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년 전에 제출한 '방북신청서'

등록 2001.08.08 08:27수정 2001.08.08 1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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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6월 13일 오전 10시 38분. 55년간 닫혔던 마음의 문이 마침내 열리는 순간이었다. 한 사람은 이 얼마나 오래 기다렸다는 듯 두 손을 내밀고 한 사람은 이 순간을 놓칠세라 두 손을 굳게 꽉 잡았다. 그렇게 남북을 갈라놓았던 분단의 장벽도 그 순간 55년을 앙갚음이라도 하듯 눈 녹듯 스르르 녹아내렸다.


남북의 정상이 두 손을 잡다못해 덥석 껴안고 오열이라도 터트리며 '왜 이제 왔소'하며 서로 얼굴이라도 어루만지며 힐책 아닌 힐책이라도 했더라면 더 좋지 않았겠냐는 상상을 하며 아쉬움을 달랬다.

매장에 나가야지, 나가야지 하며 벽시계와 TV를 연신 번갈아 보며 침대에 붙인 엉덩이를 들 수 없는 자신을 원망하고 있었다. 전날부터 정상의 만남을 기대하며 잠을 설쳤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하늘을 날만큼 가뿐했고 세상 부러운 것 없는 부자가 되어 있었다. 계속 반복되는 TV속의 남북의 만남은 보고 또 봐도 지겨운 줄 모르며 떨어지지 않는 엉덩이를 탓했다.

그러다 어느 새 매장으로 나온 시간은 두 시를 훌쩍 넘어 세시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그만큼 봤으면 질릴 만도 하겠는데 왜 그리 눈앞에 아른거리는 다정한 두 정상의 모습 위로 남북이 어깨를 둥실둥실 하는 모습에 도대체 일손이 잡히지 않았다. 기어이 저녁 일찍 매장 셔터를 내리고 집으로 향했다. 득달같이 달려가 리모콘을 손에 잡았다.

하루를 그렇게 들뜬 마음으로 시간을 보냈다. 덕분에 귀가시간이 빨라졌다며 아내는 좋아했다. 남북의 동포애가 남북뿐만 아니라 우리 신혼재미까지 챙겨준다며 호들갑을 떨었다. 내심 이렇게 들뜬 맘은 행여나 남북정상이 큰 선물보따리라도 풀어놓을 것 같은 기대감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마침내 두 정상이 4개항 원칙을 담은 합의문에 사인을 하는 모습에 그만 눈물이 흘러 내렸다. 그렇게 간단한 것을 진작에 하지 못하고 서로를 원망하며 갈라져 싸웠던 지난 세월이 원망스러웠다.

바로 이웃에 사는 친구 광식에게 전화를 했다. 그 친구는 나와 92년 총학생회를 이끌며 통일운동에 헌신하던 조국통일위원회(조통위)위원장이었다. 그렇게 고생스럽게 잡혀갈 각오하며 처절하게 싸웠던 지난날이 마침내 오늘에야 결실을 맺는 듯 흥분에 전율하고 있었다.


광식에게 전화를 했다. "이놈아, 니 TV보고 있제. 혼자 이 감격을 보자니 가슴이 떨린다. 바로 집으로 와라. 술은 준비할테니..." 집으로 달려 가보니 아내가 벌써 술상을 봐놔서 이심전심은 소리 없이 전해지고 있었다. 광식이 바로 달려오고 우리들의 자축연은 술이 동이 나도록 그렇게 밤을 태우고 있었다. 새벽녘에 친구가 돌아가고 어느새 나는 골아떨어졌다.

1987년 고3이던 해 내가 다니던 학교는 부산역 바로 앞에 위치해 있는 부산고였다. 6월 들어 구봉산 뒷자락을 타고 넘어 온 최루탄연기에 수업을 조기에 마치는 사례가 종종 발생했다. 구봉산 뒤쪽은 동아대가 자리잡고 있었다. 대학생들의 교문진출을 가로막느라 퍼부어 대던 최루연기였을 것이다. 간혹 부산역쪽에서 바다바람을 타고 불어오는 최루바람은 또한 우리들을 교실에서 내몰았다.


