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탄강 사람들, 돼지 세 마리 잡다

'한탄강 소녀'의 신년 연하장

등록 2001.12.31 18:29수정 2002.01.02 2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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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속기획: 한탄강은 흘러야 한다 5] 한탄강 주민 200여 명이 2001년 마지막 날 포천군 관인면 삼율리 마을회관에 모여 잔치를 벌였다. 그들이 이날 돼지를 세 마리나 잡으며 성대한 마을잔치를 벌인 것은 국회가 2002년도 예산을 통과시키면서 매우 이례적인 결정을 내린 것과 무관하지 않다.

국회는 지난 12월 27일 한탄강댐 등 7개의 신규 다목적댐 추진을 위해 건설교통부가 신청한 예산 1490억 원 중 246억 원을 삭감하는 한편 예산책정 방식도 '댐별'에서 '총액'으로 조정하는 전례 없는 결정을 내렸다. 이에 대해 댐반대국민행동은 '절반의 성공'이라는 평가를 내렸다.

'한탄강 소녀' 일완이가 구술한 편지로 연속기획을 일단 갈무리한다. 아울러 댐 건설 문제가 다시 대두될 경우 언제라도 독자에게 현장의 목소리를 전달할 것을 약속한다.


▲ 한탄강 사람들은 한탄강의 흐름이 멈추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 오마이뉴스 노순택
오마이뉴스 독자 여러분.

안녕하세요. 첫 번째 기사에서 인사드렸던 중리초등학교 6학년 1반 이일완입니다.

지난번 기사가 오마이뉴스에 나간 직후 셀 수 없이 많은 신문사와 방송사 기자 아저씨, 아줌마들이 한탄강과 중리학교를 찾았고, 그분들의 집중적인 취재와 보도 덕분에 한탄강댐 문제에 대한 여론이 서서히 바뀌기 시작했답니다.

이 자리를 빌어 우리에게 격려와 지원을 아끼지 않은 오마이뉴스 독자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지난 12월21일에는 우리 학교와 자매결연을 맺은 외환카드 노동조합의 송년음악회에 우리 학교 전교생이 초청을 받기도 했답니다.

물론 그날 우리 6학년 리듬밴드 단원들과 4, 5학년 풍물반 아이들은 1년 동안 갈고 닦은 실력을 맘껏 발휘했지요. 오마이뉴스에 기사가 나가는 바람에 '한탄강 소녀'라는 별명을 얻은 제가 신나게 드럼을 두들기는 장면을 혹시 TV 화면에서 보신 분들이 있는지 모르겠군요.

참, 또 한 가지 소식을 전해야겠군요.

2001년의 마지막 날, 우리 마을에서는 성대한 잔치가 벌어졌습니다.

철원과 연천에서까지 많은 분들이 참석하신 이날 잔치를 위해 정희(관인중 1학년) 언니네 꿀꿀이를 비롯해 살찐 돼지 세 마리를 잡기도 했지요. 두 달 가까이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에서 매일 다섯 명씩 조를 짜서 철야농성을 벌였던 어른들도 농성을 풀고 돌아와 막걸리 잔을 기울이셨습니다.

막걸리 하면 포천, 그 중에서도 '이동막걸리' 아닙니까? 요즘 유행하는 '연변총각' 버전으로 하면, 이동막걸리 고저 와땁네다. ^ ^

▲경기도 포천군 관인면 삼율리에서 4대가 함께 어울려 사는 현서네 일가족. ⓒ 월간 <말> 박여선
특히 이날 잔치에서 제일 흥겨워하셨던 분들은 우리 마을의 할아버지, 할머니들입니다. 평생을 이곳에 뿌리 내리고 살아오셨던 그 분들은 댐이 들어서면 고향에서 쫓겨날 것이 두려워 그 동안 밤잠을 설치셨거든요. 특히 삼율리에서 4대가 모여 사는 윤서네 할아버지(86)와 할머니(85)는 수심에 가득 차 있었는데, 오늘만은 주름이 가득한 얼굴을 활짝 펴시고 하루종일 싱글벙글 하셨지요.

