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로리다도 스페인 땅이었다
세빌르의 알까자르에서 두 번째 감동을 받은 것은 전시실에 걸려 있는 지도이다. 앞서의 역사적 배경을 바탕으로 스페인 인들이 발견한 세계의 여러 곳이 지도에 실려 있었다. 이미 16세기에 플로리다와 뉴펀들랜드를 자기 땅으로 표시한 지도, 미주 대륙 전체와 호주, 필리핀, 인도네시아, 일본이 표시된 지도를 이들은 만들었다. 마젤란이 스페인을 떠나 남미 대륙 남단의 마젤란 해협을 거쳐 태평양으로 들어온 뒤 필리핀을 거쳐 콜럼부스의 가짜 인도가 아닌 진짜 인도와 아프리카 남단의 희망봉을 통과하는 세계 일주에 성공한 뒤 3년만에 다시 스페인의 카디즈 항구로 들어온 게 1520년대의 일이다.
세 번째는 역시 당당한 '제국 스페인'의 풍모를 엿볼 수 있는 그림. 마치 국군의 날 기념식에서 대통령을 비롯한 3부 요인과 부인들이 연단에서 기립해 무언가를 기다리는 듯한 그림이었는데 위압감을 줄 정도로 대단했다. 왕부터 훈장과 어깨띠를 두른 將軍(장군)의 정복을 입고 허리에는 은빛 칼을 차고 있다. 그 뒤로는 7-8명의 남자들이 똑같은 正服(정복) 차림으로 서 있고, 단상의 왼편에는 은백색 둥근 모자와, 모피코트처럼 생겼으되 밑 부분에만 털을 대 부풀린, 기품 있는 백색 원피스형 드레스를 걸친 귀부인 3명이 서 있었다. 왕비와 공주들로 짐작됐다.
일본도 우습게 아는 한국 사람들의 눈으로 보면 "야 이놈들, 무슨 날인지 되게 폼잡고 있구나"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하지만 그 날은 아마도 국가로서 스페인의 위엄이 한껏 떨쳐진 날일 것으로 상상되었다. 나라의 영광과 권력자의 위엄, 권위는 정비례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유럽 전역의 인플레를 낳은 스페인의 금은
세빌르를 떠나 카디즈로 향하는 날은 아침부터 장대비가 왔다. 자동차의 유리창 닦는 와이퍼를 2단으로 놓아도 앞이 잘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연간 강우량 400-500mm인 스페인 날씨에서 이런 날은 아마 일년에 한두 번 있을까 말까 싶었다.
출발 전 여행계획을 아는 모든 영국 사람들로부터 스페인 사람들의 거친 운전 습관에 대해 경고를 받았는데 웬일인지 이날은 차들이 영국 차들보다도 얌전했다. 옥스퍼드의 전문 용달기사 (아마 봉고차를 모는 나라시 기사라고 하면 의미 전달이 더 빠를 것이다) 미스터 더글라스의 말에 따르면 스페인 사람들은 미친 듯 운전하며 특히 여성이 그렇다. 여성의 사회 진출이 갑자기 활발해진 뒤 특히 두드러진다는 데 아마 남성 위주 사회의 한을 운전에 푸는 것 같다는 게 더글라스의 생각이다. 그는 교통사고도 빈번하며 특히 자신의 경험으로는 세빌르가 가장 심하다고 했다. 그러나 이날 세빌르 운전자들은 얌전했다. 나중에 프랑스의 끌레르몽- 파리간 300km를 달리면서 그 답을 알게 된다.
카디즈로 가는 차 속에서 나는 아이들에게 대략 다음의 이야기를 들려줬다.
"너희들도 봤지만 스페인의 건축물들은 참 대단하다. 엄청난 물량과 노력이 투입된 것들이다. 나중에 마드리드에 가서 보겠지만 마드리드의 왕궁은 방의 숫자 만도 2800개다.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궁궐이지. 아빠는 중국의 자금성이 가장 큰 궁궐인 줄 알았더니 러시아의 상 페테르부르크에 있는 궁전이 가장 크다는구나."
"스페인의 성당, 광장, 궁전들은 하나 하나가 크기도 클 뿐더러 많은 장식과 세공, 귀중한 미술품들이 창고처럼 차곡차곡 들어차 있어. 도대체 그 돈과 노동력은 모두 어디서 왔을까.
