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벼 줘

<교육 장편 소설> 그 집의 기억 14

등록 2002.04.19 08:13수정 2002.04.21 1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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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살이 제법 두껍게 느껴진다. 점심시간, 아이들이 자욱하게 먼지를 일으키며 내달리는 운동장에 나가보면 햇살로 머리 위가 따갑기도 하다. 그래도 아이들은 신나게 운동장을 뛰어다닌다. 몇 팀인지도 모르게 서로 어울려 공을 내몰고 달리는 아이들이 신기하다.


오늘도 운동장에 나온 축구공은 모두 다섯 개다. 그러니 적어도 다섯 팀이 축구를 하고 있는 셈이다. 좁아터진 운동장에서 아이들은 용케도 자기편과 상대편을 구분하여 공을 넘겨주고 넘겨 받는다. 요리조리 공을 몰고 상대편으로 돌진하는 아이들의 재주가 정말 놀랍다. 많은 아이들이 뒤섞여 있어 공을 몰고가다가 분명 다른 아이에게 부딪칠 것 같은데도 아이들은 아이들 틈을 물 흐르듯 빠져나간다.

한 녀석이 운동장 왼쪽 자기편 골대에서 공을 몰고 상대편 골문까지 질주한다. 그러다 다른 팀의 공을 몰고오는 녀석과 아슬아슬하게 몸을 스치며 슛을 쏜다. 나는 그런 아이들을 바라보다 그만 오금이 저린다. 마음이 풀썩 주저앉기도 한다.
'저러다 서로 부딪쳐 마빡이라도 깨지 않을까?'
그러나 아이들은 번번이 내 기대를 비웃듯 서로의 틈 사이로 빠져나간다.

정현종 시인은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고, '그 섬에 가고 싶다'는 시를 썼지만, 점심시간 아이들이 뛰노는 운동장을 보면 이런 생각이 든다. 아이들 사이에 틈이 있다. 그 틈을 아이들이 물처럼 흐른다. 축구공이 물 위에 떠 함께 흐른다. 그리고 그 틈 사이에서 아이들은 자란다.

예비종이 울린다. 그러나 운동장에서 신나게 공을 차는 아이들에게는 그 종이 들리지 않는다. 나는 슬금슬금 교무실로 들어온다. 자리에 앉자, 운동장에서 묻어 들어온 먼지들이 머리카락 사이마다 숨어 있는지 머리끝이 버성대는 느낌이다. 손가락으로 머리카락을 빗질하는데, 미적미적 민웅이가 들어온다.
"왜?"
가까이 다가온 민웅이 얼굴에 좁쌀 만한 뾰루지가 군데군데 돋아나 있다. 얼굴 전체가 붉으죽죽한 게 꼭 술이라도 한 잔 걸친 녀석 같다.
"아파요."
민웅이가 기운이 하나도 없는 목소리로 한 마디 한다.
"어디 보자."
나는 민웅이의 이마를 짚는다. 열이 있는 것 같다.
"양호실에 가보자."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민웅이와 함께 양호실로 간다.

"이거 풍진인 것 같은데. 아무래도 조퇴하고 병원에 가야 될 것 같다."
양호선생이 녀석의 얼굴을 살피고 열을 재보더니 그렇게 결론을 내린다.
"풍진은 법정 전염병이니 결석 처리는 하지 않아도 됩니다. 병원에 가봐서 풍진이라고 하면 다 나을 때까지 학교에 나오지 않게 해야 합니다."
그 말에 녀석이 벌쭉 웃는다. 아마 결석처리도 되지 않고 학교에 안 와도 된다니 좋은가 보다.


나는 민웅이에게 가방을 싸들고 교무실로 오라고 하고 자리로 돌아온다. 잠시 후 민웅이가 가방을 짊어지고 내려온다. 나는 조퇴증에 풍진이라고 써서 내민다.
"병원 가보고 풍진이라면 내일부터 다 나을 때까지 집에서 쉬어라. 내가 이따 집에 연락해볼게."
"예. 안녕히 계세요."
녀석은 꾸벅 인사를 하고 털레털레 사라진다. 아까 아프다고 할 때보다는 오히려 기운이 솟아난 것 같아 보인다. 나는 민웅이네 집에 전화를 걸어 어머니께 사정을 설명하고, 병원에 다녀와 연락을 달라고 한다. 오후, 민웅이 어머니가 전화를 한다. 풍진이 맞다고, 며칠 쉬게 해야겠다는 말이다. 열이 높아 걱정이라는 말도 덧붙인다.

