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범재판 참가에서 농활까지 <1>

<인터뷰> 6.23 코리아 국제 전범재판 한총련 참가자 대표 김경진 씨

등록 2001.07.10 04:28수정 2001.07.10 1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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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박 11일의 일정으로 전라북도 부안으로 농민학생연대활동을 다녀온 6.23 코리아 국제 전범재판 한총련 참가단 대표 김경진(99학번. 서울산업대학교 응용회화과 학생회장) 씨와의 인터뷰.

보름이 넘는 계속되는 일정 속에서도 환한 웃음을 잃지 않는 그를 농활에서 복귀한 당일 저녁, 서울산업대학교 총학생회에서 만났다.

농활을 다녀와서 초췌한 모습이었지만, 인터뷰를 하겠다는 기자를 대하는 모습에는 활기가 넘쳤다.

- 전범재판을 끝내고 언제 귀국했습니까?
"6월 29일 새벽 5시반에 귀국했습니다."

- 그곳에서의 활동에 대해서는, 이미 많은 보도를 통해서 알고 있습니다만, 짧게 이야기를 해주시겠습니까?
"전민특위 참가단 공식활동으로 재판, 집회 참가를 하였고, 비공식적으로는 여러 참가단체들과의 단합대회(?)와 뒷풀이 등을 했었지요. 한총련 참가단 차원으로는 연일 상황총화와 선전물 제작, 일정회의 등을 했었고, 간간히 재판과 집회 진행 도우미를 했습니다."

- 활동 중 기억에 남는일이 있다면 몇가지만 이야기 해 주시겠습니까?
"일정 중에 집회를 하는 중에 옆으로 미국사람들이 욕을 하고 지나가는 일이 있었는데, 같이 준비해줬던 미국 사람들이 그런 행동에 대해서 반박하고 자기 일처럼 여기고 말해주었던 것이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일정을 총화하면서 같이 했던 목사님, 변호사님이 열심히 활동하시는 모습이 참 인상깊었습니다. 처음 만나는 분들과 진심어린 대화를 나누고, 그분들의 눈물을 보면서 이런 게 하나 되는 거구나 느꼈던 것도 그렇습니다. 그밖에도 예상치 못했던 부분들(?)이 인상 깊었습니다."


- 일정 진행하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사람이 있다면 누가 떠오릅니까?
"일본에서 온 학생협 소속의 '유리' 라는 분이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이적단체로 규정되어 있는 자주.민주.통일을 주장하는 단체 소속이라서, 국내 입국은 한번도 하지 못했지만, 여러 소식이나 언론을 통해서 우리나라에 대한 부분들을 알고 있었습니다. 특히나 같은 학생 조직인 한총련을 만나고 싶어하고 많은 관심과 일종의 동경까지 보이는 것에서 부끄럽기도 했습니다. 정기열 목사님과 그외 모든 분들이 열심히 하시는 모습도 많이 생각납니다."

- 오마이뉴스의 전민특위 진행 기사에 첨부된 사진에 보면, 현장에서 만든 것으로 보이는 '한총련' 깃발을 들고 찍은 단체사진이 있습니다. 한총련 대표로 참가한 김경진 씨는 사진의 구석에 있는데, 그건 어떤 이유인가요?
"당시에 여러 언론에서 취재중이었고, 자원봉사를 하느라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사람들을 불러 모으느라 그랬습니다. 저 말고도 몇몇 분들이 그 '구석'에 있었습니다."


- 환경이 많이 다른 외국이었는데, 생활하면서 힘들었던 것이 있다면 어떤 것이 있을까요?
"분산적으로 집결하고, 제대로 일정이나 내용이 공유되지 못해서, 처음 도착해서 한동안은 한총련 나름대로의 활동방법을 회의를 통해 모색하고, 진행하는게 힘들었습니다. 한편으론, 해외운동단체나 전범재판 참가자들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서 한총련 다운 모습을 보여주기 위한 여러가지 고민이 뒤따랐습니다. 많은 준비가 되지 못했기 때문에 즉석에서 해결하는 일들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몇 차례 경험하면서 조금씩 나아졌습니다."

