음질 쳤다. 'I Love School'이 열리기까지.

기억은 잊혀지는 것이 아니라 묻어두는 것이라고 난 그 자리에서 몇 번을 되뇌였던가. 모교(고등학교) 교사가 된 동창도 있었다. 사립고등학교 교사가 된 여자 친구. 어린 시절 그렇게 크게 보이던 그 친구 '향숙'.

공교롭게도 우리가 만나는 날은 사법고시 2차 발표가 있던 날이라고 했다. 그래서 대학 1학년 때까지 연락이 되었던 또 다른 친구가 나오지 못했다. 붙으면 한 턱 내고, 떨어지면 나오지 않겠다고 했다지. 결국 떨어진 셈인가. 서울대 가겠다고 그 좋은 대학 다 포기하고 삼수까지 해서, 결국 사법고시까지 치는 '영지'.

살아있으니까 이렇게 만나는구나 라고 너는 말했다. 그래. 그 중에 죽은 동창도 있었다. 왜 없겠나. 짐작은 했던 일이다. 네가 살아 있어줘서 좋았다. 만날 수 있어서......내게 위로와 함께 독이 되었다.

넌 술자리에서 줄곧 말했다. 성격은 변하지 않는구나. 성격은 변하지 않아 라고.....내게 들으라는 듯, 신기하다는듯 자꾸 중얼거렸다. 네가 본 내 성격은 어떤 것일까. 난 그것이 궁금해 미칠 것 같았다.

자리를 옮기려고 신발을 신는데 넌 내 발을 계속 보고 있었다. 난 네 시선을 의식하고 있었고, 내 눈에도 너의 큰 신발이 꽉 차게 들어왔다.

우리는 함께 걸었다. 17년 만에 만난 친구들이 걸어가는 모습. 내 맘에 커다랗게 원을 지으며 스며들고 있었다.

" 앉아 있을 때는 몰랐는데 너 왜 이렇게 안 자랐냐? 남들 클 때 뭐하고....."
" 이것 봐. 다른 얘들보다 신발 굽이 낮잖아~"
놀리는 네게 난 연방 발을 들어 보이며 애써 변명하고 있었다.

"피. 155?"
그러면서 내 머리 위에 손을 얹어 헝클었다. 난 머리를 손가락으로 빗으며 볼멘투로 뭐라고 했다. 너의 걸음은 느렸다. 말끝이 가라앉는 네 말투처럼 터덜터덜 느리게 걸었다.

"보조 좀 맞춰. 왜 이렇게 느려~"
"재네들은 왜 저렇게 빨리 걷냐? 서두를 것도 없는데....."
"너, 한국인 아니구나. 후후. 마음에 든다."

너와 나의 눈빛은 참으로 따뜻했다. 너와 나란히 걷는데 마음이 든든했다. 나보다도 느리게 걷는 너와 보조 맞추느라 힘들었지만.....

"넌 키 많이 자랐다. 후후. 여전히 잘 생겼구.....살이 좀 쪘나? "
그러면서 너의 턱을 툭툭 쳤다. 넌 웃으며 좋아했다.

앞서 가던 향숙이를 불러 옆에 나란히 세우면서 넌 그랬다. 기분이 좋다고..... 왜냐고 물었더니, 6학년 때 너보다 한참 크던 향숙이가 너보다 작아서 그렇다고....넌 모임 내내 나를 웃겼고, 우리를 즐겁게 했다.

너는 왜 임신한 아내를 두고 혼자 천마산으로 스키를 타러 갔을까. 2년 된 너의 결혼생활. 그 어디에 너의 삐끗함이 보이는 것일까. 내년 3월이면 출산한다는 너의 아내. 그녀는 어떤 사람일까. 다른 친구들처럼 명함조차 내밀지 않는 너였기에 그저 객쩍은 호기심으로 덮어버릴 뿐이었지만......

