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역사는 너희 편이 아니야!"

이승한 <고려무인이야기>

등록 2001.06.14 16:54수정 2001.06.14 17:15
0
이 책 <고려 무인 이야기>(이승한 지음·푸른역사 펴냄)는 '역사학은 인간학'이라는 전제 아래 우리 역사상 가장 역동적인 시기로 손꼽히는 무인집권시대 실력자 4인방 - 이의방, 정중부, 경대승, 이의민 - 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얼핏 보기에 여느 역사책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이나 '머리말'의 끝머리에 글쓴이가 스스로 밝힌 <로마인 이야기>를 쓴 '시오노 나나미'에 대한 부러움을 나타낸 것을 보면서 혹시 그 공간적 무대를 한국으로, 시간적 배경을 고려로 하여 시도한 '한국판'이 아닐까 했다.


나의 추측은 '차례'를 지나 펼쳐지는 장이 바로 '프롤로그'라 이름 붙여져 있고, '1173년 10월 1일, 경주'라고 붙인 제목 아래 눈 앞에 읽히는 활자들은 매우 드라마틱한 조합을 하고 있었다.

재미있게 쓴 역사 에세이물

역시 내 짐작이 어느 정도 맞아떨어진 듯하다. 강단학문의 경직된 서술 방식을 피해 자유분방하면서도 때로는 픽션적 상상력도 마구 동원되면서 매우 재미있게 읽히는 역사물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역사 소설로 여기면 오산이다. 세부적인 묘사조차도 가능하면 기존의 연구 성과에서 얻어왔다며, 이 책은 김당택의 <고려의 무인정권>(1999년, 국학자료원)을 주 대본(?)으로 삼았다고 밝히고 있다.

어쨌든 이 책은 국왕이 엄연히 존재함에도 1170년부터 1270년까지 무려 100년간이나 지속된 무인정권 시대를 조명하기 위해 무신정변은 왜 일어났으며, 이의방-정중부-경대승-이의민으로 이어지는 정권교체는 어떻게 가능했을까, 또 무신정권은 어떻게 100년간이 지속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을 풀기 위한 대장정을 시작한다.


고려의 무인집권 시대에 대한 대중들의 인식은 일면 편견에 사로잡혀 있을 듯싶다. 왜냐하면 우리 현대사의 군사독재정권을 연상하면서, 무조건 나쁜 시대로 여기고 있을 법하기 때문이다.

이는 군사독재와 관련지어 학자들이 의도적으로 피해간 연구의 사각지대이기에 던져진 수없이 많은 궁금증에 비해 연구업적은 거의 없다는 데서 미루어 짐작할 수 있으리라.


그러나 이 책의 글쓴이는 역사에는 좋은 시대 나쁜 시대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고 강조한다. 특히 역사 연구에서 도덕적 판단이나 선악의 잣대를 들이대는 것처럼 위험한 것이 없다는 것이다. 바로 무인집권시대도 이런 관점에서 접근해야 한다는 것이다.

소위 '보현사 거사'를 주도한 3인의 주동집단 중 유일하게 끝까지 살아남은 하급무인 출신 이의방은 지금의 대위 정도의 신분이었지만 초창기 무신정권의 일인자로 떠올랐다. 정변 3년 뒤 문신 김보당이 난을 일으켜 의종 복위를 꾀하자 이의민을 보내 의종을 살해한다.

정변 과정에서 고위급 무관들을 포섭하고 회유하는 역할을 담당한 온건집단의 대표주자 정중부는 무신정권 초기에 주동집단 3인이 권력투쟁을 벌일 때 한발 물러나 있다 이의방을 제거하고 정권을 잡는다. 그는 왕실과 혼인관계를 맺으려다 국왕의 내락을 얻은 경대승에게 일가족이 몰살된다.

무신정권 4인방 암투 그린 역사 보고서

같은 무인이면서도 무인 집단자들의 횡포에 불만을 품고 정중부와 송유인 부자를 죽인 경대승은 허승과 김광립 등이 자기 공을 믿고 많은 폐단을 끼치자 다시 이들을 죽이고 정권을 장악한다.

장대한 기골이 눈에 띄어 경군에 발탁돼 의종의 총애를 받던 이의민은 의종을 살해하고 김보당의 난을 평정한 공로로 대장군이 되었는데, 참위설을 믿고 민란 세력과 내통했으면서도 그를 두려워한 명종에 의해 최고 권력자가 된다.

천민 출신으로 왕이 될 꿈을 꾼 역사상 가장 독특한 인물 중 한 명이었던 그는 미타산 별장에서 최충헌에게 살해된다.

그리고 이 책은 '에필로그'에서 이미 죽은 이들 4인방들의 혼백들이 중방 안을 떠돌며 속세의 집권시절을 회상하며 한 마디씩 내뱉는 푸념들을 이렇게 옮겨 놓고 있다.

- 이의방 : 힘을 믿고 너무 자만했어. 사찰의 중들이 문제가 될 줄이야….

- 정중부 : 조금만 더 젊었어도…. 아들과 사위놈 너무 믿은 게 탈이었지.

- 경대승 : 괜한 일을 했을까. 하지만 나는 정말 과거로 되돌리고 싶었는데….

- 이의민 : 그놈의 꿈이…. 그 젊은 녀석 때문에 시간을 너무 낭비했어.

그때 같이 중방 안을 떠돌던 의종의 혼백이 이렇게 핀잔을 주었다.

"미련한 녀석들, 아직 역사는 너희 편이 아니야."

AD

AD

AD

인기기사

  1. 1 억대 연봉이지만 번아웃 "죽을 것 같았다"... 그가 선택한 길 억대 연봉이지만 번아웃 "죽을 것 같았다"... 그가 선택한 길
  2. 2 28년 만에 김장 독립 선언, 시어머니 반응은? 28년 만에 김장 독립 선언, 시어머니 반응은?
  3. 3 이러다가 대한민국이 세계지도에서 사라질지도 모른다 이러다가 대한민국이 세계지도에서 사라질지도 모른다
  4. 4 체코 언론이 김건희 여사 보도하면서 사라진 단어 '사기꾼' '거짓말'  체코 언론이 김건희 여사 보도하면서 사라진 단어 '사기꾼' '거짓말'
  5. 5 "대통령, 정상일까 싶다... 이런데 교회에 무슨 중립 있나" "대통령, 정상일까 싶다... 이런데 교회에 무슨 중립 있나"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