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 줍다 동네 청소한 이야기

등록 2001.11.29 09:44수정 2001.11.29 1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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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는 다세대 앞에는 은행나무가 5그루 있다. 작년까지만 해도 은행나무에 은행이 열리지 않아서 숫컷인가 했다. 언젠가 들은 이야긴데 은행나무는 암컷과 숫컷이 있어 서로 마주보고 있어야 열린다고 했고, 또 숫컷 나무는 열매가 안 열린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누가 심었는지 참 멍청하게 숫컷만 골라서 심어 놨구나 생각했다. 그런데 올해 처음으로 다섯 그루 가운데 가장 큰 놈이 내 생각을 비웃듯이 열매가 열었다.

며칠 전부터는 그 열매가 땅에 떨어져 일터에 오고 가면서 예닐곱 개씩 주웠다. 그런데 요즘에는 은행이 하나도 보이질 않고, 은행잎과 노란 은행 껍질만 아스팔트 위에 껌처럼 붙어 입을 떡 벌리고 찌그러져 있다.

이상하다 생각하고 그 다음날에는 이른 아침 5시에 일어나 떨어진 은행을 주우려고 밖으로 나갔다. 은행나무 밑에는 일흔이 조금 넘어 보이는 할머니가 나와서 떨어진 은행을 발로 살짝 밟는다.

은행이 옆으로 찌그러지면서 알맹이만 쏙 나온다. 할머니는 허리를 굽혀서 은행잎으로 쏙 빠져 나온 은행 알맹이만 집어 검정 비닐에 담고는, 알맹이를 집었던 은행잎은 휙 던져 버리고 왼쪽 골목으로 간다.

다음날도 일찍 일어나 은행나무 밑에 가봤지만 바람에 뒹구는 은행잎과 알맹이는 없고 아스팔트에 문드러진 은행 껍질만 입을 떡 벌린 채 구린내만 팍팍 풍긴다.


내가 은행을 줍기 시작한 건 올해까지 네 해째이다. 은행이 담배를 피우는 사람이나 기관지가 나쁜 사람은 은행을 먹으면 좋다고 해서 그때부터 늦가을이 되면 은행을 주우러 다녔다.

집 앞 목동에서 시작해서 김포공항 쪽으로 갈 때는 오른쪽 인도로 걸어가면서 은행을 줍고 올 때는 왼쪽으로 걸으면서 주워온다. 물론 걸어가다가 사람이 안 오거나 차들이 신호등에 걸려서 안 보일 때는 은행나무를 발로 뻥 차서 몇 개 더 줍기도 했다.


작년에 어머니 제사 때 식구들이 모여서 이야기하다가 은행 이야기가 나왔다. 사촌형님 하는 말이 "한의사가 그러는데 은행이 사람에게 굉장히 좋다고 그러더라, 그런데 하루에 세 개 이상 먹으면 안 좋대. 특히 남자한테는 정력이 안 좋아진대."

헉! 정력. 숨이 막힌다. 나는 은행을 프라이팬에 볶아 먹거나 철사를 30센티 정도 잘라서 산적 만들 듯이 주르르 끼어 가스 불에 갯수 상관없이 마구 구워 먹었는데. 아이구! 그래서 요즈음 일주일에 여섯 번밖
에... 이 말을 들은 뒤로는 철저하게 3개 이상은 절대로 먹지 않았다. 이렇게 이쁜 은행이 올해 포도송이처럼 주렁주렁 열렸으니 내년까지는 걱정을 안 해도 되겠지.

오전반 일을 끝나고 3시쯤 은행나무 밑으로 갔다. 앞전에 그 할머니가 또 발로 은행을 밟아서 알맹이만 봉지에 담는다. 발자국 소리에 할머니는 나를 보더니 은행을 통째로 마구 주워서 봉지에 담는다.

"할머니. 은행을 주우려면 통째로 주워 가세요"했더니, "아저씨. 내가 가게 물건 사러 가면서 은행 주워서 나무 밑에 놔두었는데 아저씨가 가지고 갔지"하면서 째려보며 골목으로 가버렸다.

너무 짜증이 나서 담배를 물고 은행나무를 올려다보고 있는데 옆집 아줌마가 지나가다가 나를 보더니 "아이고 어떤 사람이 이렇게 은행을 밟아서 알맹이만 싹 꺼내가. 하여튼 몰상식한 사람들이야. 냄새가 나서 사람 죽겠네"하면서 힐끔힐끔 곁눈질하면서 지나간다.

'아니예요. 내가 하는 것이 아니고 할머니가 그랬어요'하려다가 변명한다고 그럴까봐 그냥 꼭 입만 다물고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말 많은 우리 다세대 사람들 입에 내가 오르기라도 하면 아내한테 잔소리 들을까봐 걱정이 되었다.

집에 들어와 곰곰이 생각했다.
'어휴! 204호 아저씨가 그랬대.' 동네 아줌마들 하는 소리를 아내가 들으면 "야, 이 인간아 은행이 몇 푼 간다고 그래 동네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냐"하고 분명히 한소리 들을 것이 뻔하다.

아무래도 안 되겠다 싶어 빗자루를 들고 나갔다. 보통 때는 작아 보이던 골목이 엄청 크게 보인다. 우리 집 앞과 큰길가 그리고 앞집 뒤뜰
까지 쓰는데 쓸어도 쓸어도 끝이 없다. 오늘따라 햇볕은 따갑고 바람은 왜 이리 부는지. 한참을 쓸었다. 땀이 얼굴에 흘러내려 눈이 따갑고 손과 어깨가 아프기 시작한다.

"아이고! 아저씨 청소도 하네요"하면서 101호 아줌마가 창문으로 얼굴을 내밀어 인사를 한다. 또 아내와 친하게 지내는 아줌마 둘이서 지나가면서 한마디한다. "204호 아줌마는 참 좋겠다. 아저씨가 저렇게 자상하니 얼마나 좋을까?" 나도 씩 웃으면서 인사를 했다.

"오늘 은행 몇 개 주우려다 *됐습니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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