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윤리라고 하면 무엇을 해야 하고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일정한 규칙 준수를 떠올리기 쉽다. 게다가 현대인들은 "윤리"나 "도덕"적 주장들에 식상해하고 고리타분한 것으로 여길 때가 많다.
왜 그럴까? 이 책에 따르면, 그리스어로 "윤리"는 올바른 '존재 방식'의 추구, 또는 행위의 지혜를 뜻한다고 한다. 그러므로 윤리란 규칙 준수보다는 각자의 삶의 양식에 대해 반성하고 자신의 행위를 그 반성의 결과에 부합시키려는 노력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왜 윤리는 신뢰를 주지 못하는 걸까? 이 책은 윤리에 대해 근본적인 비판을 가하면서 시작한다.
저자가 보기에 오늘날 윤리란 벌어지고 있는 사회적, 역사적, 매체적, 기술·과학적 상황에 대한 어렴풋한 조절에 지나지 않는다. 실상 이것은 진정한 허무주의에 불과한 것이며 모든 사고에 대한 위협적인 부인이다.
따라서 저자는 이 단어에 전혀 다른 의미를 부여하고 추상적 범주들(인간, 권리, 타자..)이 아니라, 상황과 관계하며 개별적 과정들에 대한 지속 가능한 준칙, 진리들의 운명을 문제 삼는 것으로 변경하고자 시도한다.
그는 자신의 시도를 뒷받침하는 좋은 실례로서 서두에 '인간의 죽음'이라는 테마를 말하고 있다. 즉 "인간의 죽음"(곧 주체의 죽음)이라는 테마를 역설한 푸코, 알튀세, 라캉의 주장은 사람들의 운명에 대한 무관심, 냉소주의가 아닌 오히려 반란이나 기존 질서에 대한 근본적 불만족에 부합하는 것이었다.
반면에, 윤리와 인권이라는 테마는 서양 부자들의 만족에 찬 이기주의, 위력의 행사, 광고에 부합한다는 것이 입증되었다는 사실이다. 이 무슨 아이러니인가.
결국, 문제의 핵심은 윤리를 인권과 인도주의적 행위들에 일치시킬 수 있는 보편적 인간 주체의 가정에 있으므로 저자는 이런 윤리의 이데올로기적 장치를 던져버려야 한다고 말한다.
이를 위해 그는 '타자에 대한 윤리'로 오늘날 유행하는 레비나스의 주장에 대해서 도발적 반기를 들었다. 저자에 의하면, 레비나스의 기획에서 '동일자의 이론적 존재론'에 대한 '타자의 윤리학'의 우위는 전적으로 종교적 공리에 접맥되어 있다.
쉽게 말해서 레비나스가 집요하게 환기시키는 것은 "윤리는 필연코 종교적이다"는 명제다. 하지만 저자는 레비나스의(직설적인 언급은 피한다 하더라도) 신(神)을 상정한 공리를 결코 받아들이지 않으며, 레비나스가 주장하는 타자라는 것도 우리의 비위를 거스르지 않는 '좋은 타자'에 국한되지 않는가 의심한다.
가령, "자유의 적에게 자유란 없다"는 말처럼 그 차이가 바로 차이를 존중하지 않는 것에 있는 그러한 자들(가령, 근본주의적 이슬람교도)은 존중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럴 경우, 레비나스의 그 거창한 "타자"라는 것도 결과적으로 우리와 동일자에 지나지 않는 것이 되고 만다.
저자의 생각은, 무한한 다양성이란 단순히 주어져 있는 것일 뿐이며 어떠한 경험이라도 무한한 차이의 무한한 전개라는 것이다. 그는 심지어 자아 자신에 대한 반성적 경험조차도 통일성에 대한 직관이 아닌 차별화들의 미로일 뿐이라 말한다.
이 점은 그가 레비나스를 비판하기 위해 너무 상대주의적 입장으로 경사되지 않았나 하는 의문을 불러일으킨다. 비록 저자가 뒤에서 정치, 애정, 학문, 예술이 식별 가능함을 말하고 있다 할지라도 말이다. 그것은 자신이 무분별한 상대주의에 빠져드는 것을 막기 위한 자구책인 듯 하나, 규범을 거부하면서 규범을 말하고자 하기에 어설프게 보여 안타깝다.
어떠한 사람도 선과 악을 초월해 있을 수 없으며 "윤리"에 대한 사유도 사실은 선과 악에 대한 인간의 끊임없는 성찰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에서 악의 존재를 비중있게 다루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저자도 인정하듯 악을 단순히 선의 결핍이나, 플라톤처럼 진리의 부재 혹은 선에 대한 무지로 간주할 수 없다. 악의 문제가 그리 만만치 않다는 말이다. 악의 존재는 체계적 방식에 의한 '사례'에 의거하여 알 수 있다.
저자는 악이 비록 다양태적 존재의 한 형태로 식별되더라도, 선(혹은 진리) 그 자체의 가능한 효과로서 출현해야만 하는 것으로 본다. 요컨대 악이 존재하는 것은 진리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라는 사실이다.
저자는 이 책에서 윤리 준칙을 진리의 생성에 종속시키는, 받아들일 수 있는 윤리 개념의 재구성을 시도하였다. 그 준칙은 일반적 형식 속에서 '계속하시오!'라고 표명된다. 즉 다른 자들과 똑같은 인간은 동물이지만, 그럼에도 진리의 사건적 과정에 의해 포착되고 전위된 '어떤 자'이기를 계속하라는 것이다.
저자는 선(진리들)에 의존적인 악의 진정한 형상의 세 종류를 시뮐라크르(거짓된 사건에 대한 테러적인 충실자로 존재하는 것), 배반(자기 자신의 이해 관심을 위해 진리를 양보하는 것), 명명될 수 없는 것에 대한 촉성(促成) 또는 파국(진리의 힘이 전능하다고 믿는 것)이라고 말한다.
결국 그가 말하는 "진리들의 윤리학"은 "계속하시오!"라는 정언명령 하에서 식별의 자원(시뮐라크르에 말려들지 않기 위해서)과 용기(양보하지 않기 위해), 그리고 유보(총체성의 극단성들에 휩싸이지 않기 위해)를 결합시켜 기존 '윤리'의 추상적, 보수적 면모를 극복하고 진리들에 대한 자신의 고유한 충실성을 통해 진리들의 이면 또는 어두운 면으로 파악된 악을 피려고 하는 것이다.
철학 서적이지만, 분량이 작다고 만만하게 보고 덤볐다가 독해에 엄청 힘이 들었다. 게다가 제대로 읽었는지도 의문이다. 아직도 이해 안가는 내용들이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결론부분에 다다라서 되새겨 보니 대략 윤곽은 잡히는 것 같다. 인내심을 가지고 끝까지 읽어 가노라면 적지 않은 내용들이 독자들을 긴장시킬 것이다.
저자 알랭 바디우는 현재 파리 고등사범학교 철학과 주임 교수로 재직중이며 무게 있는 많은 저서들을 가지고 있다.
윤리학 - 악에 대한 의식에 관한 에세이
알랭 바디우 지음, 이종영 옮김,
동문선,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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