저에게는 한탄강을 반드시 지켜야 하는 몇 가지 사연이 있습니다.

첫째, 한탄강은 우리 가족의 아픔과 기쁨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영원한 고향입니다.

그러니까 제가 네 살 때인 1992년의 일이었습니다. 아버지(이철우 한탄강네트워크 사무처장)가 시국사건으로 구속되는 날벼락이 떨어졌고, 그 충격으로 할아버지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장남인 아버지는 5일 동안 형집행정지로 나와 장례를 치른 뒤 감옥으로 돌아가야 했지요. 그리고 두 가장을 한꺼번에 잃은 세 여인(할머니, 어머니, 나)만이 쓸쓸하게 집을 지켜야 했습니다.

감옥으로 돌아가기 전날 밤 아버지는 할아버지의 영정 사진과 아무 것도 모르던 어린 제 눈망울을 번갈아 쳐다보며 한 가지 결심을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아버지는 제가 여섯 살이 되던 1994년부터 편지지에 깨알같은 글씨로 동화를 써서 밖으로 내보내기 시작했습니다. 사랑하는 딸의 초등학교 입학선물로 동화책을 선물하기 위해서였지요(감옥에 갇혀 있던 4년 동안 아버지는 우리 가족에게 약 2000통의 편지를 썼고, 그 가운데 200통이 저에게 보낸 것이랍니다).

동화를 완성하기까지는 꼬박 2년이 걸렸다고 합니다. 그리고 완성된 글을 책으로 만드는 일은, 졸지에 가장이 된 어머니(포천여중 교사 곽윤식 씨)의 몫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아버지의 모교인 관인중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치시던 어머니에게 출판사를 찾아다닌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던 모양입니다. 아버지의 지인들까지 발벗고 나섰지만 제가 초등학교에 입학하던 날, 결국 책은 나오지 못했습니다.

대신 저는 중리초등학교에 입학하던 날, 아버지가 감옥에서 보내준 '모내기'라는 제목의 동시를 입학선물로 받았습니다. "삐뚤삐뚤 작은 벼들이/넓은 논에 줄을 섭니다//키도 작고 줄도 비뚤/벼들의 입학식입니다"로 시작되는 동시를 읽으며, 저는 그 벼들이 누렇게 익으면 아버지와 만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가질 수 있었지요.

그리고 3년이 흘렀습니다. 그 동안 나는 3학년이 되었고, 아버지도 4년만에 출옥해 애타게 한 남자(아들, 남편, 아버지)를 기다리던 세 여인(어머니, 아내, 딸)과 상봉했지요.

그런데 그해 가을 추수로 바쁜 우리 가족에게 반가운 소식이 날아들었습니다. 한 출판사에서 책을 내자고 제안을 해 온 겁니다. 반가운 소식은 또 날아들었지요. 아버지가 학생운동을 하며 인연을 맺었던 박시백(당시 <한겨레신문> 시사만평가) 아저씨가 동화의 삽화를 그려주겠다고 나섰거든요.

▲ 아버지가 감옥에서 쓴 동화책이 일완이가 3학년 때이던 1998년 가을에 발간됐다. ⓒ 월간 <말> 임종진
아버지의 동화책 <백두산 호랑이>는 그런 우여곡절 끝에 세상에 고개를 내밀었습니다. "슬픔은 나누면 절반이 되고 기쁨은 나누면 두 배가 된다." 그것은 아버지가 없는 동안 내가 터득한 진리였습니다. 그래서 나는 선생님들과 전교생에게 동화책을 한 권씩 선물했지요. 아이들의 반응이 어땠냐고요? 한마디로 아우성이었지요.

아버지가 출판사에서 막 가져온 <백두산 호랑이>를 들고 와서 제일 먼저 저를 데리고 간 곳이 바로 한탄강이었습니다. 그날 한탄강의 협곡을 바라보며 저는 다짐했습니다. 백두산 호랑이처럼 웅대한 용기와 희망을 가진 정치가가 되어 '일완'이라는 내 이름처럼 '통일완수'를 위해 노력하겠다고.

