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불 지피는 밤

강제윤의 <보길도 편지>

등록 2002.01.15 11:28수정 2002.01.15 1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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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방 군불을 때며 그대에게 편지를 씁니다.
오늘도 하루를 살았습니다.
늘 새해가 되면 사람이란 한해살이 풀과 다르지 않다는 생각을 합니다.
올 한해 잘 살아야 다들 내년에 다시 볼 수 있겠지요.

큰바람이 불고 이틀째 배가 뜨지 못합니다.
염소 저녁거리 풀을 뜯으며 사람들 저녁거리 풀도 함께 뜯어왔습니다.
돌미나리와 쑥, 달래, 냉이, 돌갓, 텃밭의 월동 배추 한 포기, 아직 덜 여문 월동 무도 몇 개 뽑아왔습니다.
끼니 때 겨울 들판에서 나는 채소를 날 것으로 먹는 맛은 각별합니다.


솥에서는 개밥이 끓고, 아궁이 주변의 표고버섯들도 쑥쑥 잘 자라고 있습니다.
추워지면서 성장이 멈추었던 버섯 나무들을 아궁이 곁으로 옮기고 자주 물을 주었더니 버섯들이 다시 생장을 시작했지요.
몇 개씩 따다 된장국에도 넣어 먹고, 나물도 해먹는 맛이 또한 일품입니다.

낮에는 여행 왔다 폭풍주의보로 갇힌 민박 객 처자들과 숲으로 갔습니다.
퇴비 만들 낙엽을 긁어 모았습니다.
낙엽을 모으다 눈을 만났습니다.

숲 속, 동백나무, 생달나무, 후박나무, 참나무들 사이로 내리는 눈,
우리들 생애 한가운데로 그렇게 눈은 마구 쏟아져내렸습니다.
도시에서 온 처자들,
그들 인생에서 그토록 감동적인 풍경을 다시 보기는 결코 쉽지 않을 것입니다.

눈을 맞으며 부지런히 낙엽을 모아 자루에 담았습니다.
어제 혼자였을 때는 열자루의 낙엽을 모으는데 세 시간이 넘게 걸렸습니다.
오늘 다섯 명의 처자들과 함께 일을 하니 한 시간 반만에 열 다섯 자루의 낙엽을 모을 수 있었습니다.
사람 손이 무서움을 새삼 알겠습니다.

낙엽들은 썩혀서 퇴비로 만들어 돌아오는 봄 밭농사에 쓸 예정입니다.
동물들 분뇨를 사용하지 않고 퇴비를 만들려니 낙엽이 많이 필요합니다.
낙엽을 모으다 운지버섯도 땄습니다.
일이 끝나고 다들 김치전, 감자전, 야채전에 돌배 술도 한잔씩 마셨지요.


저녁 무렵에는 염소 먹을 풀과 나뭇잎을 한 자루 가득 뜯어다주었습니다.
봉순이게 물렸던 상처도 거반 아물어 염소는 건강을 아주 되찾았습니다.
새끼들이 잘 크고 있는지 염소의 배도 나날이 불러갑니다.

아궁이 속 장작 불꽃은 구들장 돌들을 덥히고, 고구마 구워지는 향내는 달큰합니다.
이제 군불 땐 사랑방에 들어가 시원한 동치미와 군고구마를 먹으며 연관스님이 옮기신 '죽창수필'을 다시 읽어야겠습니다.
더 바랄 것 없이 행복한 밤입니다.


하지만 나는 오늘밤의 이 행복이 마냥 즐겁지만은 않습니다.
나이 든 부모님들은 척박한 도시에서 각박하게 살고 계신데 젊은 나만 좋은 곳에서 온갖 호사를 누리고 있습니다. 불효막급이지요.
겨울밤이 깊어 갑니다.
밤이 돼도 바람은 잘 줄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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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이자 섬 활동가입니다. 사단법인 섬연구소 소장을 맡고 있으며,<당신에게 섬><섬을 걷다><전라도 섬맛기행><바다의 황금시대 파시>저자입니다. 섬연구소 홈페이지. https://cafe.naver.com/island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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