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리네의 겨울여행 '신라와 만나기' (1)

등록 2002.01.03 18:00수정 2002.01.03 1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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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년에 걸쳐 방문했던 진주 누리네서 벗어나 자유여행을 하기로 했다. 그동안은 진주를 거점으로 해서 진주 주변, 지리산 주변 절이나 유적지를 아이들과 같이 다니고 살펴봤으나 이제 몇 년 지나니 아이들도 안 따라나서려 하고 나도 이젠 1000년의 고도인 경주에 가보고 싶었다.

그동안 너무 관광지화 된 듯하여 외면한 것도 있고, 기회도 닿지 않아 경주에 가보지 못했던 터였다. 특히 불교의 보고라는 남산을 보고 싶었다. 남편을 졸라서 결국 이번 겨울방학엔 아이들과 같이 경주답사를 하는데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우린 3박4일간의 여행을 위한 각자의 짐과 약간의 반찬, 쌀, 코펠 등등을 챙기니 자동차 트렁크에 꽉 찬다.

집에 있는 2식구(강아지 - 딸랑이, 타미)에게는 밥그릇(플라스틱 세숫대야) 가득 사료를 부어주고 새벽 5시 20분쯤 졸린 눈을 제대로 뜨지도 못하고 출발했다. 토요일이라 길 막힐까봐 부지런을 떤 것이다. 다행히 아이들도 짜증내지 않고 잘 따랐다.

중부고속도로를 지나 새로 완전 개통된 대전-진주간(대진) 고속도로에 들어섰다. 길은 깔끔했고 차는 많지 않았다.

'아침은 어디서 먹을까?'
새로 생긴 휴게소에 가서 먹기로 하고 인삼랜드 휴게소를 지났다. 다음휴게소까지는 33km라는 안내표지판을 믿고 말이다. 그런데 분명히 표지판에 표시된 거리를 지나갔는 데도 휴게소가 없었다. 4식구 모두 눈을 부릅뜨고 두리번거리며 한참 찾은 후에야 덕유산휴게소가 보였다. 안내표지판의 거리보다 무려 10여km정도(정확히 재보지는 못했지만) 더 지난 것 같다.

원망 반 반가움 반으로 식당에 들어갔다. 우리는 자율식당에 가서 먹고 싶은 걸 골라먹는데 이곳에는 아직 자율식당이 없었다. 메뉴에 적힌 음식을 주문해서 먹었는데 맛은 글쎄.... 앞으로 자율식당이 생겨서 좀더 다양한 입맛을 충족시킬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인삼랜드휴게소-다음휴게소까지의 거리를 알려주는 표지판도 정확해졌으면 좋겠고.


우리의 영원한 베이스캠프인 진주 누리네서 하룻밤을 자고 다시 새벽같이(?) 7시쯤 출발했다.

그렇게도 보고싶었던 경주를 향해서 신라인을 만나기 위해서!
경주 톨게이트에 들어서는 순간 나지막한 경주 시내가 한눈에 들어왔다. 마치 드라마의 세트장에 온 듯했다.


15층 정도의 고층아파트들이 이곳 경주에선 눈에 띄지 않았다. 그리고 여기저기 보이는 기와집들이 이채로왔다. 학창시절에 수학여행을 왔을 때의 느낌과 달랐다. 나들목을 빠져나오자마자 왼쪽으로 박물관 건물이 보였다.

사실 나는 아이들을 데리고 박물관에 가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 그냥 지나가려고 했다. 박물관은 넓고 서울 못지않게 소장품도 많아 다 보고 나오면 아무 것도 기억하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들어가는 순간 나의 이런 선입견을 바꿔야 했다. 작은 아이 리화는 신석기시대 유물에 관심을 가지고 이것저것 질문을 했다. 그동안 학교도서실에서 역사에 관한 책을 많이 빌려보더니 그 효과가 나타난 것인가? 아니면 드라마 태조 왕건을 열심히 시청한 탓일까?

큰아이 미화는 탈이 났다면서 화장실에 갔다오는 등 수선을 피웠지만 두 아이는 내가 가졌던 선입견과는 달리 열심히 보고 신라인의 숨결을 느껴보려고 노력하는 듯했다.

리화는 '신라가 아닌 고구려가 통일을 했으면 좋지 않았을까?'라며 고구려 아닌 신라가 통일한 것에 대해 불만을 제기 하는 등 나름대로 관심을 보였다.

아는만큼 보인다더니, 어려서 박물관 갔을 때는 보는둥 마는둥 하더니 요즘에는 학교에서 간단하게나마 역사(초등 5년)를 배우고 여기저기서 보고 들은 것이 도움이 된 모양이다.

건축에도 관심을 가져 암막새니 수막새니 암기와 수기와 등의 이름을 외우고 안압지에서 나온 유물을 보며 신라의 찬란했던 시절을 상상도 해보고 마지막 경순왕이 왕건에게 신라를 넘겨줄 때의 참담한 심정도 느껴보려고 애썼다.

다음은 첨성대로 향했다. 아주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 첨성대의 쓰임에 대해선 논란이 끊이지 않았다고 하는데 아마도 천문대의 상징물이었을 것이라고 한다.

벌판에 세워진 첨성대는 당시엔 굉장히 우람했을 것이다. 학창시절 국사시간엔 그저 그러려니 했는데 이제 와 다시 보니 신라인의 힘이 느껴지고 첨성대의 돌에서 친근함이 묻어난다. 한 가지 안타까운 점은 첨성대가 한쪽으로 많이 기운 것 같아 문화재의 보존에 좀더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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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수성과 감동은 늙지 않는다"라는 말을 신조로 삼으며 오늘도 즐겁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익숙함이 주는 편안함에 주저앉지 않고 새로움이 주는 설레임을 추구하고 무디어지지 않으려 노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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