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이 주는 상' 거부 논란 계속

심사위원 중 한 명도 <안티조선>

등록 2001.12.13 20:00수정 2001.12.14 15:54
0
원고료로 응원
"올해 평론가상은 해당 작품이 없었습니다."

12월12일 오후 8시10분경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에서 열린 제22회 청룡영화상(이하 청룡상) 시상식의 사회를 맡은 영화배우 이병헌 씨는 짧은 멘트로 영화평론상 수상자가 없음을 주지시켰다.

이로써 94년 이후 '중견 영화평론가' 수상자를 배출해온 '정영일 영화평론상'의 맥은 8회만에 끊어졌다. 그 동안의 수상자들은 김종원, 변인식, 안병섭, 강한섭, 이영일, 양윤모, 유지나 (이상 상 받은 순) 등 쟁쟁한 평론가들이었다.

그러나 올해 수상자를 선정하지 못한 이면에 수상자로 거론되던 평론가 박평식 씨의 '수상 거부' 선언이 적잖은 영향을 미친 것으로 알려져 묘한 파장을 일으켰다. 더구나 박씨는 상의 후원사가 <조선일보>라는 점을 거부 사유로 들었고, 심사위원 중 한 명이 <안티조선> 영화인이었다는 사실이 뒤늦게 알려져 영화계에 '안티조선' 논쟁의 기폭제가 되고 있다.

시상식은 끝났지만, 논란은 여전히 남아 있다. "수상자로 내정됐다는 전화 통지를 받고 고사의 뜻을 전했다"(박평식), "수상자를 정하지 않은 상태에서 실무자가 실수한 것"(스포츠조선)이라는 양측 주장이 팽팽하게 엇갈리고 있기 때문이다.

양측 말이 다른 이유를 규명할 수 있는 열쇠는 청룡상 심사위원단이 쥐고 있다. 올해 심사위원단은 심사위원장 윤정희(영화배우) 씨를 비롯, 강한섭(영화평론가, 서울예대 교수), 김유진(영화감독), 박용재(스포츠조선 문화부장), 변재란(영화평론가, 순천향대 교수), 신경숙(소설가), 윤석화(연극배우), 이광모(영화감독), 장기오(KBS PD) 이상 9명으로 구성됐다.

그러나 이광모 감독은 "심사위원들이 일주일 내내 모여서 각 부문 수상자들에 대한 논의를 계속했다. 평론상에 대한 심사도 같이 했지만, 수상자 결정은 강한섭, 변재란 두 분에게 위임하는 분위기였다"고 말했다.

수상자 결정 과정에 대해 강 교수와 변 교수 모두 "수상을 타진한 후보는 박씨 이외에도 2명이 더 있었다"고 밝히고 있다. 강 교수는 "각 언론사 영화담당 기자 등 영화평론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많은 상황에서 '평론상은 평론가들에게만 돌아가는 상'이라는 비판론이 많았던 게 사실"이라며 "그러나 '일단 만들어진 상이니 줘야 하지 않나'하는 의견이 많아서 박씨를 포함, 3명의 후보를 압축해서 각자에게 수상 의사를 타진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강 교수는 이례적으로 심사 막판까지 수상자를 결정하지 못한 배경에 대해 "심사를 하는 동안 일부에서 제기하는 '안티조선' 운동이 청룡상에까지 연결될 것을 우려했다. 영화평론가들 중에도 '안티조선'을 표명하는 사람이 많지 않은가? 행여 불미스런 일이 있을까봐 심사에 신중에 신중을 거듭했는데 박씨가 '상을 받지 않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다른 사람에게 남이 거부한 상을 주는 것도 어색하다는 의견이 모여 수상자가 없는 것으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변 교수는 "주최측인 <스포츠조선>의 준비 소홀이 문제를 일으킨 측면도 없지 않다"고 지적했다.

변 교수는 "9일 <스포츠조선>측으로부터 '평론상 수상자를 결정해야 하니 후보를 추천해달라'는 얘기를 듣고 3명을 추천했지만, 그때까지도 <스포츠조선>측이 후보자 선정에 필요한 자료들을 제공하지 않은 상태였다. 그런데 후보 중 한 명이었던 박씨가 상을 안 받겠다고 했고, 다른 후보들도 이러저러한 사정으로 상을 주기 힘든 상황이 됐다.

