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트의 대표적인 유적은 16세기쯤까지 이 지방을 독자적으로 통치하던 브레타뉴 공작의 성이다. 이 도시는 현재 르와르 지방의 중심도시이지만 1789년의 대혁명 이전까지는 이른바 브레타뉴, 우리로 치면 충청남도 서해안과 전라북도 서해안을 합쳐놓은 듯한 지방의 중심도시였다. 프랑스가 현재의 국토를 완전히 확보한 것은 1860년대. 중세 초까지만 해도 프랑스 왕은 파리 근교를 직할 통치할 뿐 나머지 지역에 대해서는 통치권을 갖지 못한, 여러 제후들의 대표에 불과했다. 역으로 10세기경부터 얼마 전까지 천년의 세월에 거쳐 수많은 정복전쟁과 정략결혼이 횡행했던 나라다. 낭트는 이중 서남부 해안가인 브레타뉴의 대표적인 도시로서 당연히 슬픈 역사를 갖고 있다.
성 안의 박물관에서는 나는 또 다른 성격의 슬픔을 보았다. 19세기 후반부터의 도시화, 산업화 과정에서 땅과 농업을 지키기 위해 투쟁한 브레타뉴 농민들의 항쟁사를 다룬 전시회였다. 정확한 내용은 알 수 없지만 괭이나 가래 비슷한 농기구를 한 손에 잡은 채 나머지 한 쪽 손은 한쪽 다리를 반쯤 걷은 바지 주머니에 집어넣은 청년, 내쏘는 듯한 눈매가 매섭다. 대략 7명의 남녀 영웅이 그 시대에 산업화의 도도한 물결 앞에서 브레타뉴의 문화적 경제적 독립을 지키기 위해 때로 테러까지를 포함한 투쟁에 나섰고 이중 3명은 1차 대전 직전인 1910년대에 20대 초반의 나이로 삶을 마쳤다. 항쟁의 역사는 피의 역사이기도 한 것이다. 어느 나라나 지방, 주변부의 역사는 이처럼 영광은 없고 항쟁만 있다. 수도에는 개선문도 있고 전승 기념탑도 있지만 지방에서는 보기 어렵다.
그리고 르와르 강을 따라 뚜르로 향했다. 강을 거슬러 2시간여를 달리는 내내 휘황한 빛깔의 축제가 계속됐다. 봄 햇볕아래 가로수들은 푸르렀으나 그 푸르름 속에는 수줍은 듯 밝은 황색과 갈색이 드문드문 섞여 있었다. 이 고장 활엽수의 특성일까. 신록의 우거짐 속에서도 가을과 겨울이 10-20 % 혼합돼 있는 모습이다. 이것 봐, 가로수가 쥑이네, 가을에 오면 여러 사람 잡겠는데.
엄기영 씨가 방송인으로 '날린' 이유 중 하나로 파리 특파원 시절의 버버리 코트 차림을 든다. 버버리 코트가 멋있을 수 있었던 첫째 이유는 모델이 좋아서이지만 그 다음 이유는 배경처럼 깔려 있는 파리의 낙엽 때문 아닐까. 서북 프랑스의 가로수 빛깔은 정말이지 보는 사람을 '죽인다'. 나중에 리용 같은 남부 내륙지방에서는 이러한 빛깔들의 합창을 보지 못했다. 우리 가족이 1시간여의 토론 끝에 내린 결론은 브레타뉴, 노르만디 지방의 혼합형 가로수 빛깔은 대서양에서 불어오는 바람 때문이라는 것이다. 추울 때 춥고 더울 때 더운 내륙 지방과 달리 대서양에 인접한 서북 프랑스는 연중 일정한 온도로 불어오는 바람 속에 계절도 섞이기 마련이라는 게 상식인들의 결론이었다.
보는 이를 사로잡는, 우수와 낭만과 고독의 가로수 빛깔을 뒤로 하고 뚜르에 입성, 앙부와즈 성과 쉬농소 성으로 달려갔다. 앙부와즈 성은 잘 다듬어진 난공불락의 요새이며 인근의 부브레는 르와르 와인의 대표적인 생산지이다. 부브레의 와인 박물관에 가면 무료 시음의 기회도 가질 수 있다. 역시 산지에서 마시는 와인 한잔의 맛은 각별하다. 그러나 아내의 사주를 받은 아이들의 종용으로 반잔 밖에 못 마시고 물러나야 했다.
