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께 드릴 연하장을 썼습니다

가장 가까운 곳에 계신 분을 생각 못하다니...

등록 2001.12.28 14:36수정 2001.12.30 1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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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날씨가 참 좋습니다. 거실에 있는 탁자에 앉아서 어제 쓰다만 연하장을 마저 썼습니다. 며칠 전에 우연히 문구점에서 연하장을 사왔는데 내 취향에 맞아 너무 좋았습니다.

한지로 된 것인데 가로가 길고 세로는 짧습니다. 세로로 오른쪽 끝에 '謹賀新年 새해를 맞이하여 高堂의 萬福을 衷心으로 비나이다'라고 써있고, 중앙에서부터 왼쪽 끝으로 묵화가 그려져 있습니다. 공간을 이용하여 세로로 붓펜을 가지고 글씨를 쓰면 보기가 그럴 듯 합니다.

처음에 세 장을 사와서 썼는데 그림도 좋고 글씨도 예상외로 잘 써져서 열 장을 더 사왔습니다. 그동안 나로 인해서 마음의 상처를 입은 이웃들을 생각했습니다. 직장을 잃은 이웃들을 생각했습니다. 불의의 사고로 병원에 입원하거나 집에서 요양중인 이웃들을 생각했습니다.

먼저 이곳에서 구조조정으로 20여 년간 직장 생활을 하다가 그만두고 지방으로 내려갔다가 이번에 다시 올라온 김 씨를 생각했습니다. 부인은 분식집을 하다가 몇 달 전에 아동복 판매를 맡아서 하고 있습니다. 숙식 문제가 해결이 되지 않아 지방에서 고생만 하다가 올라온 그의 마음이 가장 아플 것 같았습니다. 어렵지만 희망을 갖고 열심히 하길 바란다고 썼습니다.

뇌경색으로 오랫동안 병석에 누워 버섯 재배를 그만둔 박 씨 어르신을 생각했습니다. 성당 활동을 하면서 여러 번 방문했는데, 다행히 요즈음 많이 나아서 부인과 함께 버섯 재배를 조금씩 하고 있습니다. 내년에는 더욱 건강한 몸으로 비닐 하우스를 좀더 늘려나가기를 바라는 마음을 옮겼습니다.

그동안 성당 회합 때에 늘 내 옆자리에 앉아서 아름다운 신심을 보여주었던 한 할머니를 생각했습니다. 지금은 교통사고로 병원에 계십니다. 하루빨리 나아서 성당에 다시 나오셔서 깊은 신심을 보여주기를 당부하는 글을 썼습니다.

다리 수술로 인해 집에서 요양하고 있는 고 씨를 생각했습니다. 수술은 잘되었지만 목발을 짚고 수개월을 생활해야 합니다. 식당을 부인과 함께 하면서도 불우한 이웃들을 위해 적극적으로 활동했던 그가 빨리 나아서 좋은 일을 다시 하기를 바라는 마음을 정성껏 담았습니다.

그리고 조그만 성당의 발전을 위하여 물심양면으로 애를 쓰고 계시는 이웃들을 생각했습니다. 먼저 우리 구역을 위해 여러 어려운 행사를 주관하고 이끈 구역장님과 남성회장님을 생각했습니다. 정말로 열심히 하셨습니다. 구역이 몰라보게 활성화되었습니다.

예전에 함께 성당 활동을 같이 했던 여러 교우들을 생각했습니다. 내가 인복이 많아서 좋은 사람을 참 많이 만났습니다. 힘들고 어려운 일을 할 때마다 그들이 나서서 도와주었습니다. 격려를 해주었습니다. 늘 따뜻한 미소로 앞을 인도하였습니다. 그들을 생각하며 고마움의 마음을 적어나갔습니다.

쓰면서 올해 80이 다 되신 할아버지 한 분이 문득 생각났습니다. 지난 4월에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에 어머니의 영혼을 위해 미사를 바쳐준 분입니다. 그 분의 아름다운 마음을 기억하며 노부부가 평생동안 하느님의 은총 안에서 행복하게 사시라고 빌었습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얼마 뒤에 그 분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늦게 알아서 문상을 못 갔는데 어머니를 위해 연미사(죽은 영혼을 위해 바치는 미사)를 넣고 싶다는 것이었습니다. 연미사는 다 가족이나 아주 가까운 친척들이 봉헌합니다. 이렇게 전혀 아무런 관계가 없는 사람이 연미사를 봉헌하는 경우는 없습니다. 그래서 그 분의 전화에 난 깜짝 놀랐습니다.

