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해군 '탈영병'이 미군으로 한국전쟁에 참전한 기구한 사연

백도선의 인생유전 (2)

등록 2001.07.29 10:23수정 2001.07.29 1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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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도선의 인생유전 (1)]에서 이어집니다.


미육군병사로 한국전쟁말기에 참전

후일 해군참모총장을 역임했던 미 해군 중고 군함 인수 인솔단장 이용운 대령은 백도선하사가 고의로 탈영했거나 외출중 사고를 당해 도저히 복귀하지 못할 것으로 판단하고 백도선을 미국에 버려둔체 한국으로 떠났다. 동료들이 떠난지 3일만에 샌디에고로 돌아온 백도선은 샌디에고 시내공원에서 이틀을 지세우며 어찌해야 할바를 모르고 있었다. 더우기 백도선은 영어에 자신이 없어 난감해 하던차에 한 동양계 여학생을 그 공원에서 만나게된다. 백도선은 이 여학생이 일본계임을 직감하고 일제시대때 익혔던 일본어 실력을 발휘하여 자신의 처지를 그여학생에게 설명한다.

그 일본계 여학생은 백도선을 근처의 직업소개소로 안내하고 백도선은 농장의 흙 뒤집기를 전문으로 하는 회사에 취직을 해서 그 회사 합숙소에서 숙식을 해결하며 돈도 벌게 된다. 탈영병 백도선은 그 회사 사장이 누구인지 이름이 어떻게 되는지도 모른체 자신을 거두어 준다는 생각에 너무 고마운 마음으로 자진해서 사장실 청소와 화장실 청소를 정성을 들여서 하게 된다.

백도선의 정성은 드디어 그 회사 사장을 감동시킨다. 어느날 그 회사사장은 백도선을 호출하여 “자네가 늘 내 사무실과 화장실을 청소하는가?” “예.” “무엇때문에 그리 하는가?” “오갈때 없는 놈을 거두어 주시니 고마워서 그럽습니다.” “자네 소원이 무엇인가?” “학교에 가고 싶습니다. 우선 영어를 배우고 싶습니다.” 그 사장은 백도선을 자신의 차로 학교에 대려다주고 영어를 배우도록 해준다.

그러던 어느날 그 사장은 백도선에게 미군에 입대할 것을 권한다. 백도선은 자신이 불법체류자 신분임을 알리자 사장은 자신의 변호사를 통하여 법적인 절차와 보증까지 서주어 무난하게 미육군에 입대하게 된다. 탈영병 한국해군 하사 백도선은 미 육군 제6사단에서 훈련을 받고 '한국어 통역 주특기'를 부여받으며 1953년 4월 한국전쟁말기에 미육군정보대 소속으로 마산에 배치가 된다.


전쟁이 휴전을 향해가면서 백도선이 소속된 미육군정보대는 대구로 이어 서울 용산으로 이동하여 주둔하게 된다.

부모형제를 찾다


그당시 미육군하사인 백도선은 $340의 월급을 받았고 그 돈은 당시 한국실정으로는 큰 돈이었다. 부모형제의 걱정이 늘 가득했던 백도선은 한강이북으로 부대가 주둔하자마자 짚차를 몰고 나가 식구들을 수소문하게 된다. 드디어 1954년 봄 덕수상고 사택에서 후일 숙대 음대교수까지 지낸바 있는 매부 서영모를 극적으로 만나게된다. 매부 서영모에게 부모형제가 살고 있는 미아리 삼양동의 약도를 받아 찾아나서게 된다.

달구지길을 따라 올라간 미아리에 백도선의 부모형제는 토굴을 파고 입구를 가마니로 가려놓은 곳에서 살고 있었다. 그길로 백도선은 가까운 곳에 위치한 미육군 공병 파견대를 찾아가서 각종 중장비를 포장했던 목재상자를 뜯은 것과 못등을 한트럭 가득하게 얻어와 미아리 공터에 부리고 미군표로 인부들을 사서 부친 백기환 선생에게 맏기고 부대로 돌아온다.

