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밥이 맛 없어. 하얀 밥이 줘"

우리 딸도 못 먹는 쌀밥을 강아지에게 해주었습니다

등록 2002.01.06 00:08수정 2002.01.07 19:12
0
원고료로 응원
【오마이뉴스는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생활글도 뉴스로 채택하고 있습니다. 개인의 경험을 통해 뉴스를 좀더 생생하고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당신의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우리 집은 2년6개월째 현미 100%에 검정콩을 넣은 밥을 먹고 있다.
전신마비 1급인 집사람에게 자연치료하시는 분이 해준 처방대로 먹기 위해서다.


이제 우리 나이로 6살 된 우리 딸 아랑이는 도시에서 태어났지만 엄마가 전신마비환자라서 또 아빠가 그런 엄마의 치료 가능성을 늘 믿고 살기 때문에 2년6개월 전 만 23개월 되었을 때부터 우리 부부와 똑같은 밥을 먹고 있다.

그런데 현미밥은 매우 거칠다. 적어도 5시간 이상은 불렸다가 밥을 하는데도 그렇다. 아마 6살 나이에 100% 현미밥을 먹는 아이는 전국에 우리 딸밖에 없을 것이다. 아랑이는 처음부터 콩을 싫어했다. 그래서 솥에서 밥을 풀 때 맨 처음 하는 것이 위에 있는 콩을 밀어내고 밥만 푸는 것이다. 그건 아랑이 몫이다.

21개월부터 어린이집을 다닌 딸 아이는 이 곳에 이사와서도 계속 다니고 있다. 어린이집에서 먹는 점심은 흰 밥에 집에서는 도무지 해주지 않는 고기며 멸치, 어묵 같은 반찬이 나와서 그런지 밥을 집에서 보다 3,4배는 더 먹는다. 3살까지는 어려서인지 주는 밥을 거부하지 못하고 한 숟가락만 먹더라도 흰 쌀밥 달라는 소리는 안 했다.

그런데 4살 때인 재작년 5월 초에 "검은 밥이 맛 없어. 하얀 밥이 도라. 잉 잉"하면서 현미밥을 먹지 않았다. 어린이집에 물어보면 밥을 잘 먹는다고 하고, 일요일마다 교회에서 예배 후에 먹는 점심(물론 흰 밥)은 아주 잘먹었으므로 배고프면 밥 먹겠지하고는 전혀 신경쓰지 않았다. 그때는 우리 집에 흰 쌀이 정말 한 톨도 없었다.

아랑이는 정확히 한 달 동안 집에서 밥을 먹지 않았다. 물론 그래도 밥상에는 제 밥은 떠놓았고 달걀과 우유는 잘먹었으므로 그것도 함께 차려주었다. 그러다가 6월 초 어느날 "엄마, 검은 밥이도 맛있다"
하면서 현미밥을 먹었다. 고마운 일이었다.


그렇게 한 1년은 밥을 잘 먹었는데 작년부터 우리 집 식생활에 큰 변화가 생기게 되었다. 몸이 아픈 장인 어른과 함께 살게 된 것이다. 지금처럼 하자면 고기는 생선, 조개를 포함해서 전혀 먹지 않고 100% 현미밥에 검정콩을 넣은 밥을 주식으로 하고 국은 1년이면 300일은 시래기국을 먹으며 주로 채식을 하던 우리였다.

장인 어른은 보통 사람들처럼 고기 특히 생선을 좋아하시는 분이었다. 우리는 60 평생 드시던 식습관을 고치라고 하기보다는 1주일에 두 번 정도는 생선이나 육류 반찬을 해드리는 절충안을 택했다. 대신 반찬과 주식은 우리가 먹던 대로 하기로 했다.


작년에 흰 쌀 20 kg 한 포대가 들어온 게 있었다. 그래서 일요일에 우리 부부와 딸 아이가 교회에 가서 흰 쌀밥 점심을 먹을 때 혼자 식사를 하시는 장인을 위해서 그때만은 흰 쌀밥을 해드렸다. 이렇게 해서 집에서는 무조건 현미밥이라는 등식이 깨졌다.

지난 달 중순에 저녁을 먹는데 딸 아이가 또 다시 "검은 밥이 맛 없어. 하얀 밥이 줘"하며 우는 체를 하였다. 5살이 되면서 우는 흉내를 내는 것으로 자기 고집을 표현하는 우리 딸이다. 나는 "며칠 있으면 산타 할아버지가 올 텐데 그 때 아랑이 아빠 말 안 들었다고 일러줘야지"하면서 산타 할아버지를 핑계삼아 넘어가려고 했다.

그런데 현미밥에 아직 적응이 안 된 장인 어른이 현미밥이 맛이 없긴 하다면서 거들고 집사람까지 나서서 밥 좀 해주라고 하였다. 사실 시골에 사는 지금도 자연식 치료 10가지 처방 중 제대로 하는 것은 6,7 가지 뿐이고 그 중 현미와 콩밥을 먹는 것 하나만은 제일 잘한다고 생각했는데 여기서 밀리면 자연식 치료고 뭐고 끝장이라는 위기감을 느꼈다.