그 분은 부인과 함께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어머니의 영혼을 위한 연미사에 나오셨습니다. 예물을 봉헌하고 그 미사를 정성껏 드렸습니다. 우리 가족들은 그 분 덕분에 연미사를 한 번 더 드리게 되었습니다. 현실적으로 일어나기 힘든 이웃사랑과 관심을 그 분이 몸과 마음으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 연하장은 어제 평일미사에 참례한 그 노부부를 차로 집까지 모셔다드리면서 전해드렸습니다. 차안에서 풀로 조금 붙인 봉투를 뜯어 연하장을 꺼내보시고 무척 좋아하셨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나도 나중에 남을 위해서 미사를 바칠 수 있도록 해야되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오늘은 남은 연하장 세 장을 마저 썼습니다. 두 장은 생각했던 이웃을 위해 썼습니다. 한 장이 남았습니다. 마땅히 떠오르는 얼굴이 없어 고민 중에 있는데 빨래를 베란다 빨래걸이에 널러 온 아내가 내게 상냥하게 웃으며 말했습니다.

"당신 아버님을 위해 한 번 써 보는 게 어때요?"

한 집에서 같이 생활하는 아버지를 위해 연하장을 쓴다? 한 번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처음에 아내의 말을 듣고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생각했습니다. 멀리 계시면 몰라도 모시고 사는데 연하장을 드린다는 것이 이상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잠시 생각해보니 그게 아니었습니다. 그저께의 일입니다. 내가 거실 식탁에서 카드와 연하장을 쓰고 있으니까 아버지가 물을 드시러 방에서 나와 아들 옆을 지나가다가 뭔가 궁금하여 고개를 숙여 보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연하장을 쓰는 것이 신기하게 보였던 모양입니다.

모르긴 몰라도 아버지께 연하장을 써서 드리면 퍽 좋아하실 것 같았습니다. 아니 분명히 흐뭇하게 받으실 것입니다. 그리고 고이고이 간직할 것입니다. 올 봄에 어머니를 여의고 외롭게 생활하시는 아버지께 무엇보다도 큰아들의 연하장은 큰 선물이 될 것 같았습니다.

붓펜을 들었습니다. 마지막 남은 연하장에 아버지의 은혜를 생각하며 오래오래 사시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큰아들이 예쁘게 글을 써나갔습니다. '베드로'는 아버지의 세례명이고, '가리노'는 나의 세례명입니다.

+ 찬미 예수님

베드로 아버님께
다사다난했던 한해가 저물어갑니다.
아버님, 새해를 맞이하여 더욱 건강하시고
하느님의 사랑 많이 받으시길 기도 드립니다.

큰아들 가리노 올림

경로당에 가신 아버지가 이따가 저녁 때에 들어오실 것입니다. 올해 78세이신 아버지에게 43세인 큰아들이 열과 성을 다해 쓴 연하장을 드릴 것입니다. 어떤 표정을 지을지 궁금합니다. 아버지 방에 어머니의 사진이 걸려 있습니다. 어머니는 아들이 남편에게 연하장 주는 광경을 흐뭇하게 내려다보실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아들에게 말할 것입니다.

"내 아들 정열아, 잘했다. 그래 그렇게 아버지 잘 모셔야 한다."

덧붙이는 글 | 가장 가까운 곳에 계신, 가장 소중한 아버지를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가장 먼저 생각하고 써야 되는데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하라고 일러준 아내의 착한 마음을 간직합니다. 어머니가 안 계시기에 많이 외로우실 아버지께 더 관심을 갖고 효도하도록 애쓰렵니다.

덧붙이는 글 가장 가까운 곳에 계신, 가장 소중한 아버지를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가장 먼저 생각하고 써야 되는데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하라고 일러준 아내의 착한 마음을 간직합니다. 어머니가 안 계시기에 많이 외로우실 아버지께 더 관심을 갖고 효도하도록 애쓰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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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요즈음 큰 기쁨 한 가지가 늘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오마이뉴스'를 보는 것입니다. 때때로 독자 의견란에 글을 올리다보니 저도 기자가 되어 글을 쓰고 싶은 욕심(?)이 생겼습니다. 우리들의 다양한 삶을 솔직하게 써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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