그리고 쉬농소 성. 이제 중학교 2학년인 큰애는 쉬농소 성을 보자마자 맞아, 바로 이 성이야라고 탄성을 지르더니 자신이 본 일본 만화의 스토리를 줄줄 얘기하기 시작했다. 나중에 베르사이유까지 모두 보고 난 뒤 딸아이의 감상 평에 따르면 이른바 '베르사이유의 장미' 류의 만화 분위기, 다리가 길고 얼굴이 하얀 청년과 목이 길고 부풀린 드레스를 입은 귀족 처녀(둘 다 눈은 엄청 크다)의 사랑 이야기가 가장 잘 맞아떨어지는 성은 쉬농소 성이란다. 쉬농소 성은 강 위에 지어진 특이한 성이다. 플로베르는 이 성을 일컫어 물과 공기 위에 떠 있는 성이라고 극찬했다던가. 실제로 이 성이 세상에 알려진 17세기 이후에는 프랑스의 화가, 문인들이 한번씩 성을 방문해 풍경화를 남기거나 명언 한 마디를 남기는 게 유행이었다. 이 성의 2층 동쪽 방에서는 성을 주제로 한 숱한 대가들의 그림들을 볼 수 있었다.
이 성이 유명해진 것은 까드린느 디 메디치(Catherine de Medici) 와 다이앤 디 쁘와티에(Diane de Poitiers)라는 두 여성의 삼각관계 때문이다. 부산댁, 청주댁처럼 그들도 이름 뒤에 고향이나 가문을 붙였다. 메디치 댁 까뜨린느와 쁘와티에 댁 다이앤의 사랑 이야기는 프랑스 궁정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대목이다. 까뜨린느는 앞서 성 바르톨로뮤의 대학살을 묵인, 공모한 프랑스 16세기 정치의 실세(實勢). 1533년 이태리 피렌체의 명문가인 메디치 가문에서 프랑스 왕실로 시집와 앙리 2세와 결혼했다. 이 결혼과 함께 쉬농소는 앙리 2세의 별궁이 되었다.
앙리 2세는 그러나 12살 때부터 쉬농소 성 인근 포아티에 출신의 다이앤과 진지한 사랑을 나누던 사이였다. 다이앤의 고향 쁘와티에는 바로 프랑크 왕국의 샤를르 마르텔이 유럽 깊숙히 쳐들어오던 이슬람 군대를 패배시킨 그 쁘와티에다(투울 포와티에의 전투, 732년). 앙리 2세의 결혼은 정략 결혼이었고 당연히 사랑 따로 생활 따로였다. 그는 1547년 쉬농소 성을 사랑의 선물로 줘버릴 정도로 다이앤을 아꼈다.
이 프랑스 여성과 이태리 여성의 3각관계는 1559년 앙리 2세가 자신의 용병대장과 모의 마상 경기(One Handed Game, 두 무사가 말에 탄 채 긴 창을 들고 서로 격돌해 일합을 겨루는 경기, 토너멘트라는 단어도 여기서 나왔다)를 벌이다가 실수로 죽자 법적 정통성을 가진 까뜨린느의 승리로 끝이 났다. 그녀는 즉각 다이앤에게 쉬농소 성을 비우고 인근의 쇼몽 성에 가서 살도록 했다. 쇼몽 성도 쉬농소, 샹보르 성과 함께 프랑스에서 가장 아름다운 3대 성에 들지만 이는 그간의 서운함을 담은 수렴청정 왕비 까뜨린느의 단호한 복수이자, 정든 임과의 추억이 담긴 성이자 자신의 터전인 쉬농소를 떠나야 했던 다이앤의 패배였다.