둘째, 한탄강은 우리 학교와 지역 주민들에겐 없어서는 안 될 생명의 젖줄입니다.

1999년 봄 전교생이 80여 명 남짓 되는 중리초등학교의 선생님, 학부모, 학생들은 청천벽력 같은 소식에 망연자실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교육부에서 학생수가 100명 이하인 전국의 작은 학교를 모두 통폐합하겠다는 방침을 발표했기 때문입니다.

당시 우리 학교 운영위원장을 맡고 있던 아버지는 다른 학부모들과 함께 '작은 학교 지키기 운동'을 벌이기 시작했습니다. 아버지는 우선 우리 학교와 비슷한 처지에 놓여 있는 전국의 약 1200개 작은 학교들과 힘을 모으는 일에 집중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두밀분교 지키기 운동'을 전개했던 장호순 교수님(순천향대 신방과)과도 만나셨지요.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것처럼 힘겨운 상황에서 아버지는 당시 이해찬 교육부장관에게 공개편지를 쓰기도 했습니다. 이 글은 월간 <말> 1999년 6월호에 실렸는데, 이런 대목이 저의 가슴에 와 닿았습니다.

"어떤 시련이 와도 참고 견디며 공동체를 먼저 생각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자기 맡은 일을 묵묵히 하는 이름 없는 사람들이 누구인줄 아십니까? 남 속일 줄 모르고 정직하게 하루하루를 살아가며 이 사회에 밑거름이 되는 사람들이 누구인줄 아십니까? 눈물나게 고통스럽지만 편법을 쓸 줄 모르고 아예 그런 마음조차 먹지 못하면서 남을 원망하지 않고 살아가는 진짜 애국자들이 누구인지 아십니까? 그런 사람들을 붙잡고 당신은 어느 초등학교를 나왔느냐고 묻는다면 십중팔구는 시골의 이름 없는 초등학교를 말할 것입니다.

시골의 작은 초등학교는 40년, 50년을 사람들과 함께 하며 숱한 사연을 만들어왔습니다. 그래서 어디를 가나 많은 사람들의 마음 속 한가운데 살아 있는 고향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이는 포천에 있는 어느 한 마을만의 이야기가 아닐 것입니다. 이 땅 나지막한 산자락과 작은 개울을 끼고 마을이 살포시 자리한 곳이라면 어디나 이런 사연 하나쯤은 간직하고 있을 겁니다. 그러나 그런 고향의 작은 학교에서 언제부턴가 사람들이 떠나기 시작했습니다."


▲'작은 학교 지키기 운동'의 상징이었던 중리초등학교. 댐 건설 논쟁으로 또 한 번의 시련을 겪고 있다. ⓒ 오마이뉴스 이종호

아버지는 편지에서 "1980년대 군사정부 관료들에 의해 입안된 소규모 학교 통폐합 정책이 그 동안 부분적으로만 시행되어 오다가 이른바 '국민의 정부'에서 IMF 사태를 미명 삼아 본격적으로 강행되고 있는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고 지적한 뒤 다음과 같이 주장했습니다.

"소규모 학교 통폐합이야말로 바로 그런 과거 교육정책의 전철을 밟는 것이라고 감히 지적합니다. 사람들은 '세계화'를 외치지만 사실 '지역화'의 바탕이 없는 세계화는 공허할 수밖에 없습니다. 21세기의 새로운 공동체를 상상해 보십시오. 세계는 단일화한 정보의 장으로 움직여가고 있지만 결국 구체적 삶의 공간은 지역사회일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들은 그 지역사회를 토대로 우리들이 꿈꾸어 왔던 이상을 실현해야 합니다. 학교는 그런 과정에서 꿈을 현실화하는 지역사회의 구심이 되어야 합니다. 이제 학교는 더 이상 학생들만의 교육기관이 아니라 주민 모두의 교육기관인 시대가 온 것입니다."