다음날, 직원회의에서 양호선생이 풍진 주의보를 발령하고, 선생들은 또 올 게 왔다는 듯 수런거린다. 해마다 이맘 때면 풍진이 아이들을 쓸고 지나간다고, 사흘 정도는 열이 높아 고생을 해야 된다고, 그래서 삼일열이라고도 한다는 풍진 때문에 전전긍긍인 사람은 아이들이 아니라 교사들이라고 수근수근하는 소리가 교무실에 웅웅거린다.


풍진은 전염병인데, 특히 임신한 여선생이나 앞으로 결혼을 할 처녀선생에게는 아주 위험하다고 한다. 기형아 출산 가능성이 높다는 양호선생의 말에 몇몇 여선생들 얼굴이 질리기도 한다. 아이들에게서 전염될 가능성이 크고, 그렇다고 전염이 무서워 수업에 들어가지 않을 수도 없으니 이거야말로 진퇴양난이다.

조회가 끝나자 몇몇 반 아이들이 교무실로 들어선다. 그 아이들 얼굴도 뾰루지가 여드름처럼 돋아나 있다. 풍진이다. 조퇴증을 써주고, 집에 연락을 하느라 부산하다. 우리 반도 두 녀석이 내려왔다. 인호와 효원이다. 민웅이에게서 옮은 것일까? 나는 두 녀석 모두에게 조퇴증을 써주고, 집에 연락도 해주고, 가방 싸들고 집에 가라고 하고는 한숨을 돌린다. 두 녀석은 조퇴증을 들고 교실로 뛰어 올라간다.

잠시 후, 나는 교무수첩을 들고 교실로 들어간다. 아침 조회를 하기 위해서다. 교실 문을 여는데, 아이들이 서로 엉켜 부산하다.
"뭐야? 제자리 앉아!"
내 목소리에 아이들이 후다닥 제 자리를 찾아 뛴다. 미처 사태를 파악하지 못한 몇몇이 가방을 등에 맨 두 명을 붙잡고 마치 싸움이나 하듯 얼굴과 얼굴을 마주 비벼대고 있다. 자세히 보니 가방을 멘 녀석은 인호와 효원이다.
"너희는 집에 가라니까 여태 뭐하고 있는 거야?"
나는 그들이 서로 싸움을 하다 멈춘 줄 알고 소리를 빽 질렀다.
숫기가 없고 늘 교실 가로만 빙빙 도는 효원이가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대답을 한다.
"그냥 갈라고 했는데요 쟤들이 자꾸 비벼주고 가야 한다고 해서요."
인호도 그랬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뭘 비벼줘?"
나는 영문을 몰라 되묻는다.
"얼굴이요."
"얼굴을 비벼?"
나는 무슨 소린가 하고 엉겨 있던 아이들을 살펴본다. 늘 장난이 심하던 세용이, 철주, 두진이다. 녀석들 모두 고개를 푹 숙인 채 면목이 없다는 투다. 인호가 설명을 덧붙인다.
"얼굴 비비면 풍진 옮는다고, 풍진에 걸리면 결석 아니라고 해서요..."
"뭐어? 허, 참."
더듬더듬 이어진 설명을 들으며 나는 그만 어이가 없어진다. 그러니까 풍진에 걸리면 학교에 오지 않아도 결석이 아니니 풍진을 제 몸에 옮기려고 이미 풍진에 걸린 두 녀석의 얼굴에 제 얼굴을 비벼댔다는 것이다.

나는 세용이, 철주, 두진이 세 녀석의 머리에 꿀밤을 한 대씩 선사하며 한마디한다.
"임마, 비비는 것은 비빔밥이지 얼굴이 아냐. 그렇게 학교 오기가 싫냐?"
얼마나 학교가 싫었으면 풍진에 걸리려고까지 할까. 나는 씁쓰레한 웃음만 되씹으며 교실을 나올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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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 <장다리꽃같은 우리 아이들>, <작은 바람 하나로 시작된 우리 랑은>, <천년 전 같은 하루>, <꽃,꽃잎>, <물골, 그 집>, <람풍>등의 시집과 <비에 젖은 종이 비행기>, <꽃비> , <무지개 너머 1,230마일> 등의 소설, 여행기 <구름의 성, 운남>, <일생에 한 번은 몽골을 만나라> 등의 책을 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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