촛불 앞에 선 아이들의 반성과 소망

아이들이 준비한 촛불의식

등록 2001.12.27 10:48수정 2001.12.27 1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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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눈발이라면/ 허공에서 쭈빗쭈빗 흩날리는 /
진눈깨비는 되지 말자/ 세상이 바람 불고 춥고 어둡다 해도/
사람이 사는 마을 / 가장 낮은 곳으로 /
따뜻한 함박눈이 되어 내리자 / 우리가 눈발이라면/
잠 못 든 이의 창문 가에서는/ 편지가 되고 /
그이의 깊고 붉은 상처 위에 돋는 / 새 살이 되자

(안도현 '우리가 눈발이라면')

중학교 1학년 교과서에 실린 안도현의 시다. 눈이 오지 않은 날에 이 시를 읊으면 눈 앞에 눈이 보이고 가슴이 따뜻하다.

겨울방학을 앞둔 아이들은 눈오는 날 강아지에 비할 바가 아니다. 풀풀 휘날리는 눈발에도 나가 놀자며 아우성을 치는 아이들. 녀석들은 기말고사를 마치고 참 많이도 보챘다. 눈만 오면 나가 놀자던 약속이 눈이 오지 않아 한 번도 실행에 옮겨진 적이 없었기 때문. 아직 수업 진도는 남아 있었지만, 아이들이 방학식을 하기 전에 뭔가 한 해를 잘 갈무리할 수 있는 일이 없을까 생각해보았다.

마냥 철이 없는 녀석들. 수업 시작종이 쳤어도 5분 이상이 흘러야 저마다의 자리로 돌아와 앉는 아이들. 방금 야단을 맞고도 헤죽거리며 사랑한다고 재잘되는 아이들. 녀석들의 몸살에 금방이라도 정신을 놓을 것만 같던 시간도 지났다.

초등학생을 대하고 있는 듯한 아이들에게 대뜸 초 한 자루와 누군가에게 편지 한 통을 써오라는 말을 해놓고도 녀석들이 미심쩍어 매번 당부를 해야 했다. 녀석들은 준비물을 잊었을 때 전혀 그 말을 들은 적이 없다며 시치미를 떼기 때문이다. 그도 그럴 것이 평소 수업태도가 좋은 녀석들마저 함께 합세하면 바보가 되는 건 쉽다.

하여 수업을 앞두고 각 반에 국어부장을 비롯해 한 시간을 잘 꾸려갈 만한 아이들을 2명씩 불렀다. 어떤 반은 여자 둘, 어떤 반은 남자와 여자 각각. 뜬금없다는 듯 왜 불렀냐고 난리다. 촛불의식의 프로그램을 나름대로 짜보라했더니 못한다면서 그걸 왜 하냐고 한다. 초가 우리에게 주는 내용과 한 해를 잘 마무리해보자는 의미라고 말해줄 때까지 아이들은 시끌벅적. 각자 돌아가는데 내심 조바심만 났다.

아니나 다를까. 아이들은 책상을 동그랗게 하고 앉아서 불도 붙여주지 않았는데도 촛불을 켰다껐다 야단법석이다. 어두컴컴한 교실. 결국 네 반 중 세 반은 겨우 십여 분 정도 촛불의식을 치렀을 뿐이다.


아이들의 절반은 콧바람을 불어서 촛불을 꺼뜨리고는 그것도 모자라 옆 친구의 촛불까지 끄려고 덤비고 그 와중에 사회자는 한 해 동안 반성과 내년의 계획을 말하라 하지만 모두들 손에 쥔 카드만 바라볼 뿐 누구 하나 나서지 않는다.

답답함과 미움(?)이 함께 일어났지만 어쩌랴. 이미 사회를 맡겼으니 그들 모습 그대로 지켜볼 수밖에. 끝나는 종이 울리자 그제서야 손을 드는가하면, 우왕좌왕 일어서는 아이들. 사회를 맡은 아이들이 와서 실망하셨죠 한다. 살포시 웃어주며 "어쩌겠니 이것이 너희들 진짜 모습인 걸"했더니 힘없이 웃고 만다.


