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당 내부거래와 선단식 경영에 쐐기

수원지법에서 계란이 바위를 깼다

등록 2001.12.28 04:05수정 2001.12.30 1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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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이상 재벌 총수의 거수기 노릇은 안된다"

ⓒ 오마이뉴스 이병한
"재벌의 부당 내부거래는 공정 경쟁을 막아 자본주의 발전에 암적인 존재였다. (중략) 이번 판결이 대법원에서 확정된다면 설사 그룹 오너의 입장을 대변해 이사들이 거수기 역할을 했다 할지라도 거액의 감당할 수 없는 책임을 물게 된다는 것을 경고하고자 한다...

정권에 거액의 비자금을 조성, 제공해서 그룹 전체적으로 이익을 봤다고 하더라도 정상적인 법 테두리를 벗어난 경영 행위는 처벌받아 마땅하다."(수원지방법원 제 7민사부 김창석 부장판사)


삼성 재벌의 전·현직 임원 9명에게 부실 기업 인수, 주식의 저가 매각 등으로 회사에 손해를 입힌 책임을 물어 902억 원을 삼성전자에 배상해야 한다는 판결이 나왔다.

또 지난 1988~92년까지 당시 노태우 전 대통령에게 삼성전자 자금 75억 원을 뇌물로 줬던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은 이 돈 모두를 회사인 삼성전자에게 물어내야 한다는 법원의 판결도 나왔다.

특히 최근 정치권의 재벌 출자총액제한의 사실상 폐기 등 재벌 개혁의 후퇴 조짐을 보이고 있는 가운데 재벌의 부당한 내부거래와 선단식 경영 형태에 사법부가 단죄를 내려 향후 재벌 기업 운영에 상당한 파장이 예상된다.

사법부가 금융기관이 아닌 재벌 그룹 총수와 경영진의 뇌물 공여 행위와 계열사의 부당 지원 행위에 대해 경영진에게 개인적인 손해 배상 책임을 지운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27일 수원지법 민사7부(재판장 김민석 부장판사)는 박원순(45, 변호사) 씨 등 삼성전자 소액주주 22명이 주주대표로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과 김아무개(61) 씨 등 삼성전자(주) 전·현직 이사 10명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청구소송 선고 공판에서 "김 씨 등 이사 9명은 회사와 주주의 이익을 지켜야 함에도 이를 지키지 않은 점이 인정된다"며 "9명이 연대해 모두 902억8000여만 원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 수원지법 민사 7부가 27일 내놓은 판결문 일부 ⓒ 오마이뉴스 김종철


이어 재판부는 "이건희 회장이 지난 88년 3월부터 92년 8월까지 삼성전자에서 조성된 자금75억 원을 노태우 전 대통령에게 뇌물로 공여함으로써 삼성전자에게 상당한 손해를 입혔다"면서 "이 회장은 75억 원 전액을 배상할 책임이 있다"고 밝혔다.

소액주주 대표소송을 담당한 참여연대 김석연 변호사는 "오너 1인의 황제경영식 재벌 기업 경영에 대한 사법부의 의미 있는 판결"이라며 "재벌 총수의 거수기 노릇을 하는 경영진이 아니라 회사와 주주의 이익을 위해 소신있고 투명한 기업 경영이 될 수 있는 계기가 되는 사건"이라고 평가했다.

계란이 바위를 깼다-사법부도 단죄한 재벌의 부당내부거래

지난 98년 10월 소액주주 운동 차원에서 박원순 변호사 등 삼성전자 소액주주들은 이건희 삼성 그룹회장과 임원 등 모두 10명에 대해 삼성전자의 부당 내부거래 등으로 피해를 입었다며 모두 3500여억 원의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했다.<아래 표 참조>

이에 대해 재판부는 △지난 94년 삼성전자가 부실기업인 이천전기를 인수하면서 1904억 원의 손해를 끼쳐 문아무개 씨 등 8명의 이사가 276억 원 △김아무개 씨 등 5명의 이사는 같은 해 삼성종합화학 주식 2000만 주를 그룹 계열사인 삼성항공 등에 낮은 가격에 매각해 1480억 원의 손해를 끼쳤기 때문에 626억6000만 원을 연대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참여연대 소액주주들이 삼성전자 이건희 회장과 임원들에게 요구한 손해배상 청구액. 재판부는 이 가운데 중앙일보에 대한 부당지원은 인정하지 않았다.


수원지법 민사 7부 김창석 부장판사는 "재벌의 계열사간 부당내부거래는 자본주의 발전을 막는 암적인 존재"라며 "내부거래의 관행으로 그룹 전체의 이익이 된다고 하더라도 계열사는 주주들의 권익을 위해 계열사의 이익만을 추구해야 한다"고 밝혔다.

무엇보다 이번 재판부의 판결은 과거 재벌의 부실 계열사에 대한 출자 및 주식 등의 헐값 매각 등 계열사 부당지원 행위에 대해 공정거래위원회의 과징금 부과 등 행정처분에 그쳤던 것을 해당 경영진 개인에 대한 손해배상 책임을 물었다는 데 큰 의의가 있다.

특히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삼성전자가 부실 기업인 이천전기(주)를 인수하는데 충분한 검토 없이 이사회에서 1시간만에 결정한 것은 인수 결의에 참석한 이사들이 삼성전자 이익을 위해 적절한 판단을 했다고 도저히 볼 수 없다"며 재벌의 부실한 이사회 운영 형태에 일침을 가했다.

삼성종합화학 주식의 헐값 매각과 관련해서도 재판부는 "이 매각 결정 역시 단 1시간의 토론 끝에 종전 가격의 4분의 1 가격에 처분하기로 결의하였다는 것은 도저히 이사로서 주의 의무를 다한 것으로 볼 수 없다"고 강조했다.

