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일파 동상은 철거돼도 기념관은 남는다

광신학원, 박흥식 동상 작년 말 철거 창고에 보관

등록 2002.01.03 14:43수정 2002.01.29 1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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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년 12월 철거된 박흥식의 동상. 광신학원은 동문회의 건의를 수용하는 형식으로 동상을 전격 철거했다. ⓒ 오마이뉴스 자료사진
서울의 한 고등학교 교정에 세워졌던, 친일기업인 박흥식의 동상이 작년 말 철거됐다는 사실이 뒤늦게 확인됐다.

학교 법인 광신학원에 따르면, 작년 12월23일 오전 크레인을 동원해 서울 관악구 신림동의 광신고등학교 교정에 세워져 있던 동상을 철거했다. 광신학원 측은 법인 산하 중학교, 고등학교, 정보산업고등학교가 모두 방학에 들어간 가운데 주위의 시선을 덜 받을 수 있는 일요일을 철거일로 정한 것으로 보인다.

동상 철거 당일 광신학원 산하 3개 학교 교장과 교감, 상조회장 그리고 학원 행정실장 등 10명은 이날 철거에 앞서 간단히 제사를 지낸 것으로 알려졌다. 동상은 현재 광신고등학교 목공실 창고에 보관중이다. 원래 동상이 있던 자리에는 광신 학원의 교훈('성실')이 적힌 표석이 놓여졌다. 그러나 동상 옆에 세워져 있는 '유재 기념관'(박흥식을 기리는 기념관)은 계속 존속될 전망이다.

광신고 행정실의 관계자는 3일 <오마이뉴스>와의 전화통화에서 동상 철거와 관련, "동상이 없어진 상황에서 이 문제에 대해 더 이상 얘기하고 싶지 않다"면서 "다음에는 좀더 좋은 얘기거리를 취재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 관계자는 '유재 기념관'의 처리 방향에 대해서는 "멀쩡한 건물을 없애라는 말이냐"며 극히 예민한 반응을 보였다.

철거된 박흥식의 동상은 1985년 이사장 자리를 이어받은 그의 아들 박병석이 1996년에 세운 것으로, 동상 철거는 '친일인명사전' 편찬 작업을 주도하고 있는 민족문제연구소(www.minjok.or.kr, 이하 민문연) 회원들이 두 달간 끈질긴 항의 시위를 펼친 끝에 이뤄졌다.

민문연은 "대표적인 친일기업인의 동상을 고등학교 교정에 세워놓고 기념하는 것은 해방직후 민족반역자를 제대로 청산하지 못한 현실을 그대로 드러낸다"며 동상의 철거를 요구했고, 결국 광신학원은 작년 12월 초 동문회의 건의를 수용하는 형식으로 자진철거를 결정했다.

▲ 작년 11월9일 광신고 교정 정문에서 벌어진 동상철거 촉구 시위. 사진은 민족문제연구소의 회원 박영환(75) 옹.ⓒ 오마이뉴스 자료사진
광신학원은 1905년 독립운동가 안창호, 박은식 등이 설립한 서우사범학교가 모체로, 일제하에서 개교와 폐교를 거듭하며 경영난에 시달린 끝에 1939년 박흥식이 학원을 인수하며 현재의 이름을 얻게 됐다.

초대 이사장 박흥식은 국내 최초의 백화점인 화신백화점을 세운 당대 최고의 '갑부'였다. 그러나 박흥식은 일제의 2차대전 패망을 앞둔 1945년 4월 학교 이름을 다시 '조선비행기공업학교'로 바꾼 뒤 전쟁에 쓰일 전투기를 생산하는 기술전문학교로 탈바꿈시키고 전투기 생산을 위한 재산 헌납을 주도하는 등 노골적인 친일 행각으로 지탄을 받았다.


박흥식은 해방 후 미국으로의 도피를 시도하다가 1949년 1월8일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이하 반민특위)'의 '조사 대상 1호'로 체포됐지만 반민특위가 해산되면서 풀려났다가 1994년에 사망했다.

박흥식 동상 외에도 청주 3.1 공원의 정춘수 동상(1996년2월), 서울 아현동 중앙여고의 황신덕 동상(2000년7월)이 친일 전력 문제로 철거된 바 있지만, 여전히 상당수 친일파들의 동상이 전국 곳곳에 산재해 있다.


민족문제연구소의 방학진 사무국장은 "박흥식 동상의 경우 조직적인 시위가 벌어지며 비판 여론의 확산이 철거로까지 이어졌지만, 초중고교 내에 세워진 친일파 동상들은 현황 파악도 힘든 상황"이라고 말했다.

민족문제연구소는 서울 강남구 대치동 휘문고등학교 교정에 세워진 민영휘 동상에 대해서도 문제제기를 할 계획이나 부족한 일손 등으로 철거 운동에 착수하지 못하는 실정이다.

1906년 휘문고의 전신인 휘문의숙을 설립한 민영휘는 구한말 임오군란 중 대표적인 탐관오리로 지탄을 받았고, 1910년 국권을 상실한 후에는 일본정부로부터 자작(子爵)을 수여받기도 했다. 휘문고 행정실의 관계자는 "민영휘의 행적은 당시 상황에서는 어쩔 수 없지 않았나? 민영휘 동상을 철거하라는 얘기가 있지만, 그렇다면 고려대학교의 김성수나 이화여자대학교의 김활란 동상도 마땅히 철거해야 하는 것 아닌가?"라고 반문하고 "민영휘가 휘문고를 세워 근대교육의 발전에 이바지한 공로를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 학교의 입장"이라고 대답했다.

덧붙이는 글 | 친일파들에 대한 자세한 자료들은 민족문제연구소 자료실(minjok.or.kr/n_pds/main.htm) '친일파 99인'에서 찾을 수 있다.

덧붙이는 글 친일파들에 대한 자세한 자료들은 민족문제연구소 자료실(minjok.or.kr/n_pds/main.htm) '친일파 99인'에서 찾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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