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집 뒷간 치우기

등록 2000.12.20 14:05수정 2000.12.20 14: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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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 저희 집은 아직도 재래식 화장실 그대로입니다. 원래 저희 집은 아주 오래된 것이어서 화장실보다는 변소라는 말이 더 잘 어울릴 뒷간이 있는 것은 당연하겠지요. 어렸을땐 아무 생각 없이 볼일을 잘 보았지만 도회지 생활을 조금 맛보고부터는 저희 집 뒷간에 여간 불만이 많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더구나 얼마 전까지만 해도 출입문이 따로 없어서 처음 우리 집 뒷간을 이용하는 사람은 여간 당황스러운 것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제가 군 복무시절 여동생이 편지로 저한테 휴가 오면 뭔가 보여줄 것이 있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뭘까?'하며 참 궁금해 했는데 알고 보니 저희 집을 새로 지었더군요.

그래서 '우리 집도 드디어 수세식 뒷간으로 바뀌었겠구나'하며 기뻐했습니다. 하지만 이게 웬일입니까? 욕실에 들어가 보니 수도만 덩그러니 설치되어 있고 당연히 있어야 할 수세식 변기가 눈에 띄지 않더군요.

이게 웬일이냐고? 저희 모친에게 항변했더니 씻는 곳이랑 화장실이 같이 있는 것은 시골노인네의 정서와는 거리가 먼 것이어서 일부러 수세식화장실 시설을 하지 않았다더군요. 덕분에 집은 20세기의 것이지만 뒷간은 태고적(?)의 그것 그대로 사용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실 저는 어렸을 때부터 그 뒷간에 익숙해 왔기 때문에 겨울에 좀 추운 것 말고는 특별히 불만이 없습니다. 하지만 경운기도 없고 분뇨수거차가 들어오지도 않는 시골농가에서는 뒷간의 가득한 분뇨를 처리하기가 힘듭니다.

그때도 오늘과 같은 어느 겨울 일요일 아침이었습니다. 저의 여동생이 비장한 투로 이렇게 저에게 말하더군요.
"오빠 오늘 마웃(마굿인지 마웃인지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뒷간의 분뇨 치우기를 뜻하는 사투리입니다)해야 된대."
그 소리를 들은 저는 정말 큰일이 닥쳤구나 싶었지요.


기실 저는 저희 집에서는 될 수 있으면 볼일을 보지 않는 것이 습성이 되어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저희 집 뒷간에서 볼일을 볼 때마다 이 뒷간의 분뇨를 언젠가는 내 손으로 치워야 한다는 걱정(?)에 차마 저희 집 뒷간을 이용할 수가 없었거든요.

여하튼 저희 모친과 밖에 나가면 요조숙녀인 저의 여동생, 그리고 패션에 있어서 리더를 자부하던 저 세 명은 손수레 , 똥장군 3개를 가지고 작업(?)을 시작했습니다. 사실 저나 제 여동생은 일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고 창피한 것이 문제였습니다.


저만해도 학교에 가면 그래도 의젓한 선생님인데 똥장군을 실은 손수레를 낑낑대며 끄는 모습을 저희 학교 학생들이 볼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정말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더라구요. 하지만 어떡합니까? 농사를 짓는 집에서 분뇨수거차를 부를 수도 없고 부른다 해도 오지도 않을 것이며 저희 모친이 좋은 거름을 공짜로 남에게 줄 분도 아니니까요.

저희 집을 나서면 저희 동네에서 제일 큰 도로가 있으며 길 끝엔 교회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난 큰길을 따라서 쭉 올라가서 저희 집 밭까지 똥장군을 실은 손수레를 끌고 가야 하는 것입니다. 들에 가면 저 혼자 똥장군을 들고 감나무 주위에 고루 고루 부어야 합니다.

일요일이라 예배를 마치고 나오는 아이들을 만나지는 않을까 걱정이 되더군요. 그때가 마침 교회예배가 마칠 시간이었거든요. 어쨌든 손수레에 똥장군을 싣고 저는 앞에서 끌고 제 여동생은 뒤에서 열심히 밀고 머나먼(?) 길을 떠났습니다. 아! 그날 따라 그 길이 왜 그렇게 길게 보이던지요?

정말 가도 가도 끝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제가 우려했던 일이 현실이 되고 말았습니다. 저 위쪽에서 우리 학교 아이들이 한 무리 우리를 향해 내려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길이 하나라 어디 피해갈 수도 없고 저는 꼼짝없이 아이들과 만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점점 아이들은 다가오고 똥장군에서는 냄새가 폴폴 나고 '정말 어디 쥐구멍이라도 없나?' 찾고 싶었지요. 요즘 아이들 말로 스타일 팍팍 구겨질 찰나였습니다. 그때만 해도 패션의 첨단을 걸었던 총각선생의 체면이 사정 없이 망가졌던 것입니다.

드디어 아이들을 정면에서 만났습니다. 그때 순간은 아무 것도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아이들이 저한테 인사를 한 건지 안한 건지 저도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여하튼 확실히 기억나는 것은 아이들이 코를 막고 인상을 찡그리고 지나간 것입니다(전부 여학생입니다).

어쩌겠습니까? 그날따라 그 길은 왜 그리 사람들이 많이 지나다니던지? 일을 마치고 저녁에 제방에 들어오니 내일 일이 걱정되더군요. 학교에 소문은 다 날거고 분명 아이들이 '선생님 어제 똥펐지요?'하고 놀릴 것을 생각하니 제가 많은 직업 중에 왜 하필이면 교사를 택했을까 하는 후회도 들고 하여튼 별의별 생각이 다 덜더군요.

전 그때 결심했습니다. 무슨 수를 쓰더라도 모친을 설득해서 수세식화장실을 만들겠다고. 다음날 저는 평소보다 더 근엄한 표정을 짓고 교실에 들어가야 했습니다. 그런데 제 생각과는 달리 아이들이 어제의 사건(?)에 대해 언급이 없더군요. 그래도 조마조마 수업을 마치려고 하는데 한 장난기 많은 녀석이 손을 들더니 이렇게 말하더군요.
"선생님 참 효자세요. 집안일도 많이 도우고..."

아 그 말을 듣는 순간 그 녀석이 왜 그렇게 이쁘게 보이던지. 마음씀씀이가 선생인 저보다 낫다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래서 어린이는 어른의 스승이다라는 말이 나왔나 봅니다. 일을 부끄러워했 던 저 자신이 참 어리석었구나 하는 생각도 들고...

저희 집은 여전히 그 뒷간 그대로입니다. 그래도 저는 쓸데없이 물을 낭비하지도 환경도 오염시키지 않는 그 뒷간이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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