1-7반. 수업시간 협동심이 좋아 늘 분위기가 좋았던 반이다. 촛불의식 또한 알차게 이뤄졌다. 물론 촛불 장난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너무나 진지해 촛불 장난이 계속될 수는 없었다. 여자 아이들이 드센 반이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한 해 반성을 하는데 그 동안 여학생을 못살게 굴었던 한 아이이 여지없이 심판대에 올랐다. 하지만 녀석은 미안하단 말 대신 고개를 이리저리 굴리며 입술만 깨물고 있었다. 얼마 동안의 침묵이 흐르고 아이들은 저마다 준비한 말들을 잊지 않고 했다.

대부분 고맙다는 이야기. 그 가운데에는 학기 시작하면서 하마터면 더 나쁜 길로 빠질 뻔했는데 도와준 친구에게 고맙다는 말을 잊지 않았는데 모두들 아는 터라 우와 하는 함성까지 질러준다.

끊임없는 친구의 격려와 배려로 하나가 되는 아이들. 가끔은 시기질투에 욕도 하고 때리기도 하지만, 이렇듯 아이들은 촛불 앞에서 진실해진다. 꼭 촛불이 있어서 그랬을까. 원래 아이들의 마음은 촛불처럼 나보다는 친구가 더 빛나기를 바랬는지도 모른다. 비록 덜 준비되고 서투른 진행이었지만 한마디 한마디 넘어갈 때마다 좀더 지켜볼 필요가 있는 아이들이란 생각이 깊이 들었다. 지금 이 모습이 하루 아침에 바뀔 순 없을테니까.

촛불을 앞에 두고 선 아이들. 의식이 끝나자 언제 그랬냐는 듯 자리를 향해 뿔뿔이 돌아간다. 녀석들 말대로 내년엔 그 계획들을 다 만들어 갈 수 있을까.

"올 한 해는 떠들고 장난만 하고 공부는 잘 안 했는데 내년에는 더 열심히 하겠습니다."
"친구들과 사이좋게 지내지 못했는데 내년에도 한 반이 된다면 더욱 열심히 놀고 공부도 잘하겠습니다."
"올해는 엄마 속 많이 썩이고 놀기만 했는데 내년에는 공부도 열심히 하고 엄마 말씀도 잘 듣고 선생님 말씀도 잘 듣겠습니다.'
아이들의 반성과 소망이다.

녀석들이 돌아나간 자리엔 촛농이 가득하다. 훤한 대낮에 주름막까지 치고 대체 뭘 하자는 거냐고 하던 녀석들. 서른 다섯 명 가운데 몇 명은 알겠지. 매끈하게 프로그램을 짜서 건네주기보다 녀석들 힘으로 어설프게 해보는 촛불의식. 한 번 해보았으니 다음 번엔 스스로 해를 마무리하거나 해를 시작할 때 잘 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초를 부러뜨리고 촛불을 꺼뜨리고 촛농으로 여기저기 글씨를 쓰고 우왕좌왕 친구들의 이야기를 듣는 둥 마는 둥했지만 그 시끄러움 속에서 촛불의 의미와 침묵이 얼마나 소중한지에 대해 배웠으면 하는 바람이다.

하늘에서 진눈깨비가 흩날리고 아이들은 교실 환기를 위해 문을 열었다. 입김으로 유리창이 하얗게 질린다. 그 위에 '사랑한다'는 말을 쓰고 손을 모아 사랑 표시를 하는 아이들이 보인다. 핸드폰을 꺼내 전화번호를 입력하고 쪽지를 꺼내 이메일 주소를 적고 빨갛고 초록빛깔의 카드 봉투를 수줍어하며 손에 쥐어주고 가는 아이들.

겨울 방학이다. 소복소복 쌓이는 가슴 따듯해지는 함박눈을 기다려본다.

덧붙이는 글 | 겨울 방학 동안 녀석들의 키가 자라고 가슴이 자라고 그래서 밑이 단단해지길 바란다. 머리만 커질 것이 아니라 가슴이 따뜻하고 언제든지 두 손 내밀면 맞잡을 수 있길.

덧붙이는 글 겨울 방학 동안 녀석들의 키가 자라고 가슴이 자라고 그래서 밑이 단단해지길 바란다. 머리만 커질 것이 아니라 가슴이 따뜻하고 언제든지 두 손 내밀면 맞잡을 수 있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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