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 정세가 꽁꽁 얼어붙고 있다. 부시 행정부 출범 이후 한반도 평화프로세스가 전반적으로 교착상태를 벗어나지 못한 것은 사실이지만, 최근 일련의 상황은 우려의 수준을 넘어서고 있다.
6차 남북장관급 회담이 결렬된 이후 생물무기금지협약(BWC) 회의에서 존 볼튼 미 국무부 차관의 북한 생물무기 위협 제기, 부시 대통령의 대북경고, 휴전선 총격사건, 북한-이집트 중거리 미사일 수출 밀약설, 남한 국방부의 국방강화 천명, 북한의 대남 비난 강화, 한미일의 북한 조기 핵사찰 수용 촉구, 대북적대정책에 대한 북한의 대응책 천명, 총련 압수수색에 대한 북일간의 신경전 등 한반도가 예측불허의 상태로 빠져들고 있는 것이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남북, 북미, 북일 등 관련 당사국간의 대화조차 중단되고 있고, 한미일의 대북정책 공조도 부시의 행정부의 강한 입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와중에서 남북관계 개선을 통해 북미관계 개선을 기대했던 남북한 정상의 구상은 근본적인 벽에 부딪히고 있고, 북은 남의 대미종속성에, 남은 북의 남북대화 기피에 실망감을 드러내고 있다.
이렇듯 의도하든 그렇지 않든 잇따른 악재가 계속 터지고 대화 창구마저 닫힌 상황에서 가장 우려되는 것은 북한 핵문제를 놓고 북미간의 갈등이 증폭되고 있다는 점이다. 94년 한반도를 전쟁위기로까지 내몰았던 북미간의 갈등은 제네바 합의를 통해 문제해결의 길로 접어들었으나, 부시 행정부의 강한 대북불신 및 일방주의적 태도와 경수로 완공 지연 불가피 등으로 한반도 문제의 '핵'으로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또 다시 등장한 북한 핵문제
당초 2003년까지 예정된 경수로 완공이 2007년 이후에나 가능해질 것으로 전망되면서, 부시는 북한의 조기 핵사찰 수용을, 북한은 전력 손실분 보상을 요구하고 있다. 부시 행정부는 북한이 제네바 합의 이전, 즉 과거 핵활동을 통해 1-2개의 핵무기를 만들 수 있는 무기급 플루토늄을 보유한 것으로 보고, 조기 핵사찰을 요구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부시가 말한 '제네바 합의의 이행 개선'이다.
그러나 북한의 과거 핵활동에 대한 사찰은 경수로가 거의 완공된 이후 주요 부품 인도 이전에 받기로 돼 있으므로 부시의 요구는 제네바 합의를 넘어선 것이다. 미국과 IAEA는 핵사찰을 하는데 3년 정도의 긴 시간이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이제는 때가 됐다'는 논리를 펴고 있으나, 경수로 지연에 따른 전력 손실분에 대한 방안은 내놓지 않고 있다.
이에 따라 북한은 부시 행정부의 요구를 '강도적'이라고 비난하면서,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는 더 이상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다"며 대응책을 취해 나갈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다. 북미간에 인식 차이를 좁히지 못한 채, 미국이 계속 조기 핵사찰 수용을 압박하고 북한이 이에 맞서 핵동결을 해제할 경우 상황은 파국으로 치닫게 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이 문제를 어떻게 풀어야 할까? 가장 현실적인 대안은 북한의 조기 핵사찰 수용과 한미일의 전력 손실 보상이라고 할 수 있다. 경수로 사업이 지연된 이유는 미국측의 무성의한 태도가 근본적이기는 하지만, 김영삼 정부의 대북강경책, 98년 금창리 핵의혹과 광명성 1호(대포동 미사일) 발사를 이유로 일본의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KEDO) 분담금 납부 지연, 북한의 한국형 경수로 거부와 임금 인상 요구 등이 복잡하게 맞물린 것도 사실이다.
따라서 한미일은 일방적으로 조기 핵사찰 수용을 압박만 할 것이 아니라, 북한에게 절실한 전력 손실 보상을 어떻게 해나갈지 대안도 마련해야 할 것이다. 문제를 풀려고 하는 의지만 있다면, 전력 손실 보상은 그리 어렵지 않다. 미국의 경우 경수로 완공 때까지 지원하기로 한 중유의 지원량을 연 50만톤에서 2-3배 가량 늘리고, 추가 비용을 일본과 분담하는 방안을 강구할 수 있다.
위기는 곧 기회임을...
남한의 경우 작년에 북한에게 약속했다가 미국의 반대로 무산된 바 있는 전력지원을 경수로 사업 지연에 따른 전력 손실 보상의 한 방안으로 강구할 수 있을 것이다. 미국이 남한의 대북전력지원을 반대하는 이유는 대북전력지원이 북한의 핵동결과 한미일의 대체전력지원을 골자로 한 제네바 합의 이행에 차질이 생길 수 있다는 것 때문이다.
따라서 대북전력지원을 제네바 합의 '밖'의 사업이 아닌, 이미 차질이 생긴 제네바 합의를 되살리기 위한 하나의 '대안'으로 접근할 경우, 미국 정부를 설득할 수 있는 명분을 가질 수 있다.
이러한 방안은 또 다시 불거지고 있는 북한 핵문제를 수습할 수 있는 현실적인 방안이자, 남북관계 경색을 풀 수 있는 효과도 가져올 수 있다. 잘 알려져 있듯이 북한이 남북대화에 소극적인 태도로 바뀐 결정적인 이유 가운데 하나는 남한이 약속한 전력지원의 무산 때문이다. 이 일로 인해 북한은 남한 정부의 대미 자율성에 극히 회의감을 갖게 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경수로 사업 지연에 따른 전력 보상의 차원에서 추진되는 대북 전력 지원은 개성 공단 사업을 비롯한 남북경협 활성화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가져올 수 있다. 금강산 관광사업에 이어 남북한이 야심있게 추진해온 개성공단 조성 사업은 전력 지원 무산과 함께 흐지부지되고 있다. 미국의 보수적인 연구기관인 국제전략문제연구소(CSIS)에서도 최근 '2001년 3,4분기 남북관계 분석 및 향후 전망'이라는 보고서에서 "개성 산업공단은 남북한 양측에 경제적으로나 군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며 "전력 지원 없이 이 사업은 불가능하다"고 강조한 바 있다.
무엇보다도 지금 한반도는 대화와 타협을 통해 문제를 푸는 선례를 남기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다. 여러 가지 악재가 계속 터지고 있는 가운데, 상호간의 불신이 증폭되고 있는 상황이 지속될 경우 한반도의 정세는 통제불능의 상태로 빠져들 수 있기 때문이다.
김대중 정부의 대북정책은 적극적인 남북화해협력의 추진과 한미일 공조를 기반으로 삼고 있다. 이는 정책의 타당성과 추진력에 대한 자신감에 바탕을 둔 정책이라고 할 수 있다. 시간이 갈수록 그 추진력이 떨어지고 있는 대북정책의 활기를 되찾기 위해서는 다시금 한반도 문제의 중심으로 부각되고 있는 북한 핵문제와 전력문제를 합리적으로 푸는 것에서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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