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 동안 민중항쟁과 신축교안이라는 학계 및 사계와 천주교계간의 현격한 시각 차이를 빚어왔던 제주민란(이재수의 난)의 위상을 새롭게 정립하고 화해를 모색하는 자리가 마련됐다.
1일과 2일 이틀 동안 제주에서는 1901년 제주항쟁 100주년 기념사업추진위원회(공동대표 김영훈·김창선)와 천주교 제주교구(교구장 김창렬) 주최, 제주도사연구회와 역사학연구소 주관으로 '진실과 화해'를 주제로 한 '1901년 제주항쟁 100주년 기념 학술대회'가 열렸다.
올해로 '제주항쟁’(이재수난) 발생 100주년을 기념하여 열리는 학술대회는 도민의 항쟁 등의 시각에서 보는 역사학계 및 사회단체와 당시 첨예한 대립과 갈등으로 인해 피해를 입었던 천주교계가 공동으로 나서 한말 한반도와 제주사회에 큰 영향을 끼쳤던 이재수난을 재조명하는 작업을 시도, 많은 관심이 모아졌다.
이날 각계 참석자 100여 명은 "그 간의 갈등을 씻고 진정한 화해를 위해서 역사적 흔적지에 '화해의 탑'을 세우고 도민과 천주교계가 함께 참여하는 '공동선언문'을 만들자"는 데 의견을 모았다.
이어 참가자들은 2일 천주교도들과의 전투가 벌어졌던 '관덕정'과 민군들이 집결했던 당시 제주읍성 내 '황사평'을 비롯 '대정읍 삼의사비', '이재수 생가터', '명월진성' 등 이재수란 관련 문화유적들을 답사했다.
1901년(신축년) 이재수의 난(亂)이란
19세기가 끝나 20세기가 시작된, 지금으로부터 꼭 100년 전에 제주에서는 중앙 왕실에서 파견한 봉세관(捧稅官)의 조세수탈과 프랑스 선교사를 앞세운 천주교회의 폐단에 저항한 도민 봉기가 일어났다. 이 사건으로 천주교인 수백 명(5000-700)이 목숨을 잃고 민란에 참여했던 민중들도 죽음을 당하는데 이를 이재수 난 또는 신축교난(敎難)·교안(敎案)이라고 부른다.
이재수 난은 천주교도들과 제주도 민중 사이의 충돌이 총을 든 전쟁으로까지 발전하면서 수백 명의 인명피해를 가져오고 프랑스와의 국제적인 외교 문제로까지 비화된 제주도 역사상 매우 중요한 사건이다.
제주민란(民亂)과 신축교난(敎難)이라는 용어가 함께 불리는 이유는 세금징수와 관련된 학정과 천주교회의 폐단을 시정하기 위한 정당한 봉기였다는 시각과 수백 명의 천주교도가 피살됨으로써 교회가 수난(박해)을 입었다는 평행한 시각 때문이다.
이처럼 역사적 사실을 둘러싼 시각의 차이는 당시 사건의 장두(狀頭) 역할을 했던 이재수라는 인물에 대해서도 다른 해석을 하고 있다.
화해를 위한 올바른 방향모색ㅡ이재수를 다시 본다
이날 '화해를 위한 올바른 방향모색'에 나선 도민을 비롯한 학계와 천주교계는 "당시 사회현실에서 이재수란을 토착문화와 외래종교라는 문화적 갈등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시각도 중요하지만 가장 밑바닥에는 살고자 하는 '생존권 투쟁'이 흐르고 있다는 점을 인식해야 할 것"이라는 입장을 밝혔다.
이에 따라 "정치, 경제, 문화, 종교적 관점에서의 깊은 연구와 논의도 필요하지만 생명 존중의 인식하에서 서로 화해하는 방안이 모색돼야 한다"는 데 인식을 같이 했다. 서문천주교회 임문철 신부는 "학계와 도민들이 천주교와 함께 공동 연구회를 꾸려 올해 안으로 화해를 위한 '공동선언문'을 선포하자"고 제기했다.
소설가 오성찬 씨는 "천주교 공동묘지가 들어선 황사평이나 대정삼의사비 등의 역사적 흔적지에 '화해의 탑'을 세우자"고 주장했다.
