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백년만의 만남, 닷새만의 헤어짐

송광사 여름수련회 수행기 17

등록 2001.12.26 12:25수정 2001.12.26 1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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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계식이 시작되었다. 수계식을 진행하시는 스님들은 "계율을 완벽하게 지키지는 못하더라도 그것을 목표로 삼아라"고 부담을 덜어주었지만, 나는 엉겁결에 또 지키지 못할 약속을 했다.


연비를 하고 법명을 받았다. 법명은 '심원(深源)'이었다. 많고 많은 법명 중에 심원이라니! 우리 집안은 전주 이씨 효령대군파에서 나누어진 주계군파(朱溪君派)에 속한다. 주계군은 이심원(李深源; 1454-1504)의 시호이다. 그는 김종직 선생의 문인으로 성종의 신임을 받았다. 그러나 고모부인 임사홍(任士洪)의 무고를 비판하다가 오히려 그의 모함을 입어 귀양을 가게 되고, 결국 1504년 갑자사화 때 두 아들과 함께 죽임을 당했다.

나는 내 공부를 위하여 남의 족보를 자주 뒤지기는 했지만 정작 우리 집 족보에 대해서는 그리 큰 관심을 갖지 않았다. 나를 후손으로 생각하시는 선조들께는 큰 죄를 지은 것이다. 그러나 족보와 보학이 수많은 사람들을 옭아매고 그 가슴에 못을 박는 것을 자주 보았기 때문에 우리 족보에는 집착하지 않기로 했다.

그렇지만 올곧은 삶을 살아가려다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했던 직계 선조 주계군의 행적들을 읽노라면, 비록 그 분이 나의 현재 실존과 직접적인 관련은 없지만, 후손으로서의 회한이 없을 수가 없었다. 나는 그분의 고단한 삶에 대해 경배했다. 그리고 그분을 내 마음 속의 선조로 모시게 되었다.

우리 문화의 전통은 선조의 함자를 부르는 것조차 기피하게 한다. 하물며 선조의 함자를 자기의 이름으로 삼는다는 것은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 아닌가. 불가에서 법명으로 삼을 수 있는 것이 수천 종이 넘을 것인데, 그중 '심원'이란 법명이 수련생 수인 120개 속에 들어갈 확률은 대단히 낮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다시 나의 법명으로 지명될 확률은 1/120이다. '심원'이 나의 법명으로 지명되는 것은 불가능한 일에 가까울 것이라 하겠는데, 그 일이 이루어진 것을 확인한 나는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다. 그러면서도 인연의 당김이 얼마나 끈질기고 강렬한가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500 년 전에 사셨던 아득한 선조와의 인연으로 나에게 명명된 '심원'이라는 법명. 그러나 나는 결코 그것을 다시 입에 담을 수가 없을 것이다.


수계식을 마치고 점심 공양을 하고 가라는 스님들의 인정을 마다할 수 없어 식당으로 갔다. 이미 긴줄이 만들어져 있었다. 그 앞으로 수녀님이 지나갔다. 수녀님은 밝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지난 밤 '차 한잔을 마시며' 시간에 겪었던 일을 수모로 받아들이지 않는 영혼의 넉넉함을 지니고 계신 것 같았다. 성직자의 깊고 그윽한 마음가짐이란 속인으로서는 짐작하기 어려운 것이니, 나는 가슴 졸이며 수녀님이 말을 잘 마무리하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기도드린 게 겸연쩍어졌다.

밥을 받아 식탁에 앉았다. 맞은 편에 두 사람의 여성이 뒤따라 앉았다. 스카프 사건으로부터 시작하여 지도법사로부터 갖가지 지적을 받아 나로 하여금 계속 조마조마하게 했던 여자 도반과 그 친구인 듯한 여성이었다. 내가 잠시라도 그녀 때문에 부담감을 느꼈고 또 때로는 그녀가 일으키는 분잡함 때문에 안스러운 마음을 가졌다면 그것도 업을 만든 것이리라.


잠깐 동안의 업이 이렇게 점심 공양 자리를 함께 하도록 한 것일까. 그 자리에서 몇 마디 말로써 맺힌 업을 풀 법도 했지만 어떤 대화의 실마리도 찾지 못했다. 나는 내가 이 식당에서 그녀와 겸상을 하게 된 그 오묘한 이끌림에 대해 감복하면서 공양을 마쳤다.

해우소를 나오는데 용맹정진하던 젊은 여자도반을 만났다. 그녀는 먼저 웃으며 "안녕히 가세요"라 인사했다. 내가 그녀의 정진을 축원해 준 것을 느껴서일까. 그 얼굴을 보니 내 마음도 기뻤다. 나도 돌아가서 그녀의 그 모습을 떠올리며 용맹정진할 것을 다짐했다.

종무소 앞에서는 솔선하여 해우소 청소를 잘 하던 도반을 만났다. 개량한복을 말끔히 입고 있었다. 그 옆에 서 있는 분은 부인인 듯했다. 먼저 인사하며 부부가 함께 왔느냐고 물으니 그렇다 하길래, 그러면 어제 '차 한 잔을 마시며' 시간에 왜 호명되지 않았을까 하니 좀 섭섭한 표정으로 "괜찮습니다"했다.

어제 그 시간에는 부부가 함께 온 경우 대부분 호명되어 금슬을 과시했다. 해박한 불교지식과 다양한 수행경험을 가진 그 분이야말로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었을 터인데 그렇지 못했으니, 그 분 역시 좀 아쉬워하는 것 같았다.