참여연대는 이날 논평을 내고 "이천전기에 대한 출자 및 삼성종합화학 주식의 저가 매각과정에서 이사회가 합리적이고 충분한 검토를 하지 않은데 대해 재판부가 이사의 의무를 다하지 않았다고 판단한 것은 형식적으로 운영되고 있는 재벌기업의 이사회 운영에 경종을 울렸다"고 평가했다.

참여연대 경제개혁센터 김상조 소장은 "이번 판결은 소액주주라는 '계란'이 거대 재벌의 상징인 삼성이라는 '바위'를 깬 사건"이라며 "재벌의 부당한 내부거래와 선단식 경영 행태에 대한 엄중한 법의 심판"이라고 말했다.

▲ 올 3월 삼성전자 주주총회장에서 참여연대 쪽 주주들의 질문이 이어지자 윤종용 의장은 보고서를 들어보이며, "나 보고 지금 이 책을 다 읽으라는 거냐"고 말하고 있다.
ⓒ 오마이뉴스 노순택
몸통에게는 면죄부-이건희 회장은 부실 경영 책임 없다?

이번 재판부의 판결이 재벌 그룹의 부당 내부거래에 커다란 의미를 가지고 있음에도 삼성그룹의 오너이자 삼성전자 대표인 이건희 회장은 부실 경영에 대한 개인 배상 책임은 빠졌다.

재판부는 이 회장이 이천전기 인수와 삼성종합화학 주식 헐값 매각을 결정한 이사회에 참석하지 않았기 때문에 개인 배상 책임에서 면책됐다고 밝혔다.

하지만 그동안 국내 재벌그룹들은 재벌 총수와 보좌 역할을 하는 구조조정본부가 계열사의 경영에 구체적으로 개입, 전권을 행사하는 황제적 경영형태가 일반화 돼 있는 기업 현실을 재판부가 애써 외면했다는 지적이다.

또 현행 상법상 재벌 총수에 대해 사실상의 이사 제도가 도입돼 있는 상황에서 재벌 총수의 이사회 출석 여부를 책임 소재의 중요한 판단 기준으로 삼는다는 것에 재판부가 형식논리에 빠졌다는 비판이 일고 있다.

이건희 회장이나 이학수 구조조정본부장의 경우 삼성전자 이사 취임이후 지난 98년, 99년 단 한번도 이사회에 참석하지 않았기 때문에 출석 여부만을 배상 책임 소재로 삼을 경우 이들에게 부실 경영에 대한 책임을 묻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

참여연대 경제개혁센터 김은영 간사는 "이건희 회장과 이학수 구조조정본부장이 이사회에 출석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이번 판결 내용과 같은 중요한 의사결정에 이를 몰랐거나 사전에 승인을 하지 않고 이사들의 독자적인 판단을 했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납득되지 않는다"고 밝혔다.

따라서 참여연대는 재판부의 이번 판단이 상법상의 사실상 이사 제도를 무력화 시키는 것이고 재벌 총수 및 구조조정본부에 면죄부를 주는 것이나 다름없다고 밝혔다.

너무하는 것 아닌가?...삼성 등 재계, 우려와 반격

법원의 이번 판결에 대해 삼성 쪽의 공식적인 입장은 '법원의 판단을 존중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일부에서는 이사진의 경영상의 판단에 대해 사법부가 너무 가혹한 게 아닌가라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 올 3월 삼성전자 주주총회가 열리고 있는 호암아트홀 1층 대강당의 모습
ⓒ 오마이뉴스 노순택


삼성 그룹 고위 관계자는 27일 저녁 <오마이뉴스>와의 전화 인터뷰에서 "법원의 판단을 존중한다는 것이 삼성의 공식적인 코멘트 일 뿐 별다른 말은 할 수 없다"라며 "회사보다는 이사 개인들에게는 액수도 크고 납득할 수 없는 부분도 있다고 하니까 최종적인 판단을 기대해보는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라며 항고할 뜻이 있음을 밝혔다.

삼성의 또 다른 관계자는 "회사가 잘못되기 위한 경영 판단을 내리는 이사진이 어디에 있나"라며 "결과적으로 잘못된 경영 판단에 대해 배상 등으로 들어오면 법적으로 올라가는 등기 이사를 누가 소신 있게 일 하려고 하겠나"라며 불만을 토로했다.

전국경제인연합회와 다른 재벌 그룹 등 재계는 이번 판결이 앞으로의 기업 경영 등에 미칠 영향에 촉각을 세우고 있다.

특히 재계쪽에서는 이번 삼성 판결이 대법원에서 최종 확정될 경우 기업 경영진이 전반적으로 심리적인 위축을 가져올 가능성이 높고 이는 기업 경영에도 그대로 영향을 미쳐 기업이나 사회에 득보다는 실이 클 것이라는 지적까지 나오고 있다.

L 그룹의 한 관계자는 "1심 판결이고 대법원까지 간다고 하니까 뭐라 말하기 어렵다"면서도 "(이번 판결로) 기업 임원들이 오히려 더 보신주의에 흐를 가능성도 없지 않다"며 우려의 목소리를 내기도 했다.

전국경제인연합회 관계자는 "미국의 경우 법의 테두리를 벗어난 경우를 빼고 일반적인 경영상의 판단에 대해 사법부가 개입되는 경우는 없다고 한다"면서 "우리 기업인들의 경영 여건과 기업 현실, 대외적인 사례 등을 종합해 향후 사법부의 올바른 판단을 기대한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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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황의 원인은 대중들이 경제를 너무 몰랐기 때문이다"(故 찰스 킨들버거 MIT경제학교수) 주로 경제 이야기를 다룹니다. 항상 배우고, 듣고, 생각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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