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들리면서 피어나는 아이들

그리움의 꽃

등록 2002.03.24 07:40수정 2002.03.29 1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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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점심 시간, 식당 앞을 지나는데 줄을 서 있던 한 무리의 아이들이 일제히 제게 손을 흔들었습니다. 갑자기 불어온 바람에 길가에 핀 코스모스들이 마구 몸을 흔들어대는 듯한 한 폭의 그림 같은 풍경이었습니다.

가만 보니 작년 담임 반 아이들이었습니다. 반가운 마음에 저도 함께 손을 흔들어주고 식당으로 들어서려는데 한 아이의 손이 내려지지 않고 그대로 나부끼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 아이에게 다가가 닿을 듯 말 듯 바짝 손을 마주하고 같이 흔들어 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아이는 손을 흔들다가 그만 무슨 마술에라도 걸린 듯 평생을 그렇게 흔들고 서 있을 것처럼 손을 내려놓지 않았습니다. 어쩔 수 없이 제가 먼저 손을 내려놓고 몇 걸음을 떼었다가 뒤를 돌아보니 그때까지도 그 아이는 그대로 손을 흔들고 서 있었습니다.

며칠이 지나 교무실에서 소영이가 저를 보더니 꾸벅 인사를 합니다. 저는 그때 일이 생각나서 하던 일을 멈추고 자리에서 일어나 소영이의 손을 덥석 잡아 주었습니다. 그리고는 머리를 쓰다듬어주자 소영이의 얼굴이 제 가슴께로 기울어지더니 무슨 슬픈 연기라도 하듯이 금세 두 눈에서는 눈물이 주르르 쏟아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날 저녁 소영이의 어머니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작년에도 소영이 문제로 자주 통화를 했던 터라 해가 지나 걸려온 전화였지만 아무런 허물이 없었습니다. 반가운 마음에 그간의 안부를 묻자 소영이 어머니는 다소 들뜬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선생님, 소영이가 이제야 철이 드나봐요. 오늘 학교 파하고 집에 오더니 지금까지 계속 울기만 하네요. 작년에 선생님 너무 속상하게 해드렸다고 하면서요. 그리고 선생님이 많이 그리운가 봐요."

작년 한 해 동안 소영이가 저를 그렇게 많이 속상하게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정도 많고 노래 실력도 프로 수준이어서 오히려 저를 즐겁게 해준 일들이 더 많았습니다. 다만, 소영이에게는 어떤 연유에서인지는 몰라도 가끔씩 평소의 활달함과는 너무나도 대조적인 심적인 위축감이랄까 피해의식 같은 것을 호소하곤 했었습니다.


학기 초였는데, 하루는 학교를 결석해서 집에 전화를 해보니 어머니가 받으시는데 무언가를 숨기고 있는 듯한 인상이었습니다. 나중에 학교로 오시게 하여 자초지종을 들어보니 혹시라도 담임인 제가 소영이에게 좋지 않은 인상을 가질까봐 숨기려고 했다고 하면서 솔직하게 속내를 털어놓았습니다.

"친구가 없다고 하면서 갑자기 학교를 나가지 않겠다고 거예요. 중학교 때도 그런 적이 몇 번 있었거든요. 그렇게 쾌활하던 애가 갑자기 저러니까 애가 터지네요. 아무리 달래도 제 말은 듣는 척도 않해요. 그러니 수고스럽지만 선생님이…"


그날 저는 소영이를 만나러 가지 않았습니다. 조금 시간이 걸리더라도 제 스스로의 힘으로 학교에 나오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 대신, 반 아이들에게 편지를 한 통씩 쓰게 하고 저도 또한 편지를 써서 모두 39통의 편지를 반장 손에 쥐어 주었습니다. 복학생으로 들어와 학교 생활을 잘 하고 있던 혜정이도 함께 보냈습니다.

나흘이 지나자 소영이는 혼자서 학교에 나왔습니다. 하지만 무슨 계절병처럼 네 차례나 똑 같은 일이 반복되고 있었습니다. 그때마다 저는 그 아이의 부족함을 이해해주고, 혼은 낼지라도 미운 기색은 절대로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한 해가 지나갔습니다. 그런데 봄방학을 며칠 앞 둔 어느 날 저는 소영이로부터 뜻하지 않은 한 통의 메일 편지를 받았습니다. 편지에는 이런 내용도 적혀 있었습니다.

