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전협정 직전, 미국에 의한 이승만 제거계획이 입안되었다.
이승만이 1953년 4월 24일 휴전을 반대하고 단독 북진을 표명하자 클라크 대장은 4월 26일 이승만 제거계획을 거론했던 것.
클라크 대장은 이승만이 유엔군 통제를 벗어나 단독행동을 하는 경우 이승만의 보호감금과 임시정부 수립 등을 골자로 하는 비상계획의 수립이 필요하다고 본국정부에 통보했다.
이에 5월 4일 미8군사령관 테일러는 민간 지도자를 구금하고 잠정적인 유엔하의 군정을 선포하는 이른바 ‘에버레디 계획(Plan Everready)’을 작성했는데...
에버레디 계획은 이승만이 유엔군의 통제를 벗어나겠다고 위협하는 상황 속에서 문자 그대로 언제든지 준비될 수 있는 추상적인 안.
이는 비록 도상작전으로 끝났지만 당시의 위기상황과 한미관계의 불평등한 측면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사건이다.
클라크 장군은 1953년 6월 8일 에버레디계획을 수정했다.
군사정부 대신 한국군 및 정치인들을 이용해 미국에 순종적인 정부를 수립하는 것이 그 골자.
미국은 이승만이 1953년 6월 18일 반공포로를 석방하자 이 계획의 적용을 고려했다. 그러나 한국 군부 및 국민이 이승만을 계속 지지하자 실행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해 철회했다.
휴전 직후에도 이승만이 계속 휴전 자체를 인정하지 않자 테일러는 10월 24일 에버레디계획을 수정했으며 28일 유엔군사령관 헐의 승인을 받았다.
그러나 이 안도 실현되지는 않았으며 이후에도 한미합의의사록 체결을 둘러싼 이승만 제거계획이 수립되었다.
1954년 11월 8일 주미대사 브릭스와 경제조정관 타일러 우드, 유엔군사령관 헐, 테일러 등 미국의 현지 관리들이 모두 도쿄에 모여 이승만이 계속 비우호적으로 나올 경우에 적용할 비상계획을 작성해 본국에 승인을 요청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 또한 안으로 그쳤다.
이번 주 금요일,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에서는 52년부터 62년까지 이어지는 격동기 상황을 살펴보며, 당시의 한미관계와 미국의 대한 정책, 그리고 중요한 순간마다 한국 정치의 영향력을 미쳐온 미국의 보이지 않는 힘은 과연 어디까지 인지 천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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