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학교로 발령 받은 지 벌써 한 달

<교육장편소설> 그 집의 기억 4

등록 2002.03.22 08:12수정 2002.03.22 1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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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 수가 없다니까. 언제 공사가 끝날지."
정릉천을 따라 우람하게 세워진, 그러나 아직은 교각만 서 있어 앙상해보이기도 하는 도심순환고속화도로 공사 현장을 올려다보며 나는 그렇게 중얼거린다.

퇴근시간, 아이들이 막 썰물처럼 빠져나간 운동장은 이제 햇살 차지다. 바라보기만 해도 저절로 눈살이 찌푸려지는 햇살이다. 눈부신 건 거울이나 물살만인 줄 알았다. 그러나 정말 눈부신 것은 텅 빈 운동장이었다. 오랜 세월 동안 십대 아이들의 기운이 다져놓은 운동장에는 햇살이 고스란히 되비쳐 올라왔다. 아니, 원래의 햇살보다 오히려 더 눈부셨다.

벌써 세 학교째. 이제 어느 정도 적응이 되었을 것 같았지만, 막상 학교를 옮기고 나면 적응하는 데 제법 시간이 걸리는 것은 마찬가지다. 이 학교로 발령을 받은 지도 벌써 한 달이 넘었지만, 내게는 여전히 낯설다. 아직 동료 교사들의 이름조차 다 외우지도 못했고, 그저 자신이 수업 들어가는 반을 제외하고는 어느 교실이 어디에 붙어 있는지도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그래도 저 운동장에 비치는 햇살은 다 같구나.'
아이들이 모두 빠져나가자 주섬주섬 가방을 챙기며 창 밖을 내다보다가 나는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런 생각이 들자 갑자기 이 학교가 그리 낯설게 느껴지지 않기도 했다.

전에 있던 학교 같으면 마음 맞는 선생 몇이 어울려 벌써 학교 앞 순대국집으로 향했겠지만, 아직은 아는 사람이 변변히 없는 새 학교였다. 가방을 옆구리에 꿰어차고 교문을 나서다가 고속화도로 건설 현장을 쳐다보며 미적거리고 있는 것은 딱히 바삐 가야할 곳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교무실에 남아 말부스러기라도 나눌 만큼 친한 사람도 없었던 탓이었다.

"뭘 그리 정신없이 보고 있어요?"
누군가 어깨를 툭 치며 그렇게 묻는다.
껑충한 키에 뿔테 안경, 싱긋 웃는 표정이 선해 보이는 임 선생이다. 이 학교의 최고 고참이라는 그는, 그러나 아직 이십대 후반이다. 발령을 받고 한 반년 남짓 근무를 하다 군대에 갔다 왔다는 그는, 그래서 발령 연도가 가장 앞서지만 남교사 중에서는 비교적 어린 축에 속한다.

"아, 예, 그저..."
나는 말꼬리를 흐린다. 임 선생도 나를 따라 고가도로 위를 쳐다본다. 아무 것도 없다. 그저 앙상한 교각 위로 스쳐가는 삼월 말의 바람 뿐. 큰 길 쪽으로는 교각 사이로 철골 구조물이 연결되어 있다. 아직 학교 앞까지 이어지지 못한 그 철골을 조금씩 옮겨가며 공사가 진행중인 것 같았다.
"재작년부터 공사가 시작되었는데 아직도 그대로인 것 같아요."
임 선생이 여전히 고가도로에 시선을 고정시킨 채 입을 연다. 그의 말소리가 아직은 차가운 꽃샘바람에 실려 흩어진다.


"언제쯤 공사가 끝난답니까?"
나는 임 선생을 곁눈질하며 묻는다. 수업에 들어가다 복도에서 마주친 그는 마치 황새 같았다. 껑충한 다리에 곧 무너질 듯 휘청이는 걸음으로 그는 교실을 향해 올라가고 있었다. 발이 땅속으로 꺼질 것 같은 걸음걸이였다.
"이천 년은 넘어야 된다던데요."
그의 이천 년이라는 말이 낯설다. 이천 년, 실감이 나지 않는 시간이다.

"그날이 올까?"
나는 혼잣말로 중얼거린다.
"예?"
잘 못알아듣겠다는 듯, 임 선생이 되묻는다.
"아, 아니요. 어디 가서 소주나 한잔 할까요?"
나는 말꼬리를 돌린다.
"거 좋지요."
임 선생이 반색이다. 그도 참 심심했나보다. 임 선생이 먼저 발길을 뗀다. 나는 말없이 그를 뒤쫒는다. 힐끔힐끔 고가도로를 곁눈질하며.
먼지가 자욱하고, 유리에 붙인 선팅 비닐이 너덜너덜한 학교 옆 소주집 문을 열며 임 선생이 멋적은지 한마디한다.
"이 집이 겉은 이래도 음식 맛이 제법이지요."
"아, 예에."