아빠가 배운 바로는 15세기부터 시작된 스페인 사람들의 신대륙 진출은 이 나라에 그야말로 엄청난 부를 가져왔어. 멕시코의 한 은광에서만 한해에 은 3천톤을 캤다는 기록도 있다. 금과 은이 물밀 듯 스페인에 밀려들어왔고 이는 당시만 해도 유럽의 다른 나라가 엄두를 못 낼 정도였지. 스페인의 금은 때문에 유럽에 엄청난 인플레가 생겼다는 기록도 있다. 그 금과 은으로 이런 건물들을 지은 것이다. 우리 주변의 보통 사람들도 집에 돈이 생기면 큰집을 사 거기에 멋있는 집을 짓거나 하다못해 좋은 가구를 들여놓지 않더냐."
십자군 전쟁의 패배를 벌충한 스페인 사람들
"그러면 스페인 사람들은 어떻게 해서 16세기에 세계 최고의 부자가 되고 각지에 모험가들을 보낼 수 있었을까. 아빠는 그 이유를 궁극적으로는 종교에서 찾는다. 당시의 스페인은 이슬람교도와의 700년간에 걸친 영토 탈환 전쟁을 치르면서 나라의 힘이 엄청나게 강해졌다. 700년을 싸우다 보니 사람도 많이 죽고 힘도 들었겠지만 나라는 발전했단다. 특히 이기는 싸움이었으니. 전쟁은 과학도 발달시키고 나라의 살림을 효율적으로 운영하는 방법도 가르친다. 비행기, 원자폭탄, 잠수함, 탱크 이런 것들이 세계1,2차 대전 때 발명되거나 보편화된 것처럼."
"한마디로 싸우는 데에만 몰두하다 보니 자기도 모르게 힘이 세어진 거야. 당시 편하게 살던 유럽의 다른 나라와는 다르지. 특히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절대적이었어. 생각해봐. 하나님의 땅을 회복하기 위해 싸우고 그 영광을 찬양하기 위해 성당을 짓는다고 할 때 그냥 먹고살기 위해 싸우고 건물을 짓는 것보다 더 열심히 하지 않았겠니."
"너희들 십자군 전쟁 알지, 프랑스와 이탈리아, 독일의 왕과 귀족들이 중심이 돼 성지 예루살렘을 이슬람교도들로부터 뺏자는 십자군 전쟁은 결국 실패했거든. 여기서도 영국은 약았다. 사자왕 리처드를 빼고는 영국 왕들은 십자군 전쟁에 무관심했어. 교황청이 자꾸 참전을 재촉하면 돈이나 좀 내고. 그렇지만 당시에 똑같이 이슬람교도들을 대상으로 싸웠던 스페인 사람들은 싸움에 이긴 거야. 얼마나 가슴이 뿌듯하고 기분이 좋았겠니. 신앙심과 자신감도 깊어지고. '역시 우리 하나님이 옳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겠지. 스페인 전체를 기독교로 통일하고는 그 자신감과 신앙심으로 세계에 나간 거야. 이제 우리가 찾게 되는 카디즈가 바로 그 출발점이야. 스페인의 맨 서쪽에 있는 항구로서 그 당시 사람들이 대서양 항해에 나서는 시발점이란다"
선교에의 열정과 금은에 대한 욕심
아이들에게는 얘기를 여기서 끝냈지만 상념은 더 이어졌다.
중세에서 근세로 넘어오는 유럽사에서 스페인의 통일전쟁, 이슬람세력 몰아내기는 기독교와 이슬람 사이의 문명의 충돌 차원에서 보면 제2전선에 해당한다. 제1전선이었던 십자군 전쟁은 이미 14세기부터 유럽 기독교 연합군의 패배로 끝나가기 시작한다. 그런 와중에 15세기말 이베리아 반도가 기독교도들에게 완전 회복된 것은 교황청을 비롯한 기독교 세력에 신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는 전 유럽적 경사였다.
특히 이 통일전쟁, 재탈환 전쟁에서 중심 축으로 기능한 카스띨랴와 아라공, 레옹, 나바르의 연합왕국(오늘날의 스페인)의 국력은 유럽 국가 중 최 정점에 달한다.
한편으로 힘의 분출 압력도 높아진다. 목표를 상실한 武力(무력)처럼 권력자에게 두려운 것은 없다. 이슬람과의 전쟁이 끝난 후에도 봉건 귀족들은 자신들의 군대와 상당한 재산을 갖고 있었고 이는 왕의 입장에서 보면 잠재적인 반란의 위협이었다. 평화기에 접어들면서 상대적 불이익에 직면하게 될 무인들의 불만을 분출해낼 통로가 필요했다. 마치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일본의 전국시대를 통일하고 조선 침공에 나선 것처럼.
