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수궁 터에 이민족 숙소를 짓는다?

우리가 과연 문화국민인가?

등록 2002.05.31 00:36수정 2002.06.04 1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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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미국대사관 측은 우리의 옛 덕수궁 터에 8층짜리 직원아파트와 4층짜리 군인숙소를 지을 수 있도록 우리의 주택건설촉진법 시행령을 개정해 달라고 정부에 요구했다고 한다.

미국이 이제 미쳐도 단단히 미쳤다. 제 정신이 아니다. 제 나라 대사관 직원 숙소를 지을 수 있도록 우리의 법개정을 요구하는 지경에까지 이른 것이다. 우리도 미국 버지니아주의 윌리암스버그 한복판에 주미 한국대사관의 숙소를 지을 수 있도록 그 곳 법을 개정해 달라고 해볼까?

그 걸 요구하는 미국도 제 정신이 아니지만 우리는 더욱 제 정신이 아니다. 우선 주한 미국대사를 만난 건설교통부 장관부터 제 정신이 아니다. 무엇 때문에 건설교통부 장관이 대사를 만나 그런 청탁을 받고, 특혜를 주기 위한 법개정을 추진해야 하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게다가 주무국장인 건설교통부 이춘희 주택도시국장의 해명은 가관이다. 그는 "군인아파트, 청소년 수련원 등의 경우 주택건설촉진법 시행령 적용에 있어 예외를 인정해야 한다는 논란이 있어왔다"며 "차제에 이 시설을 포함해 외교관용 아파트도 이런 규정에 포함시킬 계획"이라고 했다 한다.

대단한 우리의 관료다. 군인아파트와 청소년 수련원에 대한 예외규정의 필요하면(그것도 사실 여부를 확인할 길은 없다) 그것만 개정하면 그만이지 무엇 때문에 역사적으로 전례가 없는 해괴한 짓을 하려 하는가. 여기엔 국민적 자존심을 생각한다든가 고뇌한 흔적이 눈곱만큼도 없다.

우리나라가 프랑스로부터 고속전철을 도입할 무렵 프랑스 대통령은 우리나라에서 약탈해간 '직지심경'의 반환을 약속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것을 소장하고 있던 박물관의 직원들이 거부하고 나섰고, 그것을 핑계로 프랑스는 반환을 미뤘다. 그리고 지금까지 돌려주지 않고 있다. 만일 프랑스의 고궁 터에 남의 나라 대사관 직원의 숙소를 짓겠다고 했다면 그들은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제 나라 고궁 터에 남의 나라 대사관 직원의 숙소를 짓겠다는 것은 약탈해간 문화재를 반환하는 것과 비할 수 없이 큰 사태다. 그런데 우리나라 관료는 고작 그 동안 논란의 대상이 되어왔다며 특혜를 베풀지 못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우리 관료들에게 프랑스 관료의 수준을 요구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차이가 너무 많이 나지 않는가. 하다 못해 버티는 척이라도 해야하는 것 아닌가? 하긴 나라의 수준이 그런데 어찌 관료의 수준만 가지고 나무랄 수 있겠는가.


미국은 상황파악을 정확히 하고 있다. 우리가 처음에는 반대하는 시늉을 하다가 결국 물러서리라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사례는 얼마든지 있다. 용산 미군기지에 미군 아파트를 짓는다고 할 때에도 우리는 한동안 반대하다가 결국은 수그러들었다. 미제 고물전투기를 들여오는 FX사업도 전 국민적 저항에 부딪히는 듯했으나 결국 대통령의 재가가 났다. 그들은 우리가 잠시 그러다 말 거라는 것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맛을 아주 단단히 들였다. 용산 주한미군 기지 내의 고층 아파트 건으로 큰 재미를 보더니 이번엔 아예 우리의 심장부에 있는 고궁 터에까지 그네들의 숙소를 짓겠다고 나선 것이다. 강심장도 보통 강심장이 아니고 오만도 보통 오만이 아니다. 내년엔 또 무슨 요구를 하려는지 궁금해진다.


고국에서의 이런 소식이 너무 답답하여 영국 출장 마지막 날 아침 다른 계획을 취소하고 영국박물관에 다시 갔다(우리나라의 많은 사람들은 영국박물관(British Museum)을 대영박물관이라 부르고 있으나, 나는 잘못되었다고 생각한다. British Museum은 영국박물관일 뿐 일본인들이 부르듯 대영박물관이 아니다. 우리가 무엇 때문에 그들의 박물관을 '대영제국'의 박물관으로 불러야 하는가).

그 동안 여러 차례 갔었고 그 전 주에도 갔기 때문에 다시 가볼 필요는 없었다. 그런데 돌아가기 전에 영국인의 문화사랑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고 여겨졌다.

비가 부슬부슬 오는 일요일인데도 사람들이 붐볐다. 메인홀 계단에는 이탈리아에서 수학여행 온 학생들이 인솔한 여교사의 설명을 듣고 있었다. 나는 영국박물관의 Parthenon Galleries 부근에 재현해놓은 Nereid Monument 앞에서 이 글을 쓰기 시작했다.

영국박물관에 처음 갔을 때 나는 그 엄청난 규모에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이젠 적응이 되었지만 그때의 충격은 참으로 컸다. 내가 살아온 세상과 너무나 다른 세상이 그곳에 있었다.