천주교 제주교구 교육국장 문창우 신부는 '1901년 천주교회와 제주전통사회의 충돌'이란 발제를 통해 "신축교안이 누구의 책임인가를 떠나 역사적 사건의 진정한 이해와 제주도민과 천주교회의 화합과 일치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며 "천주교의 입장을 호교론적 차원에서 제시한다면 여전히 똑같은 상황이 전개될 뿐이며 여기서 벗어나는 것이 우리의 과제"라고 말했다.
또 문 신부는 "신축교안 당시 교회는 교회다운 모습인지, 종교에 있어서도 그리스도교는 과연 종교적 행위를 표현했는지 반성이 요구된다"며 "종교가 폭력을 쓴다는 것은 자신의 종교를 잘못 이해한 데서 생긴 것"이라고 바티칸 2차공회의의 관점에서 신축교안에 대한 신학적 반성의 견해를 밝혔다.
학술대회 주제발표 요지
ㅇ'근대 중국의 구교(仇敎)운동의 성격'(허원 서원대 교수)=근대 중국의 구교운동(종교관련 사건, 기독교·천주교 포함)은 1848년 상하이 청포교안으로 단초를 연 후 1860년 청·불 북경조약에 의해 전 지역에 대한 기독교 포교권이 보장된 이후부터 빈발하기 시작해 19세기까지 중국과 서양사이에 외교상의 분쟁거리가 된 것만 해도 400여 건이 넘는다.
이 운동은 19세기 후반 중.외(外) 관계를 크게 규정한 것은 물론, 운동이 확대·심화돼 가는 과정에서 일부 반봉건적인 색채까지 나타난다. 이런 구교운동은 반봉건성 문제를 놓고 차이를 보이지만 배외성이 강한 반자본주의, 반제국주의 운동이라는데 학계에선 큰 이의를 보이지 않고 있다.
ㅇ'1901년 제주항쟁의 발생과 전개과정'(김양식 충북학연구소 연구원)=제주항쟁은 천주교의 교세 확장과 이에 따른 폐단과 광무정권의 조세 수탈에 대해 전 도민이 총봉기한 반봉건(反封建), 반제(反帝) 민중항쟁으로 성격을 규정할 수 있다.
더 나아가 이는 서구문화와 제주문화의 충돌이자, 새로운 사회체제로 이행하는 초기 과정에서 나타난 주도권 싸움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1901년의 역사적 경험은 오늘날 신자유주의 세계질서 속에서 제주역사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도민에 의한, 도민을 위한 제주지역 발전을 위해 길잡이가 될 것이다.
ㅇ'한말 제주지역에서의 토착문화와 외래종교의 갈등'(박찬식 제주4.3사건위원회 전문위원)=제주항쟁은 한국 근대화 과정에서 봉세관과 천주교회로 상징되는 외래문화와 제주토착민의 극단적인 문화·종교 충돌로 빚어진 총체적인 사건이다. 제주의 유교문화집단과 무당·기녀·기층민 등 무교문화집단은 천주교를 무력을 갖춘 외부 침략세력으로 규정했고, 선교사들은 도민을 야만인으로 규정하고, 제주인의 유교 제례와 무속신앙을 이단으로 배격했다.
나아가 교회는 현지 관청과도 대립해 재판 결과나 명령을 무시하는 일이 잦음으로써 토착민과 유교측을 모두 대항세력으로 만들어갔다. 이같이 제주민란의 이면엔 기존 향권(鄕權)을 위협하는 외래적 요소인 천주교에 대한 문화·종교적 반감이 깔려 있다. 이런 가운데 외부 봉세관의 독점적 징세권 행사에 대해 지방관·향임층·향리층 등 기득권자가 반발하고, 기층민들이 생존권 수호를 위한 저항으로 중첩되면서 교회와의 전면전으로 확산됐다.
덧붙이는 글 | <참고>
민란(民亂)이란=민의 반란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조선시대 사회운동은 흔히 지배층 내부에서 발생했을 때는 변(變), 피지배층이 일으켰을 때는 난(亂)이라고 불렀다.
정변(政變), 반정(反正) 등은 오늘날 용어로는 쿠데타에 해당된다.
반면 민란(民亂)은 대부분 농민들이 주체가 되어 일으킨 저항운동이지만, 명칭은 주동자, 또는 장두의 이름을 따서 붙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실제로 민란을 살필 때는 가장 많이 참가한 세력 집단의 특성과 그들의 요구 사항이 무엇이었는지를 주목하는 것이 중요하다.(주=조성윤 제주대 사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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