병우가 너를 공격할 때마다 내가 너를 감싸야 했다. 그러나 넌 신경쓰지 않았다. 오히려 감싸려는 나를 우습게 만들었다.

"네 매력은 유머잖아. 그렇지?"
"아냐. 내 매력은 살이야."

" 전화했을 때 천마산으로 스키 타러 가는 중이었는데 부르니까 차를 돌리더라구."
" 그러엄. 성수가 얼마나 의리 있는데....."
" 아냐. 그 때는 여자가 없었어."
그러면서 웃는 너.

이런 식이었다. 훤칠한 너, 술배가 약간 나와 보였지만 넌 여전히 젊고 멋있었다. 내가 좋아하던 녀석이었다는 기억에 빠져 나 혼자 허우적거리는 것이었을까.

부반장을 하던 내가 좀 쌀쌀하고 엄했다고 동기들이 한 마디씩 던져 내가 주눅들어 보였을 때 넌 정의의 기사처럼 튀어 올라 내게 말했다.

" 얘들이 너의 본 모습을 모르는구나. "
난 감격했다. 다른 대답이 나올거라고 따뜻한 말 한 마디를 기다렸다.

" 그렇지 응. 그래도 너 밖에 없어."
" 아이들이 치졸한 너의 모습을 몰라."
윽! 나쁜 놈. 넌 그렇게 날 놀리고, 웃기고, 즐겁게 했다. 우리의 대화는 그렇게 이어졌다.

넌 술을 많이 마셨고, 술잔이 좀처럼 비워지지 않는 내 잔을 바라보며 어떻게 그 잔을 가지고 그렇게 오래 앉아있을 수 있냐고 핀잔을 주었다. 그리고 계속 실실 웃었다. 난 계속 웃고 있는 네가, 말없이 웃고만 있는 네가 이상해서 물었다.

" 왜, 자꾸 웃어? 뭐가 그렇게 웃기는데....."
" 우리들이 17년 만에 만난 것이 그렇게 웃겨?"

넌 웃으며 고개만 끄덕였다. 네 발음은 알아듣기 점점 어려워갔다. 넌 그 날 많은 생각을 하는 것처럼 보였다. 가장 농담을 잘 하면서도, 중간 중간 침묵을 지키며 앉아 있는 널 보며 난 무슨 생각을 했던 것일까.

오늘 시를 아이들에게 가르쳤다. 김남조의 '너를 위하여'라는 사랑에 관한 시를..... 별로 좋아하는 시가 아니어서 심드렁했지만, 너를 만나고 난 나의 감정 상태가 짖궂게 사랑을 확인하고 싶게 했던 것일까.

사랑을 앓고 있는 녀석을 하나 지목하여 물어 보았다.
"사랑을 하면 어떤 변화가 생기지?"
"음....기분이 좋아요....."
"그렇지. 생기가 넘치고 사는 것이 즐겁지. 학교 오는 것도 좋아지고.....후후. 그리고 또?"
"음....그리고 오래 살고 싶어요."

난 순간 입을 벌렸다. 중학교 2학년 녀석의 입에서 나온 말. 오래 살고 싶어요..... 녀석이 진지한 것은 알았지만......

"그래. 그 친구랑 같은 하늘 아래서 오랫동안 얼굴 보며 살고 싶다는 거지?"
"몰라요....."
녀석은 얼버무린다. 녀석 꽤나 심하게 앓고 있구나.

사람이 사는 이유 중의 하나인 사랑. 난 소나기라는 소설을 좋아하고, 짝사랑을 더 좋아한다. 애틋하고 여운있는 사랑을 좋아하는 것이다. 초등학교 6학년 때의 감정이 아직도 끊어지지 않고 이어진다는 사실이.....내가 단지 외로워 지금 한 순간 그 친구를 떠올리는 것일지라도, 난 우리의 사랑이 순수하다는 것을 믿는다. 내가 그를 마주 볼 때 우리는 여전히 서로의 그 때로 돌아갈 수 밖에 없기에, 그렇게만 만나야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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