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조국은 식민지, 나는 주인이 아니다"

나는 왜 삭풍의 용산 미군기지 앞에 섰나

등록 2001.12.31 15:01수정 2001.12.31 1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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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조국은 식민지
일찍이 이방인이 지배하던 땅에 태어나
지금은 옛 전우가 다스리는 나라
나는 주인이 아니다" (정희성 시인의 "불망기" 중에서)


내 조국은 식민지, 나는 주인이 아니다... 이 땅에 살면서도 나는 주인이 아니다... 이 땅에 주인으로 살기 위해 나는 증오할 것을 증오한다...

지난 12월 21일 금요일, 나는 이 땅에서 주인행세 하는 미군의 오만한 제국, 용산기지 앞에 홀로 섰다. 이방인의 군대가 우리를 보호하기 위해 늠름한 위용으로 주둔해 있다는 그 곳의 한가운데에. 들고 있던 피켓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이제 고마 가라. 마이 죽쳤다 아이가!
You've stationed long enough. Don't overstay our welcome!"

날씨는 생각보다 매웠다. 그 곳에 서니 마음이 더 추워졌다. 바람이 찬 것은 날씨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 찬바람은 두터운 코트와 머플러를 종횡으로 뚫고 온 몸을 유린하고 지나갔다. 마치 저 이방인의 군대가 이 땅에서 그랬던 것처럼.

가만히 서 있으려니 목이 뻣뻣해 오고 땅의 한기가 그대로 머리 꼭대기로 전달되는 듯 했다. 아, 저곳이 우리의 수난사를 그대로 담고 있는 치욕의 현장인가. 식민지 땅의 상징인가. 나의 망막에 맺힌 그 현장이 찬바람과 함께 나의 가슴을 관통하고 지나갔다. 낯선 얼굴색의 병사들이 끊임없이 꿈틀꿈틀 기어 들어가고 나왔다.

그 이방인의 병사 중 누군가는 지나가는 차 안에서 빈정거리는 듯 했고, 누군가는 엄지손가락을 추어주며 지나가기도 했다. 그것도 빈정거림의 다른 표현이겠지. 또 어떤 이들은 손을 흔들며 지나가기도 했다. 그들에게는 나도 손을 흔들어 주었다.

기이한 재밋거리였을까? 어떤 군인은 길 저쪽 모퉁이에 차를 세우고 사진을 찍어댔다. 그를 위하여는 최대한 자연스러운 포즈를 취해 주었다. 그대여 나는 몸이 아직 굳지 않았네. 나는 식민지 땅에서 살고 있어도 주인이고 싶네. 그대의 나라에 돌아가면 얘기나 잘 해주게나, 이방인 친구.

한 중령 계급장을 단 나와 비슷한 얼굴의 군인이 다가와 피켓을 자세히 훑어보더니 내 얼굴도 훑고 지나갔다. 경멸 어린 눈초리로. 나도 그에게 똑같은 눈초리로 화답하였다. 한심한 백성 같으니, 서로를 우리는 그렇게 생각했으리라. 우리는 마치 아직도 의심의 눈초리로 서로를 노려보며 마주 앉은 남과 북 같았으리라. 형제를 겨눈 총부리를 쥔 팔에 힘을 잔뜩 주고, 부끄러움은 내팽겨 버린 채 서로의 갈라진 조국에 대한 충성만 남은 남과 북 같았으리라. 그와 나의 조우는 그렇게 작은 분단이었다.

불현듯 찬바람이 지나가며 김남주는, 조태일은 왜 그리 일찍 갔느냐고 물었다. 다른 김남주와 조태일은 왜 여지껏 나타나지 않느냐고 물었다. 이 땅의 목숨 붙은 시인은 왜 그저 강과 산에만 몰두하느냐고 물었다. 같은 길 가는 누구는 이 땅이 분명 식민지라하던데...나는 대답할 수 없었다.

바람의 물음에 맞추어 나도 물었다. 미국과 그 앞잡이 세력의 안보주술에 걸린 반세기, 그 미망의 세월에서 우리 민족이 눈뜨는 날이 언제일까? 왜 눈을 뜨다 만 것일까? 외세의 간섭을 뿌리치고 우리의 두 다리로 일어서는 날이 언제일까? 새해엔 철이 들까?

그 날 삭풍이 부는 이방인의 주둔지 앞에서 이리저리 발걸음을 옮기며 나는 속으로 외쳐댔다. "제발 좀 덜 잘 먹어도 좋으니, 자존심 좀 지키고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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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인철 기자는 카이스트의 감사와 연구교수를 지냈습니다. 친일청산에 관심이 많아 오래 민족문제연구소 지부장을 지내고, 운영위원장을 역임하였으며, 지금은 장준하정신을 되살리기 위한 '장준하부활시민연대'의 공동대표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대학에 출강하면서 '코칭으로 아름다운 세상' 만들기와 '에듀코칭'을 통한 학교교육 혁신을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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