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혹으로만 제기됐던 미국의 압력이 사실로 확인됐다.
미국이 우리 정부에 미국의 국가미사일방어(NMD) 전략을 지지해줄 것을 강요한 것으로 밝혀졌다. 특히 미국은 우리 정부가 NMD에 대한 공식입장을 어떻게 표명해야 하는지를 구체적인 문장으로 작성해 그대로 따라줄 것을 강요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국일보는 이같은 사실을 14일자 1면에 단독보도했다. 한국일보는 이같은 사실이 정부문서를 통해 밝혀졌다고 보도했다. 정부당국이 작성한 '푸틴 러시아 대통령 방한시 한ㆍ러 공동성명 관련사항 조사보고’ ‘한ㆍ러 공동성명 관련 외교부 경위서 검토 결과’ ‘한러 공동성명 ABM 조항관련 외교업무 처리 일지’ 등을 통해 밝혀졌다고 보도했다.
미국측 요구안은 5문장으로 되어 있는데 "우리는 미국이 이 점에 대해" 등의 표현을 써가며 한국 정부가 발표해야할 문안을 제시했다. 특히 마지막 대목은 "우리 군과 영토 방위를 위해 효과적인 (미사일) 방어망을 배치할 필요를 인정한다"는 단정적인 표현을 제시했다. 문맥의 흐름은 제안이라기 보다는 압력에 가까운 것으로 읽혀진다.
미국측 요구 문안 전문
오늘날의 세계는 냉전 시대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억제와 방어에 대한 우리의 접근법도 변화가 필요하다.
부시 대통령은 대량살상무기와 운반 수단으로서의 미사일 위협이 점증하고 있다고 강력하게 주장해 왔으며,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한 부시 대통령의 리더십을 신뢰하고 있다.
미사일 방어는 이런 반응의 중요한 요소다. 우리는 미국이 이 점에 대해 합당한 태도를 취하고 있는 점을 인정하며, 특히 우리 군과 영토 방위를 위해 효과적인 (미사일) 방어망을 배치할 필요를 인정한다.
이 미국측 문안에 대해 한국 정부는 지난 3월 2일 3문장으로 정리해 공식입장을 발표했다. 특히 첫 번째와 두 번째 문장은 거의 받아쓰기에 가깝도록 미국의 '지시문'을 따라썼다. 그러나 세 번째 문장은 "미사일 방어망 배치할 필요를 인정한다"는 미국측 요구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대신 "우리는 미국 정부가 국제 평화와 안전을 증진하는 방향으로 동맹국 및 관련 국가들과 충분한 협의를 통해 이 문제에 대처해 나가기를 바란다"고 썼다.
정부측 발표 내용 전문
오늘날 세계 안보상황은 냉전시대와 다르기 때문에 이에 대한 접근도 새로운 변화가 필요하다. 우리는 이러한 새로운 접근 방법을 추구하고 발전시키는 데 있어 부시 대통령의 지도력을 신뢰하는 바이다.
우리는 미국 정부가 국제 평화와 안전을 증진하는 방향으로 동맹국 및 관련 국가들과 충분한 협의를 통해 이 문제에 대처해 나가기를 바란다.
즉 정부는 '필요 인정' 대신 '충분한 협의'를 강조했지만 이는 '신중한 지지'로 받아들여졌다. 한국일보는 이러한 한국 정부의 '받아쓰기'는 미국 정부의 압력에 의한 것이었다고 보도했다. 2월 28일 미 뉴욕타임스가 “한국이 MD 문제에 대해 러시아 편을 들다”는 제목의 기사를 서울발로 보도하자 미국 정부는 격렬한 분노를 표시하면서 우리 정부에 구체적인 문안을 제시하면서 조속한 입장 표명을 요구했다는 것이다.
다음은 그 구체적 과정에 대한 한국일보의 보도.
문건에 따르면 미 백악관과 국무부의 고위 관리들은 2월 28일 미 뉴욕타임스가 “한국이 MD 문제에 대해 러시아 편을 들다”는 제목의 기사를 서울발로 보도하자 격렬한 분노를 표시하면서 우리 정부에 조속한 입장 표명을 요구했다.
토켈 패터슨 미 국가안보회의(NSC) 선임 보좌관은 워싱턴에서 유명환(柳明桓) 주미 공사와 만나 “부시대통령이 NMD 추진에 최우선 순위를 두고 국내외적으로 어려운 싸움을 하고 있는 상황에서 한국과 같은 동맹국이 러시아와 함께 ABM 조약을 지지하는 내용을 발표한 것은 정말로 혼돈스럽다(really disturbing)”며 “콘돌리사 라이스 보좌관은 물론 부시 대통령도 화가 나 있다(upset)”고 전했다.
