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고향 냇가, 그 가슴 아린 추억

휴가 떠나지 못하는 어느 출향인의 '여름이야기'

등록 2001.08.04 12:23수정 2001.08.07 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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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해 내 고장 모 라디오 방송의 <나의 살던 고향은>이라는 프로그램에 출연하여 그리운 어린 시절의 추억담을 나눈 적이 있다. 출향인의 한 사람으로서 애틋한 옛 시절의 이야기를 회상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진 것만으로도 내게는 매우 유익하고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지금은 헐려버린 생가에 대한 일화라든지, 장날 신작로 풍경 등 몇 가지 떠오르는 추억을 소개하다가 그만 시간이 모자라, 어린 시절 가장 많은 시간을 보냈던 마을 앞 냇가 풍경을 미처 다 이야기하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웠다.

그러던 차에 1년여가 지난 오늘, 이런 저런 사정으로 휴가는 떠나지 못하고, 아이들과 함께 선풍기 앞에 앉아 「어린 시절 여름철 추억」에 대한 청탁원고(<대전예술>지, 여름 특집)을 쓰면서, 그 때 못다 한 이야기를 마저 하고 싶어진다.

청정 산골물이 모여 내를 이룬 곳

나의 고향은 청양 장평(長坪)이다. 어린 시절에는 적곡(赤谷)이라 했는데, 어감이 좋지 않다고 하여 1987년 장평으로 고쳤다. 장평이란 지명은 원래 이 지역의 큰 들인 장수평야(長水平野)에서 유래하는데, 내 고향 마을 앞으로 흐르는 소 하천은 칠갑, 망월 등 큰 산줄기를 타고 내려온 청정 산골 물이 모여 내를 이룬 가래울[中楸]천이다.

조약돌이 선명히 보일 만큼 깊지는 않았으나 물살은 센 편이었다. 붕어, 피라미, 가물치, 메기, 뱀장어 등 민물 어종이 다양했으나, 어린 시절 내가 즐겨 잡던 물고기는 '꽃 치러'(붉은빛과 암청색 무늬가 띠처럼 알록달록한 피라미를 일컫는 청양지역 방언)였다.


수렵시대 원시인처럼

한 사람이 그물을 대면 또 한 사람은 첨벙대면서 날쌔기가 번개같은 꽃 치러를 그 속에 몰아넣는다. 그야말로 원시적인 방법이다. 먹고사는 게 당시에는 이렇듯 모두가 원시적이었다. 그물이라는 문명의 도구만 빼면 인간의 행동 그 자체는 수렵시대를 연상시키는 원시인이나 다름없었다.


그런데 이런 원시적인 물고기잡이에도 요령이 필요했다. '마구잡이식'이란 말이 요즘 흔히 쓰이는데, 어린 시절 물가에서도 그런 방법을 쓰면 자칫 물살에 넘어지거나 잡았던 고기도 놓치는 등 별 소득 없이 몸만 지치고 무리가 따른다는 사실을 시골아이들은 스스로 터득했다.

그러나 도시 아이들은 그걸 몰랐다. 여름 방학이 되어 시골 할머니 댁에 모처럼 놀러오면 곧잘 물가로 나오지만, 물고기 잡는 방식은 새카맣게 그을린 촌놈들과는 달랐다.

처음 그물을 대보는 도시 아이들은 소리나 지르고 첨벙거려보지만 그물에는 돌멩이만 건져 올릴 뿐, 날쌘 꽃 치러 한 마리 건지기 못했다. 더러는 흉물스런 '귀신개구리'를 건져 올려 기겁을 하는 아이들도 있었지만.

물고기 잡는 요령

어쨌든 흐르는 냇물에서 뜬 고기(날아다니는 고기)를 잡으려면 고기의 성질까지도 잘 파악하고 있는 시골 악동들의 노련한 경험과 기술을 인정해줘야 한다. 즉, 이 약삭빠른 놈은 그물을 댄 쪽에서 위로 올라가면서 역 방향으로 몰아야 그물 속으로 들어가지, 토끼몰이 식으로 위에서 아래로 몰아서는 잘 잡히질 않는다.

나는 여름철이면 셋째형과 냇가에서 거의 살다시피 했다. 고기를 잡을 때는 손발이 잘 맞았다. 형이 그물을 대면 나는 주전자(뚜껑 있는 주전자가 고기그릇으로는 안성맞춤이었다)를 들고 고기를 몰았다. 그런 역할 분담에는 특별한 이유가 있었다. 형은 원래 동작이 완만하여 고기를 모는 기술보다 그물을 대는 편이 나았고, 행동이 비교적 민첩하다고 하는 나는 고기 모는 기술을 인정(?)받아 이 역할분담은 쉽게 변경되지 않았다.

고기잡는 일이야말로 '좋은 운동'

온 종일 물가에서 지내다 보면 시장기가 돌기 마련이다. 손목에 시계가 없었던 시절이었으니, 허기를 느끼면 자연 귀가신호로 알았다. 지금 생각하면 소 하천에서 물살 거스르며 민물고기를 잡는 일만큼 고된 노역(勞役)도 없었던 것 같다.

칠순을 넘기고도 젊은이 못지 않게 건강을 누리시는 나의 장형께서 요즘 즐겨하는 말씀이 있다.
"내 나이에 이 정도 건강을 유지하는 비결은 뭐니뭐니 해도 어린 시절, 이·삼 십리 길을 도보 통학한 덕분이 아닌가 해! 어린 시절, 걷기 운동을 많이 하여 노년에도 이처럼 건강유지가 된다는 것은 이치에도 맞는 말 같아!"

옳은 말씀인 것 같다. 사실 그런 측면이 있다는 것을 나 역시 건강에 관심 가지는 나이가 되면서 깨닫게 되었다. 언젠가 이런 글을 읽은 적도 있다. 남성에게 가장 좋은 운동으로서 걷거나 뛰는 운동이라고 하는 것은 다 그만한 이유가 있다는 것이다.

남성의 '쌍령(雙鈴)'은 시달림을 받을수록 좋다는 것인데, 굳이 의학적인 분석과 설명이 아니더라도 수긍이 가는 면이 없지 않다. 그렇다면 물고기를 쫓아다니며 여름 한 철 물가에서 첨벙거렸던 그 어린 시절의 '운동'이야말로 얼마나 소중하고 값진 운동이었던가.

어머니의 상심한 얼굴과 가슴 아린 사연

그런데 어느 날이었다. 우리 집안에 뜻하지 않은 불행이 있었다. 우리 형제들은 그 후 물고기잡이에 그다지 흥미를 느끼지 못하게 되었다. 물고기를 잡아 가지고 집에 돌아오면 그처럼 반겨주시던 어머니께서는 그 전 같지 않으셨다. 자식들이 물가에서 놀다오는 것을 보면 상심하신 얼굴로 외면하셨다. 그늘이 깊게 드리운 어머니의 얼굴을 보면서 우리 형제들은 가슴이 아려왔다. 가난하고 힘들었던 그 시절, 물살 사나운 하류에서 둘째 형님이 불의의 사고를 당하여 저 세상으로 가신 것이 바로 이 즈음이었기 때문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을 읽으시는 독자 여러분들은 이 여름을 건강하고 안전하게 보내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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