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가을 계룡산의 허물 없는 이웃들

모처럼 아들과 산에 오르면서 마주친 정겨운 풍경

등록 2001.11.18 13:09수정 2001.11.19 1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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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에 모처럼 대학에 다니는 큰 아이와 함께 계룡산에 올랐다.


스님들은 '산에 오른다(登山)' 하지 않고 '들어간다(入山)'는 표현을 쓴다는데, 범속(凡俗)의 필부(匹夫)이기로 나는 감히 '산에 오른다'는 말을 함부로 쓴다.

'큰산'에게 용서를 빌 일이다. 홍진(紅塵)의 보잘 것 없는 한 인간으로서, 마음의 세정(洗淨)조차 게을리 하는 아주 작은 인간으로서 어찌 감히 산을 탄다고 하는가. 그 넓고 큰 품안에 조심스럽게 안긴다 해야 옳을 것이다.


수많은 등산객들의 정겨운 풍경

11월 중순의 산은 아직 단풍이 남아 있어 겨울 산이라 하기엔 이
르고, 늦가을의 끝자락이라 해야 적절할 것 같다. 극심한 가을 가뭄으
로 동학사(東鶴寺) 계곡의 물이 말라, 뒹구는 낙엽과 함께 스산한 느낌을 더해 주었으나, 팔짱을 끼고 오르는 수많은 남녀 등산객들의 정겨운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우리 부자(父子)는 그 대열에서 외롭지 않았다.

키가 큰 아들은 보폭(步幅)이 넓어 뒤따르는 나는 쉽게 지치곤 하
였다. 속도를 낮추라고 손짓 하지만, 아들은 걸음을 좀처럼 늦추지 않
는다. 아름다운 풍광을 느긋이 즐기려는 어른들과는 대조적으로 빨리
정상에 오르겠다는 젊은 욕심을 막을 수 없다. 그래서 이 아비는 아들
에게 자주 '사진찍기'를 제의했다. 녀석도 사진 찍기는 마다하지 않았
다. 인터넷 동호회 사이트에 오늘의 산행을 소개해 보겠다는 나름대로의 '용도'가 분명했기 때문이다.


만나는 등산객들의 모습은 다양했다. 초등학생으로 보이는 어린아
이로부터 수염이 허연 칠십 노인에 이르기까지 연령층도 다양했고, 대
열에서 엿듣게 되는 그들의 화젯거리도 다양했다. 어느 40대 아주머니
는 동행한 친구들과 함께 요즘 TV 인기 드라마 '명성황후'의 주요 대
목을 다 외운다. 구사하는 사투리도 각양각색이다. 관광버스를 대절하
여 왔다는 경상도 사람들의 억양이 가장 요란하게 들리고, 전라도 억
양은 어딜 가나 독특하게 튄다. 이 고장 충청도 사람들의 말씨는 어디
에 묻혔는지 거의 들리지 않는다.

그러나 산에 들어 와 있는 모든 이들의 마음은 순수하다. 어디 태생이든, 어떤 생각을 품었든, 생활 수준이 어떠하든, 자연의 아름다움을 느끼는 것은 하등 차별이 있을 수 없다.



산에서 마주 친 인상적인 사람들

이윽고 은선폭포.

그 산장에는 칠순의 할머니가 음료수와 사발면을 팔고 있었다. 등
줄기의 땀을 식히려고 잠시 쉬어가며 막걸리를 찾는 등산객이 줄을 잇
지만 여기서는 술을 팔지 않는다. 수 십 년을 여기 살면서 어느 TV
자연보호 캠페인 화면에도 등장할 만치 유명해진 할머니. 이제 자신이 휘파람을 부르지 않아도 산새들이 자식처럼 저절로 찾아든다고 말하는 자연과 동화되어 버린 산(山) 할머니.

여기서 만난 어떤 등산객이 내게 말을 건다. "아드님이세요?" 아들
과 함께 사발면 뚜껑으로 후루룩 후루룩 면발을 들이키는 내 모습이
특이하게 보였나 보다. "아직 군대는 안 갔다 왔지요?" 이런 질문을 자꾸 하면서 유달리 깊은 관심을 보이는 그 등산객은 아마도 집에 곱게 키운 규수라도 두고 있는 걸까? 하지만, 우리 아들은 아직 10년은 더 기다려야 하는 처지이니 딴 데나 알아보슈. 이런 엉뚱한 나만의 망상(?)도 얼마든지 가능한 것이 아들과의 산행이다.


「세진정」에 올라 부질없는 욕심 털어 내

하산하면서 마주 친 어느 처녀는 동행한 남자가 덥다면서 웃통을 벗
어버리자, 제법 아내가 다 된 것처럼 "감기 드시면 어쩌려고 그래요?"
한다. 자신의 이 말이 마주친 사람에게까지 전달된 것을 곧바로 느끼
고는 이내 얼굴이 붉어지며 겸연쩍어 하는 표정이 어색하다.

아들아, 아직 너는 저런 모습 부러워하지는 말거라. 속보(速步)로 어서 저 데이트 족들을 추월하자. 이윽고 아들의 손을 잡고 동학사(東鶴寺) 경내로 들어섰다. 이곳 도량(道場)의 특징은 여자 승려의 학당(學堂)이라는 점에 있다. 그런 선입견 때문인지, 어느 절보다도 발걸음이 조심스럽다. 오늘은 주말이라 그런지 유난히 외출중인 여승들을 많이 보았다. 경건하게만 보이는 그들의 까까머리와 먹물 옷을 보면서 계곡 옆에 세워진 세진정(洗塵亭)에 올라, 머릿속 가득한 부질없는 욕심과 먼지를 털어 내 보고자 하였다.


"건강해지려면 자주 오르자"

아들은 내려오면서 다리가 아프다고 했다. 그러나 머리는 신기하게
도 맑다고 했다. 노상 책상머리에 앉아 쌓였던 스트레스와 노폐물이
땀으로 빠져나간 때문인지 몸이 헐렁한 기분이라고 했다. 노점상 아주
머니가 싸주는 군밤 한 봉지를 까먹으며 아들은 이렇게 말했다. "건강
해 지려면 자주 와야 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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