당시 패터슨 보좌관은 “이번 일은 한국이 NMD 추진에 찬물을 끼얹는 느낌을 주었다”며 “다음 주 (한미)정상회담이 좋은 분위기에서 진행될 수 있도록 한국 정부가 3월 2일 예정된 NSC 회의 후 다음과 같은 발표문안으로 입장을 발표해 달라”며 미리 작성한 문안을 건넸다.
이 문안은 “우리(한국)는 우리 군과 영토 방위를위한 효과적인 (미사일) 방어망을 배치할 필요를 느끼고 있다”는 내용 등 미국의 NMD 계획에 대한 우리 정부의 지지와 참여를 노골적으로 요구하고 있다.
우리 정부는 3월 2일 NSC 회의를 열어 미측 제시 문안을 수정한 뒤 이정빈(李廷彬) 당시 외교부 장관이 우리 입장을 발표했고, 주한 미 대사관을 통해 미 국무부에 이를 전달했다.
외교부 "강요받았다는 보도는 사실 아니다"
그러나 이에 대해 외교부는 15일 "미국이 NMD에 대한 지지를 우리 정부에 강요했다는 일부 보도는 사실이 아니다"고 밝혔다. 외교부는 "정부는 3월7일 한미 정상회담을 앞두고 한미 공동 언론발표문과 관련해 미국측과 긴밀히 협의한 바 있으나 구체적 협의내용은 외교사안이므로 밝힐 수 없다"고 말했다.
김대통령이 '뺨맞은' 이유
ABM 논란이 벌어지자 토켈 패터슨 미 국가안보회의 선임 보좌관은 주미 한국 대사관 유명환 공사를 만나 한국이 NMD를 지지하고 참여하면 3월 8일 한미정상회담이 더 좋은 분위기에서 진행될 수 있을 것이라며 노골적인 압력을 행사한 것으로 한국일보는 보도했다.
이것은 한미정상회담 직후 미국 내 일부 언론이 표현했듯이 '김대중 대통령이 부시 대통령에게 뺨맞은 이유'를 알게 한다. 부시 행정부는 김대중 정부에게 NMD 지지 및 참여를 요구했으나 한국이 "이해한다"는 수준에 머물자 '괘씸죄'를 적용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이는 또한 이정빈 전 외교부 장관이 사임을 전후해 "미국이 NMD 지지를 요구했으나 이를 거절했다"라고 발언한 것이 사실이라는 점과 한국을 미사일방어망에 끌어들이기 위해 부시 행정부가 전방위적인 압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ABM 조약을 지지, 외교적 실책인가 외교적 주권인가
지난 2월말 한러 정상회담에서 미사일방어망 구축을 위해 반드시 개정되거나 폐기되어야할 ABM 조약을 한국 정부가 보존·강화한 것에 합의한 것을 두고 대다수 전문가와 언론들은 "외교적 실책"이라고 못박았다.
부시 행정부의 'NMD 지지 강요'를 특종 보도한 한국일보 역시 "ABM 파문후 미국 정부가 보인 불만과 항의 및 이에 대한 우리정부의 대응은 외교부의 업무상 실수가 엄청난 국가적, 외교적 손실로 이어졌음을 극명하게 보여준다"며 '1차적인 원인제공자'로 외교부를 질타하고 있다.
그러나 당시 외교부의 대응을 실책으로 몰아붙이는데는 좀더 신중해질 필요가 있다. 만약 외교부가 실수를 저지른 것이라면 한러공동성명 작성에 참여한 외교부 관리들이 국제정치의 상식에 속하는 ABM 조약과 NMD간의 관계를 몰랐다는 것인데, 이것이 사실이라면 이것은 실책이 아니라 '무지'이며 '자질'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와는 반대로 당시 외교부의 대응을 김대중 정부가 ABM 조약을 지지함으로써 NMD에 대해 간접적으로 우려를 표명한 것으로 해석할 여지도 있어 보인다. 한러공동성명 발표 이전에도 김대통령과 이정빈 전 장관을 비롯해 정부 일각에서는 NMD에 대한 우려를 표명해왔다.
이것은 단순히 NMD에 대해 러시아의 편을 들어준 것이 아니라 NMD로 인한 미국과의 전략적 균형 와해를 우려하는 러시아와 NMD가 야기하는 한반도 및 동북아 질서의 경색을 걱정하는 한국 사이의 국익이 일치한 것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김대중 정부는 당시 ABM 조약 논란의 진실을 밝혀야 한다. 무지에 따른 외교적 실책인지, NMD에 대해 우려를 표명한 외교적 주권을 행사한 것인지 뒤늦은 감이 있으나 그 실체를 밝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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