철없던 당시는 수업땡땡이 치는 듯한 맘에 그저 좋아라 하며 학교를 빠져 나갔다. 그러면 야간자습은 접고 집으로 바로 가라는 선생님들의 불호령을 들으며 집으로 가야 했다. 그러나 집으로 갈 수 없었다. 시민과 대학생들로 거리는 '호헌철폐, 독재타도'라는 함성에 이미 묻혀 있었다. 그때만해도 '호헌철폐'는 뭔 말이냐며 친구들과 고개를 갸웃 거렸다. 이미 길거리에 잔뜩 깔린 보도블럭과 곳곳에 피워 놓은 불에서 나는 연기로 한치 앞을 내다 볼 수 없을 만큼 어둠이 내린 거리는 공포 그 자체였다.

그 공포스러움속에서도 뭔가 신성한 기운이 감지되었지만 그 실체를 이해하기에는 나이가 어렸다. 급한 것은 어떻게든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었지만 아예 버스는 보이지도 않았다. 친구들과 버스가 지나다닐 수 있는 길까지 몇십 분이나 걸어서 겨우 집에 들어 갈 수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부산역으로 가는 버스는 부산역쪽으로 가지 않고 부산진시장을 돌아 바로 부산항이 있는 부두쪽으로 향해 달리는 것이었다. 승객들은 놀라 기사에게 항의를 했다. 기사도 어쩔 수 없다며 밤새 전경들과 공방전으로 부산역 방향은 아예 차가 다닐 수 없다고 했다.

부산역 뒤편 부두가에서 내려 굴다리를 지나 학교로 향했다. 그날 따라 유독 안개가 많이 끼였구나 하며 걷는데 연신 눈물 콧물로 제대로 걸을 수가 없었다. 큰길에 도착해서 보니 안개와 최루연기로 앞이 훤히 보이진 않지만 길 아래로 깨진 보도블럭 들이 무슨 자갈을 쏟아 부은 듯 끝없이 이어져 있었다.

앞에 가던 여학생은 길가 전봇대를 붙잡고 아예 통곡을 하며 눈물과 콧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여학생에게 다가가 내 손수건을 내밀었다. 시간을 보니 이러다 지각을 하겠구나 하며 얼른 서둘렀다. 뒤발치에서 울고 있는 여학생을 보니 나도 모르게 눈물이 더 많이 나왔다. 어떻게 죄 없는 우리들이 이런 고통을 왜 받아야 하냐며 막연하게나마 원망을 하고 있었다. 그 날밤 뉴스에는 북한의 사주를 받은 자들의 배후조종으로 시위가 날로 확산되고 있다며 불안감을 조성하고 있었다.

1989년, 그해 성대에 입학해서 학술동아리에 가입을 하고 대학문화를 별다른 거부반응 없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5월 대동제에 13차 평양세계청년학생축전을 기념한 모의축전에 참가했다. 그날 거기서 '조선은 하나다'를 배웠다. '조선은 하나다' 두 번이고 세 번이고 계속 불렀다. 단조로운 곡조에 가사도 단순하다고 느꼈지만 왠지 끌리는 것이 맘에 들었다. 학생들이 평양에서 추게 될 춤이라며 선배누나랑 왈츠도 배웠다.

그렇게 조금씩 또 하나의 조국 북조선에 대해서 차츰 눈을 떠갔다. 낯설게만 느껴졌던 북조선이 어느덧 가까이 다가와 있는 것이었다. 농활을 다녀와서 동아리선배가 한번 도전해볼 만한 꺼리가 생겼다며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전국을 순례하며 통일에 대한 열망을 남들과 나눌 수 있는 것이 있다고 했다. 덤으로 이번 평양축전에 참가하면 평양까지 갈 수 있다는 달콤한 유혹을 했다.