엉거주춤 자리를 잡고 앉으며 괜찮다는 투로 나도 입을 연다.
유리창 밖으로 정릉천이 내다보인다. 네모난 창으로 보이는 정릉천은 아직 겨울이다. 내다보이는 유리창의 삼분의 일쯤 치우친 곳에 앙상한 교각이 서 있어서일까?
정말 그의 말대로 김치찌개가 먹음직하다. 숭덩숭덩 두부를 썰어넣고, 아직 남아 있는 신 김장 김치를 버무려 끓여낸 김치찌개를 후후 불며 한 숟가락 떠넣던 임 선생이 갑자기 진지한 표정으로 묻는다.
"우리 학교 느낌이 어때요?"
느낌? 인상?

착임계를 작성하기 위해 들어서던 날이 문득 되살아난다. 낡은 건물이 운동장을 가로질러 길게 누워 있는 모습이며, 그 겉을 엷은 푸른 색으로 칠한 탓인지 아직 남아 있는 겨울 끝이 더 을씨년스러워 보였다. 먼지가 자욱하게 들어 붙어 있는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자 대낮인데도 어두컴컴한 복도가 마치 커다란 고래 입 속같이 이어져 있었고, 복도의 끝 부분에 자리잡은 교무실은 방이 아니라 그냥 트여진 공간처럼 휑뎅그레했다. 너무 넓어서 더 썰렁해 보이던 교무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난로가에 선생들 몇이 둘러앉아 바둑을 두고 있었다.

어서 오라는 말 한 마디 없이, 그들은 바둑에 열중하고 있었다. 한 사람은 앞머리가 끝간데를 모르게 벗겨져 있었고, 다른 한 사람은 길쭘한 얼굴에 광대뼈가 두드러져 보였다. 그리고 옆에서 훈수를 두는 사람은 젊은 얼굴에 몸집이 비대해 보였다. 저 대머리가 교감, 광대뼈는 교무주임쯤 되나보다, 나는 생각을 굴리며 낯선 풍경을 둘레둘레 살폈다.

"새로 오시는 선생님이십니까?"
그 소리는 전혀 엉뚱한 데서 들려왔다.
"예? 예에."
나는 엉겁결에 대답을 하며 소리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교감 책상 쪽에서 나는 소리였다. 그는 책상 밑으로 파고 들어갈 듯 의자에 파묻혀 있었다.
"그럼 여기 착임계 작성하시죠."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책상에서 착임계를 집어들었다. 일어선 그의 키는 앉은키나 별반 다르지 않았다. 나는 난필로 착임계를 작성하며 힐끗힐끗 바둑 두는 사람을 곁눈질했지만, 그들은 내가 안중에도 없다는 듯 바둑돌 놓는 소리만 딱, 딱 들려왔다.

훈수를 두던 사람이 일어나 난로불을 뒤적였다. 아직 난로를 땐다는 것도 이상한데, 놀랍게도 그가 연료로 쓰는 것은 나무였다. 나무를 때다니? 자세히 보니 나무는 나무인데, 책걸상 부서진 것들이었다. 그가 난로 속에 던져넣은 것은 의자 다리거나 책상 겉판을 잘라낸 것이었다. 그 중 어떤 것은 못이 숭숭 박힌 채였다.

나는 쓰던 착임계를 그냥 든 채로 그의 동작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문득 그가 난로 속에 던져 넣는 것이 나무조각이 아니라 그 나무 위에 앉아 있던 아이들의 숨결이나 영혼이 아닐까 하는 터무니없는 상상이 들었기 때문이다. 몸을 비비꼬며 지겨운 수업시간을 견뎌내야 했을 열네댓 살 중학교 아이들의 모습이 그 나무 조각을 보며 마치 낡은 필름처럼 떠올랐다.

그러자 아까 들어오면서 보았던 학교의 낡은 풍경과, 교무실의 을씨년스런 모습과, 거기에 마치 정물처럼 담겨 있는 사람들이 아주 오래된 사진처럼 느껴졌다. 1960년대나 70년대의 어느 날, 게딱지같이 엉겨붙어있는 산동네에서 세상을 내려다보며 찍었던 흑백 사진 한 장이 떠오른 것이다.

겨울, 굴뚝에서 번개탄 피우는 연기가 솟아오르고, 아직 소년 티를 벗지 못한 내가 억지 웃음을 짓고 있는 사진이었다. 그 사진을 보면 나는 매캐한 연탄 냄새와 봉지쌀과, 버스비가 없어 한시간 가까이 걸어가야 했던 동숭동 서울대 앞길을 떠올렸다.
착임계를 쓰던 그 날, 학교의 풍경은 시간이 더 이상 흐르지 않고 머물러 있는 과거의 어느 날로 돌아간 느낌이었던 것이다.