정색을 하면서" 흰밥은 무슨, 밥 먹기 싫으면 관둬" 이렇게 소리지르니 장인 어른도 눈치를 채고는 "애들 해달라는 대로 다 해주면 못쓴다"고 말씀하신다. 아랑이는 아까는 우는 체 하더니 이제는 아예 흰 밥에 목을 맨다. 하얀 밥, 하얀 밥을 부르며 진짜로 운다.

그러자 내게 불만이 많은 집 사람이 흰 밥을 해주라고 처음에는 권유를 나중에는 소리를 질렀다. 우리 집에는 밥 할 사람이 나 밖에 없는지라 나는 끝까지 뜻을 굽히지 않았다. 그래도 딸 아이가 다른 집에서는 정말 별 것 아닌 흰 밥을 먹겠다고 우는 것을 보니 마음이 아련해서 밥을 한 숟가락도 뜰 수 없었다.

나는 집사람 들으란 듯이 "나 밥 안먹어"라고 소리치고는 큰 방에서 나와 부엌방에 들어가서 내가 잘하고 있는 것인지, 딸 아이에게 너무 심한 것은 아닌지 한동안 생각했다.

한 10분이나 지났을까. 집사람이 부엌을 향해 "아랑이 아빠, 식사하세요. 아랑이 밥 먹는대요"라고 소리친다. 들어가보니 아랑이가 벌써 제 그릇에 담긴 밥을 반 이상 먹고 있었다. 나를 보더니 "아빠 미안해요. 인제는 검은 밥이 맛 없어도 먹어야지"하면서 나보고도 밥을 먹으란다. 참으로 대견하고 고마웠다.

며칠 전 1월 2일에 같은 동네 사는 분으로 부터 암컷 강아지 한 마리를 선물로 받았다. 겨우 100일 된 이 놈을 데리러 딸 아이와 함께 갔다. 강아지를 종이 상자에 넣고 들고 오면서 딸 아이에게 이름을 뭘로 지을까 물으니 백구가 어떨까 한다. 누런 색이니 황구가 어떨까 하다가 암캐인지라 황순이로 하자고 했다. 딸 아이가 좋다고 했다.

황순이는 우리 집에 올 때 배가 머리나 엉덩이보다 3배 정도 돼 비만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였는데 처음에는 밥을 통 먹지 않았다. 그래서 개를 준 집에 무엇을 잘먹느냐고 물으니 시래기 된장국을 좋아하고 국물을 많이 먹는단다. 마침 집밖에 매달아 놓은 무 시래기를 몇십 개 삶아서 헹구다가 줄기에서 떨어진 게 제법 되길래 우리가 먹는 국 그릇으로 세 그릇 정도를 된장을 풀어서 끓여 주었는데도 이 놈이 입도 안 댄다.

어려운 일이 생기면 늘 그렇듯 집사람에게 물었더니 밥을 넣어 주었냐고 한다. 밥은 우리 식구가 먹을 만큼만 해서 개밥에 넣을 것이 없다고 하니 그래서야 개가 밥을 먹을 리 없다며 밥을 해서 넣어주란다. 현미쌀은 불리자면 오늘 저녁이 다 지나겠으니 흰 쌀밥을 해주란다.

아무 생각 없이 흰 쌀을 개밥솥에 넣고 시래기 된장국을 끓여주는데 우리 딸이 흰 밥 달라고 할 때 산타 할아버지까지 들먹이면서 매정하게 거절하던 내가 100일 된 똥개 한 마리가 밥을 안 먹는다고 주저 없이 흰 쌀밥을 한다고 생각하니 참으로 기가 막혔다. 다행히 아랑이는 내가 흰 쌀을 개밥에 넣은 것을 모르고 "인제 우리 황순이 밥 잘먹는다"고 좋아만 한다.

아랑이가 커서 지금 일을 떠올릴 때면 해줄 말이 있다.
"그래 아랑아. 아빠는 네가 미워서 황순이만 못해서 흰밥을 안 해준 것이 아니란다. 네 엄마가 아프기 때문에 몸이 낫는 것이 우리 집 제일 큰 소원이기에 그랬단다. 요즘은 검은 밥을 잘 먹기는 하는데 검정콩도 잘먹는 씩씩한 아랑이가 돼주렴."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AD

AD

AD

인기기사

  1. 1 추석 앞두고 날아드는 문자, 서글픕니다 추석 앞두고 날아드는 문자, 서글픕니다
  2. 2 "5번이나 울었다... 학생들의 생명을 구하는 영화" "5번이나 울었다... 학생들의 생명을 구하는 영화"
  3. 3 개 안고 나온 윤 대통령 부부에 누리꾼들 '버럭', 왜? 개 안고 나온 윤 대통령 부부에 누리꾼들 '버럭', 왜?
  4. 4 추석 민심 물으니... "김여사가 문제" "경상도 부모님도 돌아서" 추석 민심 물으니... "김여사가 문제" "경상도 부모님도 돌아서"
  5. 5 계급장 떼고 도피한 지휘관, 국군이 저지른 참담한 패전 계급장 떼고 도피한 지휘관, 국군이 저지른 참담한 패전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