두말없이 가겠노라고 나선 것이 '통일선봉대'였다. 선배, 동기와 함께 통일선봉대 여정을 떠났다. 통선대에 가 '방북신청서'라는 것을 작성하게 하였다. 그 당시 정부에서도 전대협의 통일운동 자체를 일방적으로 막을 수 없는 상황이여서 상황에 따라서 정말 꿈에 그리던 '평양'에 가게 되겠구나 하며 같이 모인 친구들과 얼싸안고 기쁨을 나누며 얼마나 감격했었던지... 정말 '평양에 가는 구나'하며 21살의 청년의 가슴은 뜨겁게 뛰고 있었다.

그러나 통선대의 활동은 만만한 게 아니었다. 정부의 방북불허에 우리는 경찰들과 숨바꼭질하듯 광주, 전주, 청주, 천안을 거쳐 수원, 마침내 서울에 입성을 했다. 그러나 대회장이던 한양대는 철통같은 원천봉쇄로 개미새끼 한 마리도 얼씬 못하게 막아 놓고 있었다. 그러나 조국통일에 대한 불타는 열정은 일명 '환상의 택'이라는 전대협의 힘과 지혜로 마침내 한양대에 입성하게 된다.

'환상의 택'은 뚝섬역에서 한양대로 잇는 철길 위를 수만의 청년학생들이 달리고 달려 한양대에 있던 동지들의 도움을 받아 무사히 한양대로 들어가게 되는 학생운동 역사상 가장 빼어난 환상의 야사가 되었다. 그 과정에서 넘어지면 일으켜 세우고 쓰러지면 손이라도 잡아주고, 업고라도 달려가던 그날의 뜀박질이 분단의 철책을 부수고 달리던 통일의 발걸음이라고 확신한다.

그날 저녁 전야제에 또 한번 우리들은 감격에 떨어야 했다. '임수경학우가 전대협 백만학도를 대표하여 베를린과 북경을 거쳐 평양에 도착했다'는 전대협 3기 임종석 의장의 떨리는 목소리는 전야제에 모인 사람들을 열광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마치 자신이 평양에 도착한 것처럼 얼싸안고 기쁨을 만끽했다. 그렇게 흥과 결의로 그 날밤은 빠르게 지나갔다.

아침부터 한양대 근처로 몰려드는 대규모 경찰병력은 우리의 통일출정식을 호락호락하게 내버려 두지 않을 것처럼 보였다. 노천극장 쪽으로 하얗게 꼬리를 흔들며 날아오는 지랄탄을 보며 오히려 우리의 통일출정식을 축하하는 축포와 같다는 사회자 목소리가 끝나기가 무섭게 새까맣게 전경들과 백골단은 교내로 진입하고 있었다.

대오는 인문관과 종합관으로 흩어져 대치가 계속되었다. 교내는 이미 전경과 백골단의 아지트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용감한 청년학생들은 전남대 오월대를 선두로 임종석 의장이 탈출에 성공했다는 소식을 듣고 사기가 하늘을 찌를 듯 했다. 그렇게 연세대에 다시 모인 우리들은 판문점으로 가야 한다며 또 한번 전쟁을 치뤄야 했다.

대회는 끝났지만 검문은 계속 진행되었다. 그 고생을 하며 입고 지냈던 통선대 티를 경찰에게 빼앗기지 않기 위해 나는 비닐봉투를 구해 연세대교정 한쪽에 파묻었다. 기어이 다시 와서 이 통일의 티를 다시 입고 말리라하며 고이고이 파묻었다. 아직도 눈앞에 선명하게 아른거리는 13차 평양세계청년학생축전을 상징하는 13과 평화를 상징하는 비둘기를 멋지게 형상화한 하얀 비둘기가 새겨진 분홍빛 통선대 티는 이후 가장 즐겨 입는 옷이 되었다.