나는 한동안 그날의 기억을 되살리다 아무 느낌도 없이 이렇게 내뱉는다.
"글쎄요. 아주 낡은 집에 들어선 것 같았던가?"
내 대답에 임 선생은 빙긋이 웃는다.
"낡은 집이요? 그렇지요. 오래 된 집이지요. 아니 오래 된 연못인지도 모르지요. 흐르지 않아 고인 물들이 밑바닥부터 조금씩 썪어가기 시작하는."
그는 반쯤 남은 소주잔을 털어넣듯이 입안에 붓고는 찌개 냄비 속에서 두부조각을 건져낸다. 나는 얼른 그의 잔에 술을 붓는다. 그가 두 손으로 잔을 받아들고는, 비어 있는 내 잔에 술을 따른다.

잠시 침묵이 흐르고, 그가 다시 입을 연다.
"우리 학교는 양로원이랍니다. 교장도 교감도 정년퇴임을 앞둔 사람만 오지요. 위가 낡았으니 아래도 겉늙게 되고요. 그래서인지 아이들까지 겉늙어 보이고 말입니다."
그의 말을 들으며 나는 인상이란 안의 모습이 겉으로 드러난 풍경이라는 생각을 한다. 이 학교가 낡은 집처럼 보인 것은 그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에 움직임이 없기 때문이리라. 낡은 집에 역시 하나의 낡은 풍경으로 남아 있는 나 자신의 모습을 떠올리며 나는 문득 이 학교에서의 사 년이 얼마나 막막할 것인가를 짐작해 본다. 그리고 또 한편으론 흑백의 시절이 나 스스로에게 침잠할 기회를 주게 되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본다.

"아까 도심순환 고속도로 공사장 보셨지요?"
임 선생이 난데없이 공사장 이야기를 꺼낸다.
"예. 그런데요?"
나는 웬 난데없는 말이냐는 표정으로 그를 건너다본다.
"우리 학교가 바로 그 공사장하고 똑같답니다."
그런 말을 툭 던지고 그는 또 술잔을 집어든다. 단숨에 술잔을 털어넣는 그를 따라 나도 잔을 비운다. 제법 알딸딸한 취기가 오른다. 벌써 두 병이 바닥이 난다.

그가 다시 한 병을 주문하고 나서 말을 잇는다.
"작년 내내 저는 저 공사장만 쳐다보며 다녔지요. 출근할 때나 퇴근 할 때, 비는 시간 운동장에 나가 일없이 서서 바라보기도 했지요. 그런데 참 이상했어요. 일하는 사람이 하나도 보이지 않는 거예요. 저 큰 일을 하는데, 사람 그림자를 보기도 힘들다니. 어쩌다 두어 사람이 얼찟거리기는 했지만요. 그런데 어느 날 보면 철골 구조물이 조금씩 조금씩 앞으로 옮겨지고, 지나온 자리에는 시멘트 길이 만들어져 있거든요. 사람도 없고, 일하는 것 같지도 않은데 길은 조금씩 늘어나고 있었지요."

다시 임 선생이 술잔에 입을 댄다. 술 마시는데는 매우 급한 성격이구나. 그가 마시는 술이 목울대를 넘어가는 모습을 보며 나는 그런 생각을 한다.
"학교도 마찬가지예요. 공사장처럼, 밖에서 보기엔 아무 일도 없는 것 같은데, 속에서는 온갖 일들이 다 벌어지지요. 특히 우리 학교는요. 선생님도 이제 곧 느끼시겠지만, 참 일도 많고 탈도 많은 곳이지요. 그래도 겉으로는 언제나 평화로운..."
평화로운에서 그의 말이 갑자기 멈추더니 또 술잔을 든다. 나도 따라 술잔을 든다.
"자, 우리의 평화로운 학교를 위해 건배."
그가 건배를 외친다. 혀가 많이 꼬부라진 말투다.
"표면의 평화, 내면의 갈등을 위하여."
나도 그렇게 한마디하지만, 역시 내가 듣기에도 말이 휘어져 있다.

그날의 그 후를 우리는 기억할 수 없다. 다만 다음날 아침, 눈 떴을 때 내게는 햇살은 평온했지만, 위장은 갈등이 심했다는 것만 기억할 뿐. 쓰린 속을 움켜쥐고 출근하는 길, 교문 앞에서 나는 어제의 기억을 떠올리며 공사장을 쳐다본다. 역시 사람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학교와 공사장의 평화가 거기 아침 햇살을 받으며 공존하고 있다. 그리고 그 평화에 적응하지 못하는 1990년대의 무명 교사가 겉으로의 평화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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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 <장다리꽃같은 우리 아이들>, <작은 바람 하나로 시작된 우리 랑은>, <천년 전 같은 하루>, <꽃,꽃잎>, <물골, 그 집>, <람풍>등의 시집과 <비에 젖은 종이 비행기>, <꽃비> , <무지개 너머 1,230마일> 등의 소설, 여행기 <구름의 성, 운남>, <일생에 한 번은 몽골을 만나라> 등의 책을 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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