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도날드와 물쓰

등록 2002.04.15 08:44수정 2002.04.16 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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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내린다. 주룩주룩 내리는 비로 온 학교가 축축하게 젖는 느낌이다. 넷째 시간도 이미 거의 다 지나가고 있다. 나머지 오 분. 오늘 분량의 진도를 마친 나는 아이들에게 이번 시간에 배운 부분을 외우라고 하고, 창 밖을 내다본다. 빗줄기가 제법 거세다. 유리창에 부딪친 빗물이 눈물처럼 흘러내린다. 교실 밖 오동나무 잎새가 쉴 틈 없이 흔들린다. 시험지만큼이나 커다란 잎새로 빗줄기를 고스란히 받아내는 때문이다.

창문을 조금 열어본다. 빗줄기가 그 틈을 노렸다는 듯 열린 공간으로 몸을 비집고 들어온다. 얼굴과 팔에 빗방울이 슬쩍슬쩍 와 닿는다. 마치 비가 내 몸을 간지럽히는 것 같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창가에 바싹 붙어선다.

운동장 여기 저기 빗물이 고랑을 이루고 있다. 그 고랑으로 빗물이 고여 흐른다. 흐르다 멈추고, 멈추었다가 흐른다. 운동장 가로 솟아 있는 버즘나무들도 비에 젖는다. 잎새를 쉴 새 없이 흔들며, 오랫동안 몸으로 받아 냈던 먼지들을 털어낸다. 아이들의 발끝에서 피어오른 흙먼지를 다시 운동장으로 내려보내며, 버즘나무는 빗줄기 속에 의연히 서 있다.

어린 시절, 돌기와집이었던 우리 시골집 마당에는 비만 오면 땅강아지들이 여러 마리 나오곤 했다. 그 땅강아지들을 잡아 가지고 놀던 기억이 운동장을 보며 새삼 떠오른다. 때로는 미꾸라지가 지붕 위에서 떨어지기도 했던 시골집, 이제는 허물어지고 터만 남아 있는 그 집을 떠올리며, 나는 내가 지금 발 딛고 있는 이 학교 역시 시간의 오랜 흐름을 견뎌내다 이제는 낡을 대로 낡아버려 빈터만 남은 곳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한다.

숱한 세월 동안 제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고 살아와, 건물도 낡고, 선생도 낡고, 가장 팔팔해야 할 아이들까지 낡게 느껴지는 곳, 미래에 대한 희망도, 과거에 대한 그리움도 다 기억 속에서조차 지워져 버린, 그래서 이제는 그저 그 자리에 풍경처럼 남아 있는, 흐르지 않는 물 같은 학교.

나는 그런 생각을 지워버리기라도 할 것처럼 머리를 휘휘 내젓는다. 그러다 주위를 둘러보니, 아이들 몇 명이 나처럼 창가에 매달려 창문을 조금 열어놓고, 내리는 비를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다. 아이들도 비가 내리면 마음이 가라앉나 보다.

그때 마치는 종이 길게 울린다. 나는 말없이 교재를 집어들고 교실 문을 나선다. 복도가 온통 물기로 축축하다. 그 축축한 복도를 미끄러지며 아이들이 달려 내려간다. 내 몸을 툭 치며 달아나는 녀석도 있다. 나는 그런 아이들의 뒤로 천천히 계단을 내려선다. 복도 계단 쪽 창문이 열린 곳으로는 빗줄기가 들이쳐 물이 흥건하다.


후관 일층으로 내려와 본관 쪽 통로를 따라 걷는데, 오른편 매점 쪽에 아이들이 늘어서 있다. 통로로부터 매점까지 이삼 미터 정도 되는 좁은 곳에, 빗줄기를 온 몸으로 받아내며 아이들 몇이 줄을 서 있다. 아르바이트로 매점에서 빵과 음료수를 파는 아이들이 아직 내려오지 않았나 보다. 아이들은 매점 문이 열릴 때까지 그렇게 비를 맞으며 기다리고 서 있다.

