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부색이 특권의 표지는 아니다

등록 2001.09.10 15:00수정 2001.09.10 1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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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적에 허먼 멜빌의 <모비딕>을 읽어본 사람들이 많겠다. 그러나 그 대부분 이들에게 <모비딕>은 해양 모험소설의 이미지로 남아 있을 것이다. 거대한 흰 고래에게 한쪽 다리를 잃고는 복수심에 사로잡혀 대양을 떠돌던 에이허브 선장이 끝내 비극적인 최후를 맞게 된다는 줄거리와 함께.


그러나 <모비딕>이 그런 축약판으로 설명될 수 없는 심원한 세계를 안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뜻밖에도 많지 않다. <모비딕>을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그것은 서양 문명에 대한 성찰이라고 말할 수 있으리라. 등장인물들의 이름부터 흰 고래의 상징에 이르기까지 멜빌이 의도한 것은 자기가 속한 문명에의 반성이었다.

주인공인 이스마엘이 선원이 되고자 포경선이 몰려 있는 항구로 가서 '식인종'과 함께 같은 방에서 하룻밤 묵게 되는 이야기부터가 이미 세계는 넓고 서양적 가치는 상대적임을 깨달은, 작가의 깊은 통찰력을 담고 있다.

또 흰빛에 대해, 그 상징성에 대해 한 장(章) 모두를 할애하며 자기의 사상을 풀어가는 작가의 문학적 투쟁은 얼마나 처절한가. 흰 고래는 단지 괴물 같은 실물의 고래가 아니다. 그것은 흰빛을 숭상하는 서양 문명이고 그 불가해한 심연(深淵)이다. <모비딕>은 밑도 끝도 없이 무작정 흰빛을 숭상하는 서양인들의 습성에 대한 멜빌이라는 세계시민의 냉철한 진단이며 그 문명에 관한 묵시록이다.

사춘기 무렵까지 내게 서양은 침묵하는 존재였다. 세계명작을 아동용으로 푼 소설을 읽다가 중학생이 되면서부터 카프카나 헤세, 지드 따위를 읽었을 뿐이다. 한반도에 강력한 영향을 미치는 미국은 내게 아무런 의미도 없는 땅덩이 넓은 나라였을 뿐, 대학 때 반미운동이 일어났고 최인훈의 <화두>(1994)가 있었으나 광주며 6·25며 해도 미국은 여전히 내게 실감이 부족하다. 내가 시골 출신이고 로스엔젤레스에 겨우 사흘 머물러 본 일 밖에 없어 그런 지도 모른다.

반면에 유럽은 어느덧 유구한 전통을 가진 이상적인 이미지로 나의 머리 속에 자리 잡았다. 그러나 그 유럽도 직접 가서 살아본다면 꿈과 결코 같지만은 않으리라는 사실을 나는 잘 안다.


흰빛은 사람들의 꿈처럼 그렇게 깨끗하지도 숭고하지도 않다. 그것이 피부 빛깔 이야기가 되면 문제는 더욱 달라진다. 피부빛이 하얀 사람들도 거짓을 남발하고 사실을 수시로 왜곡한다. 도둑질하고 약탈하고 칼부림하고 강간하고 살인 저지르고 남의 강물에 독약을 풀고 학살을 저지르고 그 모두를 은폐하려 든다. 돈에 물들어 남의 나라 일에 부화뇌동한다. 나이가 들면서 세상을 읽게 되면서 내게 흰 빛의 이미지는 달라졌다. 피부빛에 관해서라면 말할 것도 없다.

그럼에도 나는 가치의 완전한 상대화를 믿지 않는다. 동양문명에 대한 서양문명의 우월성이라는 신화를 완전히 안 믿듯이 그 역도 전적으로 신뢰하지 않는다. 흰빛에의 회의 만큼이나 유색에의 회의가 필요하다. 그것이 내가 요즘 유행하는 동아시아주의와 '동양주의'로부터 거리를 두는 이유이다.


요컨대 중요한 것은 어떤 빛깔의 신화이냐가 아니라 빛깔의 신화로부터 벗어나는 일 그 자체가 아니겠는지. 빛깔이란, 피부빛이란, 인간의 생물학적 표지일 뿐 영원한 특권의 표지가 될 수는 없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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