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뻐라, 아기염소, 너무 맛 있겠네"

강제윤의 <보길도 편지>

등록 2002.04.08 13:23수정 2002.04.08 1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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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제윤


물 속 잉어 물풀을 뜯고
땅 위 염소 들풀을 뜯네
연못가 사람 글을 뜯고
저문 바람에 동백꽃 지네


오늘도 어김없이 젖병을 들고 세연정 옆 풀밭으로 갑니다.
폴짝거리며 뛰어놀던 아기 염소들이 쪼르르 달려옵니다.
그 중에서도 막내 녀석이 가장 반가워합니다.
몸 크기는 다른 놈들의 반 토막밖에 안 되는데 며칠 우유를 먹였더니 이제 제법 쌩쌩해지고 털에 윤기도 돕니다.

어미가 출산한 지 사흘째 되는 날 아침,
풀을 베다 주러 갔더니 막내 녀석이 일어나지도 못하고 곧 숨이 넘어갈 듯이 엎어져 눈도 뜨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코에 귀를 대보니 다행히 가는 숨을 놓지는 않고 있었습니다.
처음 초유를 먹은 뒤 한 차례도 젖을 얻어먹지 못했는가 배와 등가죽이 붙어 있었습니다.
나도 참 너무했습니다.

젖이 많이 나오라고 부지런히 어미 염소 풀만 뜯어다 주었지, 그 젖이 제대로 분배되는지는 확인해볼 생각은 미처 못했으니 말이지요.
초식의 유순한 염소들이니 무슨 일 있겠느냐는 안일한 생각이 화를 불렀습니다.

육식의 동물들에 비해서 염소가 순한 것은 사실이지만 염소들 세계를 지배하는 법칙 또한 엄연한 약육강식의 법칙임을 몰랐습니다.
삶이란 그토록 치열하고 잔인한 것을.

어미는 젖꼭지가 두 개뿐입니다.
어미가 잠깐씩 주는 젖을 먹기 위해 젖꼭지 두 개를 두고 네 놈이 달려들었으니 힘 없는 놈에게는 애당초 차례도 오지 못했던 게지요.
더러 차례가 오더라도 곧바로 힘센 놈에게 밀려 젖꼭지를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부랴부랴 집으로 데려다 따뜻한 이불로 덮어주고 우유를 사다 데웠습니다.
하지만 막내는 먹을 힘조차 없는지 젖병을 물려줘도 도대체 먹지를 못했습니다.
겨우 강제로 입을 벌리고 차 숟가락으로 몇 수저 떠넣어주었지요.
그리고, 한동안 재웠습니다.


참, 산다는 것이 뭔지.
우유 몇 숟갈 들어갔다고, 잠을 깬 막내가 기운을 차려 일어나 보려고 안간힘을 쓰더군요.
하지만 몇 번을 그러다 그냥 주저앉고 말았습니다.
다시 젖병을 억지로 물렸습니다. 한참을 물리고 있었더니 조금씩 빨기 시작하더군요.
아기 염소는 결국 다시 살아났습니다.
힘센 놈들에게는 먹거리가 쾌락의 수단이 되기도 하지만 약하고 힘없는 놈들에게는 이렇듯 먹는 것에 늘 생사가 달려 있습니다.

그렇게 어렵게 살아난 녀석이 이제는 내가 먼발치에서 보이기만 해도 정신없이 달려와 젖을 달라고 보챕니다.
아무나 지나가는 사람만 보면 달려들어 아는 체를 하고 젖을 달라고 손가락이며 옷자락 등을 빨아댑니다.
그 하는 짓이 너무도 귀엽고 사랑스럽습니다.


젖을 주고 세연정 연못가 풀밭에 앉아 책을 보는데 한 떼의 관광객들이 몰려옵니다.
염소 가족을 본 한 아주머니가 성큼 다가옵니다.
뛰노는 아기 염소들이 사랑스러운지 얼굴에 반가움이 가득합니다.

"와 이뻐라, 너무 이쁘다. 어머 많이도 낳네."
아주머니는 감탄을 연발합니다.
사람이든 가축이든 어린 새끼들이 이쁘지 않을 까닭이 없지요.
아주머니가 새끼들로부터 사랑스런 눈길을 거두지 못하고 한 마디합니다.

"그런데 한 마리 먹어봤는데 이게 그렇게 맛있어요. 냄새도 안 나고. 하이고 이쁜 녀석들."
쩝, 아주머니는 입맛을 다십니다.
쩝, 나도 씁쓸하게 입맛을 다십니다.

"한번 안아 봐도 돼요?"
어미가 싫어 할 텐데요.
"그래도 한번만 안아볼게요. 어쩜 이렇게 이쁠까."
아주머니는 막내를 품에 쏙 안고 머리를 쓰다듬어 줍니다.
겁도 없이 막내는 아주머니의 어깨로 기어 오르려 합니다.

"내가 산이 좀 있어서 애들을 키울려고 하는데,
너무 맛있어요. 몸에도 그렇게 좋아요 글쎄."

어미는 그렇거나 말거나 부지런히 풀을 뜯고, 새끼들은 뛰어놉니다.
어미 염소는 많은 풀들 중에서 유독 쑥만을 골라 먹습니다
"어머 쑥만 먹네."
예, 쑥을 아주 좋아하더라구요.
"그래요, 맞어. 그렇게 좋은 것만 골라 먹으니 고기가 그렇게 맛있지. 아고 이쁜 것들."

아주머니는 아쉬운 듯 새끼를 내려놓습니다.
"잘 키우세요. 돈 벌었네. 좋겠어요."

아주머니는 염소들로부터 눈길을 거두지 못하고 자꾸 뒤돌아보며 길을 갑니다.
"그게 그렇게 맛있어. 잘 키워야 돼요."
아주머니가 손을 흔듭니다.
봄볕에 아지랑이가 아른아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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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이자 섬 활동가입니다. 사단법인 섬연구소 소장을 맡고 있으며,<당신에게 섬><섬을 걷다><전라도 섬맛기행><바다의 황금시대 파시>저자입니다. 섬연구소 홈페이지. https://cafe.naver.com/island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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