- 귀국 직후 바로 농활대에 합류하셨는데 시차 적응이나 일정수행 때문에 잠도 못자고 준비도 많이 못했으리라 생각됩니다. 농활을 출발할 때의 심정은 어떠했는지요?
"'농활 출발하기 전에 도착해서 다행이다'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습니다. 저 한명 따라가는것으로 조금이나마 힘이 되어주고 싶었습니다. 처음부터 같이하고 싶었고, 준비기간에도 전범재판 참가때문에 도와주지 못해서 미안한 마음도 많았습니다."

- 농활을 진행하면서는 어떠했나요?
"마을에서 작업주체로 활동했습니다. 하지만, 첫째날에는 여러 곳에 활동자료 정리와 보고를 하기 위해서 움직이다보니, 두번째날 아침에야 제대로 합류하게 되었습니다. 농활대로 생활할 때도 배려해준 덕분에 틈틈히 잠도 자고, 쉬기도 했었습니다. 하지만, 고된 생활은 똑같이 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런데, 힘들긴 힘들었는지 어느 날엔가는 저녁때 농민분들과 술을 먹으며 이야기를 나누다가 뻗어버리기도 했어요."

- 전범재판에 대한 농민분들의 반응은 어떻다고 보십니까?
"농민회 분들은 다들 알고 계셨어요. 그간의 활동도 통신이나 언론을 통해서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잘 다녀왔냐, 큰일했다 그런 반응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하지만 일반 농민분들께는 많이 이야기하지 못했습니다. 한번은 마을분과 술자리를 같이 하면서, 미국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게 되었는데, 미국반대 쪽으로 화제가 옮겨지자 언성이 높아지시더니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신 적도 있었어요."

- 농민회의 반응에 대해서 좀더 구체적으로 얘기해주시겠습니까?
"민족의 명예와 관련된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계셨었구요, 앞서 말한 것처럼 다들 상황은 알고 계시기 때문에 잘 갔다왔냐, 어땠냐 정도만 물어보시더군요."

- 전범재판을 다녀온 후에, 개인적으로 그에 대한 홍보활동이나 상황선전 같은 활동이 있었나요?
"학교 총학생회 홈페이지, 과학생회 홈페이지, 과 카페 등에 복귀 당일날 결과 보고 내지는 소감을 적은 글을 짧막하게 남겼구요, 아직 그에대한 반응은 확인하지 못했어요."

- 학교 외에 외부적으로의 활동은 어떻습니까?
"내용적인 부분은 다들 알고 있었고, 갔다와서의 느낌이나 일화 중심으로 질문을 많이 하시더군요. 관심을 많이 가져주시던 걸요. 학교버스 아저씨도 저를 알아보시곤, 어땠냐고 물어보시더라구요. 동총련 농활대 해단식때도 계획에 없었던 발언이 행사에 들어가기도 했습니다."

- 군산 미군기지에서 있었던 동총련 여름농활대 해단식이 귀국 직후 첫 공식적인 집회발언이었는데, 어땠습니까?
"학교에서 농활 출발하기 전에도 했었는데..."

"다른 일반적인 집회에는 학생회 일꾼들이 주로 모이는데 반해서, 이번 농활대 해단식의 경우에는, 그렇지 않은 일반 학우들도 동참하는 좀더 대중적인 집회였다고 생각했습니다. 귀국 직후부터 줄곧 활동했던 모든 것들을 다 알려주고 말해주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고, 내용 중심이 아니라, 가슴으로 느낄 수 있는 감동 중심으로 다가가고 싶었는데, 발언 제안이 늦게 들어오고, 집회가 길어지는 바람에, 사회자께서 3분 안에 핵심만 얘기하라고 해서 시간에 쫓기다보니, 준비했던 내용도 제대로 전달되지 않고, 형식적인 내용들만 이야기 한 것 같아서 아쉽습니다. 하지만, 동총련농활대 전체가 군산미군기지 앞에 모여서 뜻깊게 해단할 수 있도록 한 기획은 좋았던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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