아버지의 편지를 읽고 저도 가만히 있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김대중 대통령 할아버지에게 작은 학교를 지켜달라는 편지를 썼던 겁니다. 이런 사연은 <한겨레신문>과 MBC '시사매거진 2580'을 비롯한 각종 언론매체를 통해 세상에 알려졌고, 중리초등학교는 '작은 학교 지키기 운동'의 상징으로 떠올랐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이런 눈물겨운 노력은 결실을 거두어 그해 가을 중리초등학교를 비롯한 전국의 1200개 작은 학교는 살아남을 수 있었지요.

셋째, 한탄강은 우리의 미래와 꿈을 펼쳐야 할 아름다운 공간입니다.

강원도 평강에서 발원하여 철원, 포천, 연천을 거쳐 임진강으로 흘러드는 길이 136km의 한탄강. 바로 이 강을 젖줄로 삼아 살아가는 이 지역 주민들이 2000년 겨울 '한탄강네트워크'라는 시민단체를 만들었습니다.

이 단체의 사무처장을 맡은 아버지가 지역 사람들을 만나면서 역설했던 것은 한탄강 유역이라는 공간이 가지고 있는 '엄청난 의미'를 자각하자는 것이었습니다. 아버지의 말을 그대로 옮기면, DMZ가 있는 한탄강 유역이야말로 "평화, 환경, 통일이라는 세계사적 화두를 지구상에서 가장 상징적으로 담지하고 있는 공간"이라고 합니다. 다음은 아버지가 한탄강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힘주어 주장하던 말입니다.

"한탄강의 첫 번째 화두는 '평화'입니다. 지구상에서 마지막 남은 휴전선과 DMZ가 바로 이곳에 있어요. '지뢰'라는 붉은 철표가 붙어 있는 철조망에는 평화를 갈망하는 인류의 비원이 담겨 있습니다. 두 번째 화두는 '환경'입니다. 한탄강의 DMZ는 지구촌의 온대지방에선 유일하게 남아있는 생태보전지역입니다. 분단의 상처에서 생겨난 공간이기에 그 생태학적 의미는 더욱 크다고 할 수 있지요. 세 번째 화두는 '통일'입니다. 이곳은 금강산으로 가는 육로의 길목입니다. 금강산 관광은 이제 육지를 통해서도 가능하게 될 것입니다. 세계 유일의 분단 현장이라는 점에서 이곳은 통일의 상징적 공간이라고 할 수 있지요."

아버지는 이런 말씀도 하셨습니다.

"우리는 숄로호프의 <고요한 돈강>을 통해 러시아 혁명의 원류를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한탄강이 세계적인 문학과 예술의 젖줄이 되지 말란 법도 없을 것입니다. 지역운동도 이런 가치관과 자부심을 가지고 한다면 큰 성과를 낼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가장 지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고, 가장 세계적인 것이 가장 지역적인 것이라는 발상의 전환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한탄강에서 바로 그런 미래를 현실로 옮기려 노력할 때 우리의 후세들도 더 큰 희망의 꿈을 꿀 수 있을 겁니다."

그러나 한탄강에 댐이 들어서면 한탄강에서 이루려던 지역 주민들의 미래와 아이들의 꿈도 함께 물에 잠기고 말 것입니다. 아버지를 비롯한 지역 주민들과 우리들이 한마음으로 한탄강을 지켜내기 위해 떨쳐 일어설 수밖에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이유는 섬진강(적성댐), 낙동강 위천(화북댐), 북한강 수입천(밤성골댐), 낙동강 감천(감천댐), 영덕오십천(상옥댐), 낙동강 이안천(이안천댐), 낙동강 내성천(송리원댐), 낙동강 남강(안의댐), 왕피천(송사댐), 금강 지천(지천댐), 황룡강 평림천(평림댐)에서 작은 강을 지키려는 분들에게도 마찬가지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한탄강에는 눈이 펑펑 내리고 있습니다. 새해에는 여러분에게 행복하고 건강하고 좋은 일만 생기기를 기도하겠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2002년 새해를 맞으며

한탄강에서 이일완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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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환 기자는 월간 말 취재차장으로 일하고 있으며 언론, 지역, 에너지, 식량 문제에 관심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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