뜸만 들이는 검찰이 '권력의 시녀'라고?

등록 2001.01.16 02:16수정 2001.01.16 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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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새해 벽두. 미국땅에서 바라본 작금의 한국땅에서는 이상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그 하나는 안기부라는 국가기관의 돈을 끌어다가 개인의 선거자금으로 갈라 쓴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 당사자들이 오히려 목청높여 "규탄"을 외치고 있다는 사실이다.

한나라당은 야당이라는 이름의 우산 아래 서울 '규탄대회'를 시발로 전국에서 대규모 '원외투쟁'에 들어갔다는 것이다. 문제의 돈이 안기부의 것으로 최종 확인될 경우, 이들의 '독재규탄 장외투쟁'은 정말 기이한 정치협박이 아닐수 없다.

대체 무엇을 규탄한다는 말인가

또 한가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은 구 여당의 총선자금으로 지원된 안기부의 돈을 받은 사람이 190명에 이른다고 밝힌 검찰이 '4억원 이상'의 선거자금을 지원받은 의원과 선거자금 일부를 유용한 정치인 등을 소환대상으로 정했으나, "야당의 반발 등을 감안해 구여당 출신 여권인사나 원외정치인을 먼저 조사하는 방안을 강구중"이라는 사실이다.

4억원 이상을 받은 정치인만이 소환 조사대상인 데다 그나마도 야당의 반발을 감안해 구여권 출신의 '협조적'인 여권인사나 힘 없는 원외정치인들을 먼저 조사할 생각이라면 이들이 과연 문제를 해결할 의지가 처음부터 있는 것인지가 의아스럽다.

야당인 한나라당이 '장외투쟁'을 한다는 사실은 정말이지 가관이다. "뭐 낀 놈이 오히려 성낸다"는 속담은 이를 두고 한 말일까. 야당측은 만약 조사 결과 안기부 돈으로 드러날 경우 국민 앞에 이회창 총재가 사과할 것이라는 입장을 누차 밝히고 있다. 자신들도 그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고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도 이들은 한편으로는 일체의 조사를 못하도록 압력을 가하고 있다. 자신들의 부정이나 비리에 대한 수사를 "야당파괴를 통한 장기집권 음모"라고 말한다. 동원된 군중들을 모아놓고 정치인 비리 수사를 계속하면 정권퇴진 운동도 불사하겠다고 말한다. 국민과 법치주의에 대한 정면 도전행위에 다름 아니다. 대체 무엇을 규탄한다는 말인가.

검찰의 몰상식은 한나라당보다 한 발짝 더 앞서가 있다. 도대체 4억원 이상을 받은 인물만 소환조사의 대상이라는 인식은 어디에서 나왔을까. 이들의 인식은 차라리 야당의 그것보다 더 섬찟한 것이다. 수천만원이나 1~2억원 정도의 검은 돈은 받아썼다고 해서 그리 문제가 될 것이 없다고 '선언'하는 이들의 메시지는 가히 파괴적이다.


이것은 이미 검찰이 본격적인 수사도 하기 전에 수사의지를 포기한 것이나 다름없다고 본다. 당사자들이 극렬 반발한다고 해서 스스로가 밝힌 수사대상을 기피하는 검찰. 처음부터 핵심인물 단 한명을 초점으로 수사한다는 정보를 흘려 이곳 저곳 반응을 떠보며 소위 언론플레이를 하는 검찰의 모습도 이들이 처음부터 수사할 의지가 있었는지 조차 의심되는 대목이다. 이런 식으로 가다가는 정치권의 개혁을 통한 사회개혁도 물건너 갈 수밖에 없다.

검찰이 어째서 집권세력의 시녀인가. 오히려 그 반대이다.


또 한가지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사정이 이러할진대 야당과 국민 중 상당수는 검찰의 안기부 자금수사를 집권여당, 보다 구체적으로 대통령의 의중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고 있다는 점이다. 대체 이 나라는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가.

이런 말이 미국 정치판에서 나왔다면 이것은 정말 코메디가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몇백불짜리 선물 하나를 잘못 받아도 정치인의 정치생명이 끝날 수 있는 미국의 정치환경에서 본다면 지금 국내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코메디라는 말이 아니고는 설명될 길이 없다. 물론 미국과 국내환경이 같지는 않다. 그렇다고 해도 지금 벌어지는 일이 어디 "국내 저급 정치의 현주소" 정도로만 넘길 수가 있는 노릇인가.

4억이 안되면 한 1~2억 정도는 말아먹어도 적당한 선에서 그친다는 논리. 그런 돈인 줄 몰랐다고 말한다면 큰 문제가 안 될 수도 있다는 은연중의 암시. 이것이 오늘날 이 땅의 법이 정치인들에게 요구하는 기대치이다. 정치인들은 그 기대치에 맞춰 자신들의 설자리를 굳히고 있고 그 법의 기대치를 윤간하기 위해 또 다시 길거리로 길거리로 나서고 있다.

검찰은 이러고도 국민들에게 법을 지키라고 말할 것인가. 이런 이중적인 잣대를 보이면서 자라나는 세대들에게 체제에의 순응을 요구할수 있다는 말인가. 법을 파괴하는 검찰이, 법과 타협하려는 검찰이 법을 지키는 자리에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정상적인 눈으로 믿을 수 있다는 말인가. 이런 검찰이 어째서 집권세력의 시녀인가. 오히려 그 반대가 아닌가.

언론은 그것을 즐기는 새디스트들이다.

역시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이 땅의 소위 "주류언론"들의 보도관행이다. 말로는 "생활의 불편과 불합리함"을 고발하는 언론이, 말로는 날마다 개혁의 필요성을 외쳐대는 언론이 정작 개혁의 단초가 되는 정치권 부패문제에 대해서는 양비론 내지는 양시론을 펴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들은 이번에도 아니나 다를까 "3 김-1 이의 뒤엉킨 전면전"으로, 무협지식으로 문제의 본질을 그려내고 있다. 보수언론들은 이런 상황을 여권과 야권의 싸움으로 몰아가면서 철저하게 여야간의 정쟁차원으로 몰아가고 있다.

이들은 처음부터 그저 "불러주는 대로 받아 적는" 앵무새 언론의 역할에서 한발짝도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스스로의 취재를 통한 자기 목소리는 하나도 없고 매일 '여와 야'의 '말'이 똑같은 비중으로 실린다. 이들에게는 여당이 무슨 말을 해도, 야당이 어떤 논리를 펴도 그것은 뉴스거리이고, 그것이 '공정보도의 룰'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다가 결국에 가서는 또 잊혀지게 할 것이다. 말로는 개혁 개혁하지만 이는 하지 말자는 것인데 이것을 어떻게 정상적인 눈을 가진 시민들이 이해할 수가 있다는 말인가.

검찰이나 언론이나 이들이 세상을 바로잡긴 다 틀린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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