89년 통선대 경험은 통일에 대한 열정을 더욱 부채질하며 이후 90, 91년 두 번을 더 통선대에 가게 만들었다. 92년 성대총학생장이 되어서도 통일에 대한 의지는 더욱 굳어지며 통일운동에 더욱 박차를 가해야만 했다. 왜일까? 입학하던 89년 공안정국에서부터 멀리는 80년 광주민주항쟁에서 아니 분단 이후 민족의 운명을 뒤바꿀 역사적 고비마다 분출하는 민중들의 민주와 통일에 대한 열망은 번번히 분단을 전제로 한 독재권력의 반공반북이데올로기 앞에 된서리를 맞아야 했다. 허리 잘린 한반도를 잇지 않고선, 수십년의 남북의 철책선을 걷어내지 않고선, 이 땅 한반도에선 민주도 자주도 통일도 없다는 것을 분명히 깨달았던 것이다.

군대를 제대한 후 남북의 대결구도가 얼마나 많은 국력을 소모하는 행위이며 민족의 장래에 씻을 수 없는 장벽인가를 뼈저리게 인식하게 되었다. 이후 복학을 해서 통신공간을 통해 민주와 통일에 대한 열망을 전파하면서 많은 이들이 아직도 남북대결구도에 익숙한 것에 많이 놀랐다. 지난 97년 대선을 앞두고 불거진 '총풍'이니 '북풍'이니 하는 것만 봐도 지금까지 권력들이 어떻게 민족의 장래는 아랑곳 없이 자신들의 권력유지를 위해 '통일'을 이용했지 진정 통일에 대한 믿음은 없었음이 분명해진다.

98년 정주영 회장이 소떼를 몰고 오르는 방북길은 통일을 위한 멋진 교향곡 같은 '통일예술'이라는 감동을 안겨 주었다. 돈버는 데 관심만 있는 줄 알았는데 저렇게 기발한 상상력을 발휘하는 양반이 보통이상의 특별한 사람으로 기억되게 만들었다. 그렇다. 통일에 길에 돈있는 자 돈으로, 지혜있는 자 지혜로, 힘있는 자 힘으로 너도나도 나서야 한다. 민간부문의 자유로운 왕래를 점진적으로 확대 시켜나가야 할 것이다.

작년 '6.15남북공동선언'의 정신에 나타나듯이 남과 북은 통일문제를 '그 주인인 우리 민족끼리 서로 힘을 합쳐 자주적으로 해결', '통일을 위한 남측의 연합 제안과 북측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안이 서로 공통성이 있다고 인정하고 앞으로 이 방향에서 통일을 지향', '흩어진 가족, 친척 방문단을 교환하며 비전향 장기수 문제를 해결', '경제협력을 통하여 민족경제를 균형적으로 발전시키고 사회, 문화, 체육, 보건, 환경 등 제반 분야의 협력과 교류를 활성화'하여야 한다. 무엇보다 군사적으로 대치된 상황을 이완할 수 있는 상호불가침과 평화군축협정도 시급하다고 본다.

나에겐 꿈이 있다. 현재 관심을 가지고 연구하고 있는 환경생태건축을 남과 북에서 현실화시켜 아담한 통나무집에서 남과 북의 동포들이 오손도손 밤새워가며 얘기를 나누는 쉼터를 마련하는 것이다. 남쪽의 통나무집에 북녘의 동포가 북쪽의 귀틀집에 남녘동포가 서로 방문하여 반세기를 훌쩍 넘겨 버린 세월을 원망하며 헤어졌던 형제가 두 손 꼭 잡고 나란히 누워 곤히 잠드는 모습을 상상해본다. 1989년, 21살의 청년이 평양에 갈 수 있다며 적어 냈던 '방북신청서'는 이제 대답해야 할 것이다. 아직 갈 길이 멀다.

12년 전, 평양행 '방북신청서'는 아직 접수되지 않았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오마이뉴스와 한국청년연합회에서 주관하는 평양행사 참가자공모에 제출하는 통일에세이입니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오마이뉴스와 한국청년연합회에서 주관하는 평양행사 참가자공모에 제출하는 통일에세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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