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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틀 전부터 옆집 언니가 딸의 운동회에 같이 가자며 다른 약속이 있는지 물어왔다. 특별히 바깥 출입이 없던 나는 어린 시절 흙먼지 뒤집어 쓰면서 열심히 달렸어도 3등을 겨우 했던 달리기 생각이 나서 꼭 가겠다고 대답했다.
초가을. 모든 것들이 영글어서 제 빛깔과 맛을 내는 계절. 아이들의 우렁찬 웃음소리와 떠들썩한 응원소리, 그리고 지금도 들으면 깜짝 놀라 뒤로 넘어질 달리기 신호 총소리. 그 총소리를 기억하며 12시쯤 집을 나섰다.
이부제 수업처럼 운동장이 좁아서였는지 오전엔 초등학교 1,3,5학년의 운동회가 열리고, 오후엔 2,4,6학년의 운동회가 이어진다고 했다. 손바닥만한 운동장 위에서 펼쳐진 프로그램은 참 단순했다. 그래도 단순함 속에서 어린 시절 운동회의 추억을 불러올 수 있어 희미하게 미소까지 지어진다.
아이들의 운동회는 설레이는 가슴과 운동회에 쓰일 작은 물건들을 준비하는 분주함대신 교실 급식부터 시작되었다. 오전에 끝난 아이들의 급식과 함께 했는데 옆집 아이는 2학년이라서 한 시간 동안 밥을 먹고 1시부터 운동회를 시작한다고 했다. 그러니 고작 3시간 동안에 운동회는 마무리되는 것이었다.
아이들은 똑같은 식판에 같은 밥과 반찬을 놓고 먹고 있었는데, 아이들이어서인지 그 누구도 심지어 아이들조차도 언제 점심 먹기가 끝날지 알 수가 없는 모양이다. 원래 재미난 일을 앞에 둔 그만한 나이 때엔 먹는 것보다 재미난 일에 더 열중이어서 밥도 후딱 먹어치우거나 아예 먹기를 거부할 텐데 참 다른 모습을 보니 자꾸만 '그때'란 단어가 떠오른다. 한 아이에게 다가가 물었다.
"운동회하니까 좋아?"
"아뇨. 네 시까지 어떻게 놀아요. 재미도 없어요. 끝나면 **미술학원 가야 한다구요. 그러면 너무 늦게 집에 오잖아요."
"그래도 공부대신에 뛰어노니깐 좋잖아. 안 그래?"
"아뇨. 피곤해요. 하기 싫어요."
모든 아이들의 답은 아니겠지만, 먼저 밥을 먹은 아이들은 손장난을 하며 놀고 우유조차 나더라 마셔달라고 애원이다. 선생님은 늑장 부리는 아이들에게 "어서 밥 먹어요"하며 보아주는데 정말 성질 급한 사람이 본다면 속터질 일이라며 도우미 엄마가 속삭인다.
1시가 되자, 아이들은 각자의 식판을 들고와 그릇에 담고 신발주머니를 챙기고 운동장으로 나간다. 선생님의 구령에 따라 아침에 했던 대로 행사를 진행하였다. 준비체조까지 마치고 제일 먼저 시작된 것은 2학년 달리기.
아침에 운동회를 마친 5학년 남자아이들이 '운동회 도우미'라는 깃을 달고 1,2,3등 표지판을 들고 섰다. 아쉬운 것은 기대했던 '딱'하고 쏘는 화약총 출발 소리. 겨우 깃발 하나와 호루라기로 진행되었는데도 여기에 또 양념처럼 있던 응원마저도 없어 마치 달리기 1,2,3등을 가리기 위한 달리기 시합 같다.
함께 구경하던 엄마들은 옆에서 아예 비켜나 그늘을 찾았고, 교문 앞 솜사탕 아저씨들도 그리 장사가 잘 되지 않는 것 같고, 만국기는 맑은 가을 하늘 하늘 위로 팽팽히 날리는데, 아이들의 소리는 운동장을 넘지 못한다.
그래도 운동회인데 이제 재미난 볼거리라도 있겠지 하며 놀러나온 동네 할머니들은 여전히 흥겨운 가락도 없이 먼지만 날리는 운동회 보잘 것 없다며 슬슬 뒷짐지며 돌아가고.
그래도 볼 만한 것은 각 학년에서 준비한 율동이었다. 정성스레 준비한 흔적에 사람들의 박수를 제일 많이 받은 것 같다. 청군 백군이 있다고 하지만 장갑으로 표시를 했기 때문에 놀기를 좋아하는 아이들은 벗어서 주머니에 넣고 필요할 때만 꺼내는 실정이었다. 차리리 어린 시절 우리처럼 파란색 운동복을 입거나 머리띠를 해서 구별을 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또 일었다.
으레 운동회라고 하면 아이와 선생님, 학부모, 동네 사람들이 하나가 되어 신나게 한 판 노는 것이라 생각했는데, 마치 학교 일정에 들어 있어서 할 수 없이 하고 있다는 듯한 인상을 짙게 풍긴다.
디지털 카메라와 수동 카메라 두 대를 가지고 갔지만 정작 찍은 사진은 몇 장면 되지 않는다. 더군다나 선생님과 어린이, 학부모와 자녀들, 그리고 선생님, 그리고 동네 사람들과의 어우러진 경기가 있었더라면 응원이 없었다 해도 서운함은 없었을텐데. 시간 때우기식의 운동회가 아니었나 싶을 정도다.
결국 아이들은 자기 차례가 아닐 때는 털썩 주저앉아 흙장난을 하는 통에, 운동회 때문에 흙먼지가 날리는 게 아니라 장난해서 날리는 흙먼지가 더 많았다. 차라리 힘찬 행진곡이라도 내내 울려 퍼졌더라면 운동회에 직접 참여하지 않은 주위 사람들은 흥이라도 나지 않았을까.
설레이며 준비한 엄마의 김밥과 삶은 달걀, 그리고 운동회 작은 물건들대신, 준비된 학교 급식과 따로따로 경기에 시무룩해져 돌아온 초가을 운동회. 옆집 엄마는 내게 미안하다면서... 사진이라도 찍어줘서 감사하다며 밥이나 한 끼 하잔다. 그러면서 우린 서로 입을 맞추기라도 한 듯...
"우리 때는 안 그랬는데......"
"그러게, 김밥도 싸고 음료수도 사고, 장갑이랑 총채랑, 짝짝이......가장 무도회도 있었지 아마."
그래도 초가을 하늘 아래 안타까운 운동회였지만, 지나온 시간 속 운동회를 되새겨볼 기회가 있어 감사한다. 바람이 있다면, 그늘을 찾아가 앉기보단 시간을 잊고 흙먼지 뒤집어쓰고 목이 아플지라도 청군 이겨라 백군 이겨라 응원하면서 신나 할 수 있는 모두의 운동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먼 훗날 시간이 흘러 초등학교 운동회를 떠올릴 때 살풋 웃을 수 있도록.
청군 이겨라 백군 이겨라 소리는 어디에서 들을까. 이어달리기 때 어떤 선생님의 북소리와 소고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오긴 했다.
덧붙이는 글 | * 서울 시내 초등학교 운동회 프로그램만이 그럴지 모르지만, 오후 프로그램을 살펴볼 때, 함께 하는 프로그램은 맨 마지막 이어달리기뿐인 듯 싶다. 어린이 따로, 학부모 따로, 할머니 할아버지 따로다. 그리고 교사가 참여하는 건 없었다. 운동회는 왜 하느냐고 물어보고 싶을 정도로 씁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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