"얘들아, 이쪽에 와 기다리렴."
내가 그렇게 말하지만 아이들은 그저 나를 힐끔 쳐다볼 뿐, 그 자리를 그대로 지키고 있다. 마치 이쪽 통로에 와 서 있으면 빵이나 음료수를 살 수 없다는 것처럼.


나는 그런 아이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걸음을 옮긴다. 내가 본관 교무실로 들어설 때까지 아이들은 그 자리에 마치 풍경처럼 그대로 서 있다.

셋째 시간과 넷째 시간이 내리 붙어 있어 미처 점심을 해결하지 못한 나는 책상 위에 책을 휙 던져두고 다시 교무실 문을 나선다. 후관 뒤편 허름한 창고처럼 붙어 있는 식당에 가는 길이다.

통로를 따라가다 보니 아직도 아이들이 매점에 늘어서 있다. 그새 아르바이트하는 아이들이 내려와 문을 열었는지, 몇몇은 빵과 음료수를 들고 교실로 달려간다. 그래도 늘어선 아이들은 줄어들지 않는다.
"삼백 빵 하나, 음료수 둘."
한 녀석이 크게 소리 지른다. 그러자 창구 안에서 삼백 원짜리 빵 하나와 음료수 두 개가 나온다.
"오백 빵 둘."
이번에는 오백 원 짜리 빵이 둘 나온다.

언제부턴가 아이들은 삼백 원짜리 빵은 삼백 빵, 오백 원짜리 빵은 오백 빵이라고 불렀다. 점심시간이 지나고, 그날 들어온 빵이 매진되면 아르바이트로 빵을 파는 아이들은 창구 위쪽에 커다랗게 <삼백 빵, 오백 빵 매진>이라고 써 붙였다.

나는 느릿느릿 식당으로 향한다. 억지로 한 끼 때워야 한다는 의무감 때문이다. 음식을 맛으로 먹기 시작한 기억이 아득하다. 어떻게 먹었는지 모르게 한 끼를 해치우고, 이쑤시개를 물고 식당을 나선다. 여전히 비는 그치지 않고 내린다. 나는 식당을 나서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쳐다본다. 학교 옆, 담과 바로 붙어 있는 삼층 집 마당의 수수꽃다리 잎새가 빗줄기에 마구 흔들린다.

슬쩍 식당 뒤편으로 걸어가 본다. 쓰레기가 잔뜩 쌓여 있는 뒤편에도 비가 하염없이 내린다. 금방 머리가 흠뻑 젖는다. 오랫동안 치우지 않아 이것저것 쓰레기가 쌓이고, 아이들이 피우다 버린 담배꽁초에 학교 밖에서 담 안으로 던져 넣은 것 같은 맥주 깡통도 눈에 띈다. 비는 그런 세상의 모든 것들 위에 내린다. 그 쓰레기 더미 속에 잎을 틔운 잡초들도 함초롬히 비에 젖어 있다.

생명이란 얼마나 귀한 것인가? 아무리 척박하고 지저분한 곳이라도 제 자리를 삼으면 저렇게 뿌리를 내리고 생명의 표식을 드러내기 마련이로구나.

나는 쭈그리고 앉아 한참동안 그 잡초를 굽어본다. 고개를 돌리니 옆에는 민들레가 노란 꽃송이를 들고 비에 젖어 있다. 쓰레기 더미와 눈부신 노란 민들레가 대조적이다. 나는 비에 젖은 민들레 꽃송이를 슬쩍 만져보고 자리에서 일어선다. 이미 내 머리와 윗도리는 비에 흠뻑 젖어 있다. 힐끗 여전히 흔들리는 이웃집 수수꽃다리를 훔쳐보고, 다시 본관을 향한다.