11일 시상식 전까지 수상자를 결정하기 어려워진 상황에서 심사위원단이 '꼭 수상자를 결정해야 하냐'고 묻자 <스포츠조선>측에서 '굳이 그럴 필요 없다'고 답했다"고 상황을 전했다. 변 교수는 "수상 거부는 박씨 개인의 자유라 뭐라 탓할 수는 없지만, <스포츠조선>측이 박씨 행동에 당황했을 것"이라고 의견을 덧붙였다.

이같은 두 사람의 해명에 대해 박평식 씨는 섭섭함을 감추지 않고 있다. 박씨는 "사무국 직원으로부터 영화평론상 수상자로 결정됐으니 11일 오후2시 조선일보사 2층 시상식에 참석해달라는 통지를 분명히 받았고, 통화내용이 녹음되어 있다"며 "시상식 하루 전에 수상자에게 통지하는 것은 상식적인 관행 아니냐"고 반문했다.

"시상식 하루 전 수상자 통지는 관행 아닌가?"

설사 심사위원들의 해명을 받아들인다고 해도 유력한 수상후보에 오른 영화평론가가 공개적으로 "상을 받지 않겠다"고 선언한 것은 영화평론상, 나아가 청룡상의 존폐 논쟁에 불을 지핀 것으로 해석된다.

한 가지 재미있는 것은 변재란 교수의 경우 지난 9월20일 '안티조선' 4차 선언에 영화인들 중 한 사람으로 참가한 사람으로서 청룡상 심사위원으로 위촉됐다는 사실이다. 다음은 '조선일보 후원 영화상'의 심사위원직을 수락한 '안티조선' 영화평론가와의 일문일답.

- '안티조선' 선언에 참여한 영화인으로서 청룡상 심사위원을 수락한 이유는.
"심사위원 제의를 받고 많은 고심을 했다. 한때 고사할 생각도 있었다. 그럼에도 수락한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는 개인적인 이유다. 지방에서 교편을 잡다보니 한국 영화는 비디오 등으로나 볼 수 있었다. 1주일간 여유를 내 한 해의 한국영화를 집중적으로 조망할(overview)할 기회를 잡고 싶었다.

둘째, 주변에 물어보니 '<조선일보>는 <조선일보>이고, 영화상은 영화상 아니냐'라는 의견이 많았다. 지난 4월 대종상 시상식 결과에 대한 여론도 안 좋은 상황에서 청룡상은 제대로 치러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 '안티조선' 선언에 참여한 다른 영화인들이 섭섭해할텐데.
"소박하게 참여한 것이 경솔한 행동으로 비춰질까 염려도 된다. '안티조선'에 동조하는 입장에서 참여 영화인들과 내부적인 논의를 충분히 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유감스럽게 생각한다."

"소박한 참여가 경솔하게 비춰질까 염려"

- 영화인 명계남 씨가 시상식 당일 '청룡상 거부하자'는 주장을 온라인상에서 펼치기도 했는데.
"나는 명계남 선생님의 글을 이메일로 받았다. 그러나 '청룡상 거부 운동'을 하려면 장기적으로 해야지, 시상식을 앞두고 급작스럽게 할 수가 있는가 하는 것이 내 생각이었다. 어쨌든 청룡상을 둘러싼 논란을 떠나 심사는 공정히 치러졌다고 자부한다."

- 조선일보가 운영하는 영화상에 대한 곱지 않은 시선이 많다.
"청룡상도 미국의 아카데미상처럼 영화상 조직위를 자체적으로 만들고 장기적으로 스폰서로부터 독립되는 형태로 바뀌어야 한다."

변 교수는 "내년에도 심사위원 직을 제의받으면 다시 할 생각이 있는가"라는 질문에는 "(내년은) 생각을 좀 해봐야겠다"고 답해 여운을 남겼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AD

AD

AD

인기기사

  1. 1 "연봉 천만원 올려도 일할 사람이 없어요", 산단의 그림자
  2. 2 은퇴 후 돈 걱정 없는 사람, 고작 이 정도입니다
  3. 3 구강성교 처벌하던 나라의 대반전
  4. 4 왜 여자가 '집게 손'만 하면 잘리고 사과해야 할까
  5. 5 [단독] "문재인 전 대통령과 엮으려는 시도 있었다"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