성안의 깊은 방에는 두 사람의 초상화도 있다. 공교롭게 다이앤의 초상화는 메디치 가의 문장인 여섯 개의 꽃으로 장식된 액자틀에 담겨 있다. 연적(戀敵)의 초상화를 걸도록 자신의 너그러움을 보이되 자신이 최후의 승리자임을 알리고 싶어하는 여인의 심리를 읽는 듯하다.
까뜨린느와 다이앤의 사랑 다툼에 대한 세인들의 평가는 흔히 비련의 여인 다이앤에게 점수를 더 주는 편이다. 사랑 밖에는 아무 것도 얻지 못한 여인 다이앤, 게다가 같은 프랑스 사람이니 여론이 다이앤 쪽으로 기우는 것도 당연할지 모른다.
그러나 이는 비슷한 시기 영국의 엘리자베스와 메리의 이야기처럼 세상 사람들의 감상주의가 낳은 산물인지도 모른다. 격정적이고 자기 중심적이고 사랑에 약하고 따라서 정치적 기교와는 거리가 먼 스코틀랜드의 여왕 메리. 반면 이성적이고 자기 희생적이며(평생 처녀로 지냈다), 때에 따라 참을 줄도 아는, 그래서 정치에도 능숙한 엘리자베스.
까뜨린느와 다이앤의 성격은 그들이 가꾸던 성 입구의 정원에도 잘 나타나 있다. 다이앤의 정원은 성의 진입로 동쪽에 크고 화려하게, 까뜨린느가 가꾸던 정원은 서쪽에 아담하고 단정하게 자리잡고 있다. 다이앤은 감성파, 까뜨린느는 실질파라는 인상을 준다.
한편으로 이런 의문도 떠오른다. 왜 까뜨린느는 권세를 잡은 뒤 다이앤의 정원을 짓밟아버리거나 혹은 그것보다 더 큰 정원을 만들지 않았을까.
스코틀랜드의 메리가 세 번의 눈먼 사랑과 결혼 끝에 자멸하듯 다이앤은 연인의 사망 후에 모든 것을 잃는다. 반면 엘리자베스와 까뜨린느는 현실 정치가적 면모를 갖고 있다. 까뜨린느는 사랑에서는 졌지만 권력을 잡는 데에는 성공해 남편이 죽은 다음 자신의 셋째 아들을 다음 왕인 샤를르 9세로 만들었다. 그러나 성공한 정치가는 못 되었다. 왕권을 강화한다는 명분아래 성 바르톨로뮤의 대학살을 유도, 결국 피의 역사에 책임을 지게 되었다. 나라를 종교 동란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은 장본인이다. 그럼에도 까뜨린느의 영향력은 그 다음 왕인 앙리 3세 시대까지 이어졌다.
그녀의 친정 메디치 가는 격변기 프랑스 정치에서 빼놓을 수 없는 존재다. 발루와 왕조에서 부르봉 왕조로 바뀌었음에도 메디치가는 계속적으로 프랑스 왕비를 배출한다. 까뜨린느의 조카 뻘인 마리아 디 메디치는 낭트의 칙령을 발표한 부르봉 왕조의 창시자 앙리 4세의 부인, 그 다음 왕인 루이 13세의 어머니, 태양왕 루이 14세의 할머니로서 루이 14세의 유년시절까지 섭정을 한다. 죽기 직전의 까뜨린느가 부르봉 가문으로의 왕실 교체를 허용하되 훗날의 안전을 위해 자신의 질녀와 결혼하는 조건으로 앙리 4세의 즉위를 허용한 것일까. 메디치 가의 두 왕비 이야기는 프랑스 판 풍양 조씨, 성공한 안동 김씨 왕비 이야기를 읽는 기분이다.
메디치 가의 여성들은 어떻게 두 번에 걸쳐 프랑스 왕실에 길고 긴 수렴청정의 시대를 만들 수 있었던가. 치마폭에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을 숨겨놓고 있었던가. 개인적으로 나는 15세기와 16세기 이탈리아의 메디치 가만큼 흥미로운 존재는 유럽 역사에 그리 많지 않다고 생각한다(17세기와 18세기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가, 19세기와 20세기 영국의 현 왕실인 윈저가도 빼놓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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