일주일후 가보니 멋있는 2층 양옥집이 공터에 번듯하게 들어섰다. 참고로 카나다 크리스쳔 건축학교출신인 부친 백기환의 건축기법은 계단의 경사가 급하기로 건축가들 사이에 유명하며 예전 종로의 신신백화점이 부친 백기환의 작품이라 한다. 드디어 파란많은 백도선은 70이 넘은 부모에게 미육군의 주둔군으로서 어려운 전쟁말기에 물질적 정신적으로 큰 효도를 하게되었다.

미군 탱크 장갑차등을 포장했던 목재로 지었던 2층 양옥집은 1961년 박정희군사정권이 기자촌에 독립유공자들에게 하사했던 집으로 부모가 이사할때까지 7년간 부친 백기환 선생을 안락하게 머물게 하였다.

백도선의 한국생활과 자수

격동의 우리 현대사 만큼이나 백도선의 사생활도 우여곡절의 연속이었다. 1953년 백도선은 한국에 주둔하자 마자 결혼을 하여 딸을 하나 둔다. 그러나 미군의 국제결혼이 허용되지 않아 한국 16개월 근무뒤에 6개월간 미본토 근무를 하고 오는 사이 첫부인과는 연락이 두절되었고 혼인신고도 되지 않은 남남인체로 끝났다.

당시 미군에서는 미군 부족분을 외국인을 입대시켜 5년을 복무하면 미국시민권을 부여하는 특별법(주로 필리핀 주둔 해군에서 영어를 구사하는 필리핀인들을 주대상으로 운영하여 수빅만 폐쇄때까지 운영하던 법)을 운영하여 백도선은 그 법을 적용받아 1958년에 미국시민권을 획득하게 되었다.

1959년 6월 한국 현지전역을 하기 2주일전쯤 백도선은 1952년 미해군함정 인수방미시 대령으로 인솔단장이었던 해군참모총장 이용운 중장을 찾아갔다. 이용운 중장은 백도선하사가 외출했다 무슨 변을 당해 이세상 사람이 아닌줄 알았다며 반가이 맞아주었고 해군법무관에게 상담하여 자수형식을 통해 군법에 회부하여 해군참모총장 특사로 석방할것을 약속 받았다.

드디어 2주후 미육군을 하사로 제대하고 한국해군 자수 탈영병으로 군법에 회부되어 '전시탈영'으로 사형을 언도받고 부친 백기환이 일제시대 수형되어 있던 마포형무소와 함께 운영하던 해군형무소에 보름정도 수형되어 있다가 특사로 풀려나게 되었다. 드디어 1952년 어이없는 미기로 빚어진 백도선의 7년간에 걸친 전시탈영의 굴레를 벗어버리는 순간이었다.

자유의 몸이 된 백도선은 1961년부터 미국 육군 PX관리 문관으로 문산에서 근무하며 주둔군인 미군의 군속으로서의 모든 혜택을 누리며 1964년 결혼을 통하여 한국 최고 권력층의 주변을 맴돌기도 하는 등 백도선의 일생의 정점을 이루는 시기이기도 했다.

덧붙이는 글 | 이 이야기는 [백도선의 인생유전 (3)]에서 계속됩니다.

덧붙이는 글 이 이야기는 [백도선의 인생유전 (3)]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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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잡지연구소 연구원 근무하다 버지니아텍에서 농공학을, 브라운대학에서 지질학을 공부했으며 노스이스턴 공대 환경공학석사와 로드아일랜드대학 토목환경공학박사를 취득했다. 플로리다주 리 카운티 공무원을 시작으로 미연방공무원으로 국방성에서 근무했으며 현재는 연방에너지규제위원회에 근무하고 있다. 2003년 한국정부로부터 5.18 민주화유공자로 인정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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