그 외 최고령 남자 도반이 싱글벙글 가족과 함께 내려가는 것을 보았고 머리를 여자처럼 길게 땋은 남자 도반도 만났다. 그러니 수련 도중 내 마음 속에 흔적을 깊게 남긴 거의 모든 도반들을 대웅전 근처에서 다시 만났다. 그래서 말로든 마음으로든 작별의 인사를 보낼 수 있었다.

그러나 고의는 아니었지만 내 앞에서 내 수행의 방해자 노릇을 했던 그 부산 출신 남자 도반을 다시 만나지는 못했다. 그와 나는 마주 보고 앉았지만 한 마디 말을 나누기는 커녕 눈도 맞추지 않았음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참 무심했다. 그는 자기 때문에 내 마음 속에 회오리가 일어난 사실을 짐작하였을까. 혹 그는 자기 때문에 초래된 나의 고충을 정확하게 알아차리고 떠난 것은 아닐까. 꼭 작별인사만은 했어야 했는데 그러하지 못한 게 마음에 계속 걸렸다.

대웅전에 들러 부처님께 하직 인사를 올렸다. 그냥 돌아나오려는데 복전함이 눈에 들어왔다. 스님들이 책 사 볼 돈도 없다는 지도법사의 말씀이 떠올랐다. 책값으로 복전함에 돈을 넣었다.

산문 쪽으로 걸어가는데도 졸음이 몰려왔다. 전나무 숲은 여전히 물기를 머금고 있었다. 젊은 부부가 아이의 손을 잡고 올라오고 있었다. 그제서야 두고 온 아이 생각이 났다. 산문 입구 기념품 가게에 이르렀다. 어느 절 앞이고 진열되어 있는 물건에는 차이가 없었다. 목탁이 눈에 들어왔다. 청음이 뛰어난 우리 아이가 목탁 소리를 좋아할 것 같았다. 목탁은 클수록 가격도 비쌌다. 중간 쯤 되는 목탁을 샀다.

남해고속도로는 올 때와 마찬가지로 한적했다. 졸음을 물리치기 위해 섬진강 휴게실에 들렀다. 화장실로 갔다. 오줌을 누고 손을 씻는데 거울에 내 얼굴이 나타났다. 수행기간 내내 한 번도 보지 못한 얼굴이었다. 닷새만에 보는 내 얼굴. 아! 맑고 밝은 얼굴. 내 얼굴이 저렇게 달라지다니. 눈망울이 초롱초롱했다. 신기해서 한참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얼굴빛이 창백하게 여겨질 정도로 맑았다. 육식을 피하고 마음을 맑게 해서 그럴 것이겠지 했다. 약간의 현기증을 느끼며 밖으로 나가 의자에 앉았다.

차 한 대가 저쪽에 멈추더니 중년 남자가 내려서 이쪽으로 걸어왔다. 어렴풋이 얼굴을 알아볼 수 있을 즈음에 나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다. 아차 생각이 들었다. 조금 뒤 화장실에서 나오는 그 남자를 다시 보았다. 내가 먼저 아는 체 인사하니 "아이고 여어서 만나네예" 했다. 정다운 부산 사투리였다.

금단현상으로 내 앞에서 닷새 동안 온몸을 비틀어대던 바로 그 도반이었다. 나는 그때까지 술에 찌들어 거무티티한 그의 얼굴을 기억하고 있었다. 수행 중 그의 몸부림이 의식되자 그 얼굴을 한번 보고는 계속 외면했었다. 닷새만에 보는 그 얼굴도 놀랄 정도로 달라져 있었다. 시련을 이겨낸 사람의 따뜻한 미소가 그 맑아진 얼굴에서 일고 있었다.

그분에게 닷새는 진정 고난의 시간이었을 것이다. 몸부림치며 그래도 오늘까지 견뎌온 그의 노고를 나는 그 누구보다 잘 알기에 그에게 진정한 축하의 마음을 보낼 수 있었다. 그는 행복해진 것 같았다. 나는 더 이상 말을 걸지 않았지만 그가 술의 마수에서부터 해방될 수 있기를 진심으로 축원해주었다.

수련회가 끝난 뒤 내가 이런 분들을 이어서 만났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수행기간 중 내 눈에 포착되어 내 마음 속에 특별하게 각인된 도반 모두를 일부러 찾아다니지도 않았는데 다시 만난 것이었다. 수련기간 중 내 마음에 걸린 가시와 같은 업을 해소할 수 있는 기회를 누군가가 주신 것일까. 아니 내 마음가짐의 힘은 그렇게 당장 분명하게 나타났던 것이다. 내가 지금까지 지은 업을 지우기 위해서는 송광사에서의 닷새 동안 지은 업부터 먼저 지우라는 가르침인지도 몰랐다.

부처님이 당신의 얼굴로써 녹야원에 모인 사람들에게 득도를 증명한 감동적인 장면이 떠올랐다. 나도 이렇게 맑고 밝아진 얼굴을 간직하면서, 혹은 한때 내 얼굴이 이렇게 맑고 밝아진 사실을 기억하면서, 이 세상 사람들에게 위안과 기쁨을 주리라. 험상궂은 표정은 거친 말이나 행동 못지 않게 남을 괴롭히고 이 세상을 어둡게 만든다는 것을 환기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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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대학교 국어교육과에 재직하고 있으며, <<젖병을 든 아빠, 아이와 함께 크는 이야기>>(돌베개), <<한국야담연구>>(돌베개), <<조선시대 일화 연구>>(태학사), <<보이는 세상 보이지 않는 세상>>(보림), <<말이 없으면 닭을 타고 가지>>(학고재) 등을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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