스페인 사람들의 신대륙 진출은 이러한 정치적, 경제적, 종교적 배경을 갖고 있었기에 더욱 맹렬할 수 있었다. 국왕의 다목적용 정책적 지원, 통일전쟁에서 강화된 신앙심과 이에 따른 신대륙 선교에의 열정, '더 많은 금과 은을 가져와 국가에 기여하고 나도 부귀영화를 누리자'는 개인의 염원이 복합된 것이다.
1492년의 세 가지 의미
이들은 통일전쟁 말기부터 신대륙으로, 신대륙으로 향한다. 이러한 근세 스페인사의 정점에 해당하는 게 바로 1492년이다. 1492년은 스페인 역사라는 그림에 점을 찍는 畵龍點睛 (화룡점정)의 해이다. 세 가지 특기할만한 일이 있었다. 이 해 정월 초이튿날 스페인 군은 그라나다 인근에서 마지막까지 저항하던 이슬람 세력을 항복시켜 7백년이상의 긴 종교 전쟁에 마침표를 찍었다.
또한 크리스토퍼 콜롬부스가 스페인 이사벨라 여왕의 후원아래 8월 신대륙에 나서 성공했다. 이탈리아의 제노아 출신인 컬럼부스는 대서양 건너에 신대륙이 있다는 믿음으로 유럽의 대부분 군주를 유세했지만 그들은 돈이 없거나 내정의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스페인 출신인 로드리고 보르하 추기경이 그해 교황 알렉산더 6세에 뽑힌 일을 들 수 있다. 교황청과 스페인의 관계가 더욱 밀접해진 측면도 있지만 한편으로 신흥 기독교 강국 스페인의 위상을 로마의 노회한 종교 지도자들이 인정했다는 얘기도 될 것이다. 그 배경에는 스페인 왕실의 강력한 경제력도 한몫 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스페인 인들은 이처럼 1492년 그림 속의 龍(용)에 點(점)을 찍고 나자 무서운 기세로 신대륙 진출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한다.
이런 생각을 하며 세빌르- 카디즈간 도로를 달렸다. 지도를 놓고 보면 마드리드에서 왕으로부터 병력과 자금을 약속받은 모험가들도 이 길을 따라 갈 수 밖에 없다. 500년전 이 길을 따라 가던 그들의 마음은 얼마나 의기양양했을까.
여기서 잠시 며칠의 시간을 건너 뛰어 마드리드에서 본 아메리카 박물관 얘기를 하고 오늘의 스페인 이야기를 마칠까 한다. 역사 박물관인 아메리카 박물관은 스페인의 신대륙 정복과정에 대해 자세한 설명과 자료를 겸비한 곳이다. 프랑코 이야기가 스페인의 어제에 대한 이야기라면 아메리카 박물관에서 본 신대륙 정복 이야기는 그저께에 해당할 것이다.
프라도 미술관보다 아메리카 박물관을 봐야 할 이유
아메리카 박물관은 마드리드 중심지에서 택시로 10분 거리에 있다. 3개 층에 걸쳐 4개 섹션으로 나뉜 아메리카 박물관에서 가장 많이 본 이름은 '정복자'들이다. 콜롬부스, 마젤란을 필두로 코르테스, 피사로 등 20여명의 이름이 등장한다. 이들은 머스켓 소총 부대와, 당시 아메리카 인디오스들이 처음 보는 동물인 말(기병)을 이끌고 미대륙에 상륙해 오랜 전통문화국가 잉카, 마야, 아즈텍 등 토착 제국을 차례로 멸망시킨다.
이들이 신대륙에서 보고 가져온 물건들, 예컨대 솜브레로(서부 영화에서 턱수염 삐죽한 악당들이 쓰는 챙이 커다란 모자, 이 모자도 햇볕을 피하기 위한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창작품임을 이번에 알았다), 인디오스들의 도자기, 조각, 화살촉, 카펫, 움막형 가옥 등은 어찌 보면 충분히 예상 가능한 것들이다. 그보다는 이들의 정복 旅程(여정)을 담은 여러 장의 대형 지도와 인구 통계표, 그림이 관심을 끌었다.
지도는 앞서 세빌르의 알카자르에서 본 것처럼 16세기부터 18세기까지 스페인 모험가들의 미대륙내 활동을 선과 지명으로 표시해 놓은 것이고 인구 통계표는 1492년 이후 시기별로 남아메리카의 인종별 인구 분포를 추산한 것이다.
이 표에 따르면 1492년 중남미에는 약 1200만명의 인디오스들이 살았다. 블랑코스(백인), 네그로(흑인), 메스티조(혼혈)는 당연히 한명도 없다. 근대와 현대의 중간에 해당하는 1800년에는 인디오스가 800만, 블랑코스가 400만, 네그로가 600만, 메스티조가 550만명으로 추산해 그려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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