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길도에서 보내는 편지>
겨울 밤 시련이 키우는 것들

등록 2000.12.19 22:13수정 2000.12.21 1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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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공기가 찹니다.
오늘도 마당 어귀 수돗가 세수대야의 물이 얼었습니다.
추위 탓인지 내가 제 집 앞을 지나쳐도 봉순이는 집 밖으로 나올 생각을 않습니다.

부용이만 쪼르르 달려와 아는 체를 합니다.
녀석은 매일 아침 내 방에서 인기척이 들리면 마루 위로 올라와 한바탕 달리기를 하며 아침인사를 건넨 뒤 내려가곤 하는데 오늘은 내가 녀석보다 빨랐습니다.


큰길 건너 묵정밭에서는 새끼 염소 우는 소리 애절합니다.
밤새 어미 곁을 떠나지 않고 그 따뜻한 품에 코를 박고 잤을 테지만 서리내린 들판 영하의 밤추위를 견디기에 녀석은 아무래도 너무 어려 보입니다.

길고 추운 겨울밤, 시련이 키우는 것은 겨울 보리들만이 아닌 것 같군요.
저 들판의 어린염소와 뜰 앞의 강아지와 들꽃들, 뒷산의 어린 산비둘기까지도 무서리 내린 밤과 거센 비바람의 고통을 견디며 자랍니다.

말없는 바람이 와서 때때로 상처를 위무해 주기도 하고 착한 달빛이 보듬어 주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이들의 고통이 줄어들 까닭은 없습니다.

그러나 견딜 수 없는 아픔에도 이들은 미세한 신음 소리조차 내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들이 정말로 아파하지 않는 걸까요.
이들의 비명을 우리가 듣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요.

나는 얼마전 어린 부용이가 닷새 동안이나 밥을 먹지 못하고 밤새 고통을 삼키며 속으로 앓는 소리를 들은 적 있습니다.
그 소리는 침묵보다 고요히 들려왔으므로 거의 놓칠 뻔 했지만 나 역시 잠못 들고 날밤으로 새우던 어느 밤 부용이의 내면이 지르는 고통의 소리를 확연히 들을 수 있었습니다.


녀석은 주어진 고통을 뱉어내지 않고 속으로 삼키고 있었습니다.
날로 야위어 가는 부용이를 보며 내가 걱정스러워 하자 뒷집 노인은 저것이 클려고 몸살을 앓는 거다 너무 걱정마라 그러시더군요.

그 고통스런 며칠의 시간이 지난 후 거짓말처럼 부용이는 다시 먹성좋고 건강하고 활기찬 강아지로 돌아왔으며 또 그렇게 불쑥 커 있었습니다.


아! 저 어린 강아지까지도 자기에게 주어진 고통의 날들을 스스로를 성장시키는 시간으로 만드는 지혜를 가지고 있는데, 어째서 사람인 나에게는 지혜뿐만 아니라 참을성마저도 없는 것인지.

문 밖에서는 이제야 눈을 뜬 게으른 봉순이의 기재개 켜는 소리 들립니다.
강봉순, 또 늦잠 잤냐.
문을 열며 봉순이에게 인사를 건네는데 별채에서 부용이가 무언가를 물고 나옵니다.

아니 저 녀석이.
손님들이 잠깐 문을 열어놓고 나간 사이 부용이 녀석이 방에 들어가 비닐 봉지에 쌓인 반찬 꾸러미를 훔쳐낸 것입니다.

나는 신발 신는 것도 잊고 마루에서 뛰어내려 달려 갑니다.
부용이는 입에 문 노획물을 더 꽉 물고 냅다 뜁니다.
야 너 거기 안서.
나는 쫓고 부용이는 달아나고 그렇게 또 하루가 시작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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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이자 섬 활동가입니다. 사단법인 섬연구소 소장을 맡고 있으며,<당신에게 섬><섬을 걷다><전라도 섬맛기행><바다의 황금시대 파시>저자입니다. 섬연구소 홈페이지. https://cafe.naver.com/island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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