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철도원 박관서 시인에게

<보길도에서 보내는 편지>

등록 2001.03.30 13:27수정 2001.04.03 16: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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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 내내 깊은 잠 들지 못하고 뒤척이다 새벽녘에 깨었습니다.
문득 한번도 직접 만난 적 없는 형 생각이 납니다.
지금쯤 철야근무로 졸린 눈 비비며 철로변에 나가 첫새벽 목포역에 떨어지는 호남선 열차가 지나가기를 기다리고 있을까요.

오래 전, 밤새 피워져 있던 간이역 연탄 난로의 온기가 그리워집니다.
예전처럼 형 계신 간이역 대합실에도 난로 불은 아직 꺼지지 않고 있는지요. 역 대합실 의자에 신문지 한 장 덮고 웅크려 잠든 사내도 하나쯤은 있겠군요.


형은 여행자이거나 행려인 사내를 아침이 온다고 서둘러 깨워 내보내지는 않으리라 생각됩니다.
내가 떠돌던 지난 시절, 나에게도 간이역 대합실은 추위를 피할 수 있는 좋은 잠자리이자 피난처였지요.
그 시절의 버릇 탓인지 나는 아직도 너무 편한 곳에서는 쉽게 잠들지 못합니다.

오늘 문득, 형이 보내주신 형의 시집 '철도원 일기'(내일을 여는 책)를 펼쳐 듭니다.
나는 이제 형이 계신 간이역 대합실에 누워 뒤척이고 있습니다.
청소원 김씨 아줌마도 새벽같이 일터로 나와 역 주변을 말끔히 청소하고 계시는 군요.

얼마 전 새로 오신 대합실 청소아줌마 김씨, 오늘은 또 누가 시키지도 않은 개찰구 유리창을 청소하고 있어 옆을 지나치던 내가 "아따, 아줌마 할 일만 하란 말이요. 어째서 시키지도 않은 일까지 사서 한 대요. 하자, 아줌마 씨익 웃으며 "여기는 내 집이어라우. 뭔 할 일 안 할 일이 따로 있다요." (박관서, '청소 아줌마 김씨' 중에서)

환하게 웃으시던 김씨 아줌마.
오늘 새벽 대합실 청소하러 들어오신 김씨 아줌마는 신문지 한 장 덮고 대합실 나무의자에 웅크려 잠든 나에게 아줌마의 잠바를 벗어서 덮어 줍니다. 나는 짐짓 깊은 잠이 든 척 꿈쩍도 않습니다.
김씨 아줌마는 내가 깰까봐 대합실 청소도 조심조심, 소리 없이 대합실을 빠져 나가십니다.
"아따 불쌍헌 내 자식, 시상에 내 아들, 놈의 아들이 따로 이쓰까잉.
다 내 쌔끼들이제".
김씨 아줌마 안타깝게 웅얼거리는 속엣말이 잠결에 들리는 듯 합니다.

형은 철야근무 끝에 "새벽 참으로 쌀 한줌을 넣어 라면을 끓여 놓고" 나를 깨우러 옵니다. 간이역 숙직실에서 나는 허겁지겁 주린 배를 채우고, 퇴근하는 형의 손에 이끌려 "역사에서 뻔히 내다보이는 두암 식육점"에 들어가 삼겹살에 막소주, 해장술을 얻어 마시고 밤새 얼었던 몸을 녹입니다.
말없이 긴말을 나눈 우리는 서로가 따뜻하게 되어 이제 형은 가족들 기다리는 집으로 돌아가고 나는 또 기약없이 먼 길을 떠나갑니다.


관서형,
겨울의 터널을 빠져 나와 우리는 어느새 봄의 들판 한가운데 서있습니다.
하지만 봄의 중심에 이르렀으나 여전히 봄은 멀고, 사람의 일을 아는지 모르는지 무정한 꽃들은 지천으로 피어오릅니다.
이제 곧 '일로역 민들레'도 피어나겠지요.
우리들 멀고 먼 겨울 여행길에 동행이며 길잡이가 되어 주었던 푸른 철도원.
나는 푸른 철도원 박관서형의 따뜻한 시들을 길동무 삼아 슬픈 봄날을 견디며 갑니다.

늦은 밤 열 한 시경
구슬땀 배인 입환 작업 마치고
싸한 겨울 바람에 앞섶을 풀어 맡긴 채
오렌지색 투광기 불빛에 젖어
선로와 선로를 지나 터벅터벅
사무실로 돌아오다 보면
자갈밭 사이사이에 무수히
반짝이는 빛들 빛들이 있어
천천히 살펴보면 사금파리
부서진 돌멩이 구겨진 우유곽들
별 것 아닌 것들의 어깨 위에
눈부신 금가루들 저리 쏟아져 내려
따뜻한 눈빛으로 반짝거린다
어깻죽지 노곤 노곤한 이 밤
(박관서 '별'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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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이자 섬 활동가입니다. 사단법인 섬연구소 소장을 맡고 있으며,<당신에게 섬><섬을 걷다><전라도 섬맛기행><바다의 황금시대 파시>저자입니다. 섬연구소 홈페이지. https://cafe.naver.com/island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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