매점 쪽을 지나다 보니 이제 아이들은 다 사라지고, 아르바이트를 하는 학생이 매점 창구 위에 무언가를 내다 건다. <삼백 빵, 오백 빵 매진>이다. 곁에 하나를 더 건다. <내일부터 햄버거 판매. 먹도날드 햄버거 하나에 오백 원>이라고 쓴 종이다. 나는 그만 피식 웃고 만다. 맥도날드를 슬쩍 빌려다 먹도날드라는 이름으로 바꿔 쓴 그 기지 때문이다.

교무실 내 자리로 들어서자 우리 반 민웅이가 삐죽거리고 있다.
"왜?"
나는 눈짓을 곁들여 묻는다.
"저어, 조퇴 좀 시켜주세요."
"조퇴? 왜?"
내가 다시 묻자 녀석은 머리를 긁적이며 우물거린다.
"엄마가요... 일찍 오랬어요. 시골 할아버지 제사에..."
작년에 돌아가신 할아버지 기일이란다. 일찍 출발해야 한다는, 그래서 조퇴를 좀 했으면 한다는 아침에 걸려온 민웅이 어머니의 전화가 그제야 떠오른다.

"응. 그래. 연락 받았다. 그런데 너 머리가 그게 뭐냐?"
녀석의 머리가 하늘을 향해 온통 화를 내듯 꼿꼿이 서 있다.
"........."
녀석은 말없이 다시 머리를 긁적인다.
"임마, 무쓰 바르면 안 된다고 했지. 조퇴보다 너 먼저 가서 머리 감고 와라."
그러자 민웅이가 다시 머리를 긁적이며 기어 들어가는 소리다.
"저어, 이거.... 무쓰 아니고 물쓴데요."
"뭐라고? 물쓰? 물쓰가 뭐냐?"
내가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는 투로 되묻자 녀석이 그제서야 싱긋 웃으며 한 마디 한다.
"물 바른 거라구요."
"물?"

나는 녀석의 머리를 슬쩍 만져본다. 무쓰가 아니고 물이다. 무쓰를 바르지 못하게 하니까 물을 발라 무쓰의 효과를 낸 것이다.
"헛, 참."
나는 어이가 없어 그만 말을 잇지 못한다.
조퇴증을 써주고, 교무실 문을 털레털레 나가는 민웅이를 보며, 나는 무쓰가 아니라 물쓰라고 하는 녀석의 말과, 아까 매점에 써 붙인 먹도날드 햄버거 판다는 광고지를 생각하고, 그리고 비를 맞으며 나가 본 식당 뒤편 쓰레기 더미 속의 노란 민들레꽃을 떠올린다.

아무리 척박한 땅이라도 몸 기댈 언덕만 있으면 생명을 피워내는 민들레꽃처럼, 늘 얻어터지고 벌받고 고함과 잔소리에 가득한 학교 안에서도 아이들은 제 나름의 향내를 품어 올린다. 비록 정식 맥도날드 햄버거는 먹지 못해도, 무쓰를 바르지 못하고 물쓰를 발라도, 아이들의 건강한 생명력은 하루가 다르게 세상에 뿌리를 내리리라.

머리의 물기를 닦으며 나는 다시 창 밖을 바라본다. 자욱한 빗줄기가 아까보다 더한 기세다. 이제 저 비 그치면 세상 가득 푸르름이 차오르리라. 그 푸르름으로 아이들 더 싱싱하리라. 그 날을 기다리며 나는 크게 심호흡을 한 번 한다. 비릿한 비 내음이 온 몸에 스며드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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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 <장다리꽃같은 우리 아이들>, <작은 바람 하나로 시작된 우리 랑은>, <천년 전 같은 하루>, <꽃,꽃잎>, <물골, 그 집>, <람풍>등의 시집과 <비에 젖은 종이 비행기>, <꽃비> , <무지개 너머 1,230마일> 등의 소설, 여행기 <구름의 성, 운남>, <일생에 한 번은 몽골을 만나라> 등의 책을 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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