'그날 선생님이 주신 편지를 읽기는 읽었지만 마음속에 깊이 담지는 않았어요. 그런데 어제 책상 서랍을 정리하다가 우연히 선생님의 편지를 다시 읽게 되었어요. 한 말씀 한 말씀 저를 생각하시며 쓰신 글들이 제 살 속 깊이 파고드는 것만 같았어요. 왜 그땐 몰랐을까요? 철이 든다는 것이 이런 것일까요? 선생님, 이제 곧 헤어질 시간이 돌아오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선생님이 많이 그리워질 것 같아요.'

이래 저래 저는 요즘 '그리움'이라는 말을 자주 듣습니다. 그것도 그리움을 모른다고 늘 저에게 말을 듣고 하던 아이들에게서 말입니다. 이제는 거꾸로 제가 아이들에게 그런 말을 자주 듣기도 합니다. 그럴 것이 저는 어느 새 과거를 다 잊은 듯 새로 만난 아이들과 새록새록 정이 드는 재미로 정신이 하나도 없기 때문입니다.

3월도 이제 한 주만을 남겨놓고 있는데 아직도 과거에 살고 있는 듯한 아이가 여럿 있어 마음이 무거울 때도 있습니다. 아이들이 새로운 환경에 적응을 못하고 있는 것이 제 책임인 듯 여겨지기도 합니다. 어제는 몇 아이가 연달아 집단 투서라도 하듯이 제 양복 주머니에 편지를 집어넣고 갔습니다.

안녕하세요...잘 지내시죠? 선생님이 넘 그리워요. 다시 일 학년으로 돌아가고 싶어요. 이제 선생님은 관광과 3학년 2반 담임 선생님이신데 이제 그 언니들에게만 신경을 쓰시는 것 같아서 좀 서운해요. 이제 우리를 만나도 그냥 인사만 하시고 지나가시는데 얼마나 밉던지...다시는 그러지 마세요!

안녕하세요? 선생님 저 신영이예요. 오늘 황사현상이라는 것 땜에 바람도 많이 불어요. 눈도 따갑고 목도 아픈 거래요. 조심하세요. 근데 2학년으로 올라와 쌤(선생님)의 사랑이 얼마나 크고 위대했던 것인지 알 것 같아요. 요즘 선생님이 보고싶을 때마다 선생님이 주신 생일시를 읽곤합니다. 선생님 말씀처럼 흔들리면서도 환해질 수 있는 신영이가 되도록 노력할게요.

저는 아이들에게 그런 내색을 하진 않았지만 아이들이 제가 준 작은 사랑을 추억하고 저를 그리워하고 있는 것이 여간 귀엽고 대견스럽지가 않습니다. 누가 뭐라고 해도 정말 소중한 것을 아이들에게 심어주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모르면 몰라도 사랑의 위대함을 안 아이들은 앞으로도 사랑 없는 삶을 꿈꾸지는 못할 것 같습니다. 가끔은 흔들리면서도 말입니다.

너의 흔들림에 대하여

산에 올라 너를 생각한다
바람에 이리저리 흔들리는 풀꽃들
허리까지 아프게 휘어지다가도
날렵하게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다
저 여린 것들은 흔들리면서
더 강해지고 더 깊어지리라

비바람 몹시 치던 날
너의 흔들림을 보았지
너의 아픔을 나는 보았지
허리까지 아프게 휘어지다가도
언제였냐는 듯이 돌아와 있는
흔들리면서도 흔들리면서도
기어이 꽃 한 송이 매달고 마는

그때 네게 불어오던 비바람을
나는 막아주고 싶지 않았단다
사랑은 그런 것이 아니라고 믿었단다
다만 너의 흔들림을 지켜보는
먼 항구의 등대가 되었으면 했단다
흔들리면서도 외롭지 않도록
흔들리면서도 환해질 수 있도록

흔들리지 않고 피는 生이 어디 있으랴

이제 너를 찾아오는 비바람을
너는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겠구나
너의 줄기가 이미 강하고
너의 뿌리가 깊어져 있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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ㄹ교사이자 시인으로 제자들의 생일때마다 써준 시들을 모아 첫 시집 '너의 이름을 부르는 것 만으로'를 출간하면서 작품활동 시작. 이후 '다시 졸고 있는 아이들에게' '세상 조촐한 것들이' '별에 쏘이다'를 펴냈고 교육에세이 '넌 아름다워, 누가 뭐라 말하든', '오늘 교단을 밟을 당신에게' '아들과 함께 하는 인생' 등을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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