어떻게 남의 나라에서 그 많은 유물을 훔쳐올 수 있었는지, 그 많은 유물을 훔쳐다가 제나라 안방에서 버젓이 전시할 생각을 할 수 있었는지, 전쟁을 하면서 그 많은 유물을 챙길 여유와 안목이 있었는지, 그렇다면 전쟁은 그 유물들을 약탈하기 위해 벌인 문화전쟁(?)은 아니었는지 등등의 생각을 했다.

1층 서편 전시장에 가면 이집트, 그리스, 로마 등지의 유물이 전시되어 있는데, 우선 그 규모에 압도된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테베 람세스왕의 대형 조각상, 상형문자가 새겨져 있는 엄청난 무게의 돌로 만든 관, 신전의 돌기둥, 이집트의 미이라 군상 등 그 나라의 유물 전체를 통째로 옮겨다 놓은 듯한 착각을 느끼게 만드는 전시관에는 그들이 훔쳐온 엄청난 양의 돌조각이 정확하게 어디엔가에 맞춰져 있다. 그리고 그 수많은 돌조각, 유물 하나하나에 연도와 그림에 대한 설명이 붙어 있다.

그것은 엄청난 소장유물 중의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하루 종일, 일주일을 보아도 제대로 다 못 볼 것 같은 엄청난 양의 유물이 세계 각지에서 약탈하거나 구입되어 전시되어 있다.

그러나 그들이 그곳에 모셔놓은 것은 남의 나라 유물뿐이 아니다. 그들의 유물 또한 정성스레 발굴하고 보존, 기록해 놓고 있다. Sutton Hoo Ship Burial은 그 대표적 예라 할 수 있다. 박물관 안뿐만 아니라 밖에서도 마찬가지다. 런던이라는 도시 자체가 그들의 역사를 짚어볼 수 있을 정도로 옛날의 건물, 유물, 유적이 그 장소에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가히 도시 자체를 거대한 박물관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말이다.

나는 런던에 여러 번 갔다 왔는데 그때마다 나름대로 열심히 구경을 다녔음에도 아직도 가고 싶은 곳, 못 본 곳이 많이 남아 있다. 런던 시내에는 명물인 이층버스가 하루 종일 수도 없이 많은 관광객들을 태우고 다니고 있다. 그만큼 그들의 유적, 유물 등을 잘 보존해 놓고 있고 볼거리가 많다는 것이다.

런던 교외의 수많은 성채와 크고 작은 유적지는 거의 원형 그대로 잘 보존되어 있어 가는 곳마다 관광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나도 런던 교외의 윈저성이나 중세의 리즈(Leeds)성, 그리고 캔터베리 성당과 스톤헨지 등을 보고 그 원형이나 유물 보전상태에 찬탄을 한 적이 있다. 그들에게서 글로써 설명하기 어려운, 그들의 역사와 유물을 온전히 보존하려는 숭고하기까지 한 그 어떤 것이 느껴지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우리의 옛 왕조의 터에 이민족의 숙소를 지으려고 하고 있다. 그것도 아예 논쟁조차도 없이 기정사실화되고 있는 중이다. 어떻게 이런 발상이 가능하단 말인가. 그것도 문화공간도 아니고 공원도 아닌 숙소를 짓는다니. 거기에 궁을 복원해 놓고 우리의 아픈 역사를 가르쳐도 시원찮을 마당에 이민족의 배설물이 흘러다닐 숙소를 짓는다니? 미쳤다. 미쳐도 단단히 미쳤다.

우리가 우리의 것을 온전히 보전한 것이 과연 몇 점 되는가. 세계에 내놓을 것이 몇 톨이나 남아 있는가? 서울에 외국인들을 데리고 다니며 자랑스럽게 보여줄 수 있는 곳이 몇 군데나 되는가. 몇 군데 갔다오고 나면 금방 밑천이 동나는 것이 우리 서울이다.

그런데다 우리의 것이 제대로 보존된 게 별로 없다. 우리의 수많은 성은 이미 다 스러지고, 어쩌다 있다 해도 보존이 잘 안 되어 있으며, 문화라는 것도 그 부근에서 고기나 구워먹는 수준이다. 아니면 그 위에 아파트나 짓든지.

미국은 우리 알기를 하인 정도로 알고 있는 것이다. 어떤 무리한 요구든 들어주리란 것을 알고 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남의 나라에 와서 그 나라의 고궁에 그들이 살 집을 짓겠다고 한단 말인가. 미국이 우리 아닌 다른 나라에서 그런 요구를 한 전례가 있을까? 독일에서? 일본에서? 그곳에선 아마 미쳤다고 상대도 안 해줄 것을 알기에 언감생심 그런 말을 꺼내지도 못할 것이다. 그런데 얼마나 우리를 우습게 보기에 감히 그런 뻔뻔스러운 요구를 한단 말인가.

이상한 것은 이 일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그저 몇몇 시민단체의 대표들일 뿐, 일반 시민들로부터는 반대의 목소리가 별로 들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 국민은 우리의 고궁 터에 이민족의 숙소를 짓는데 찬성한단 말인가. 그리고 그 시민단체 사람들도 기자회견 한번 한 것으로 할 일을 다 했다고 생각하고 있는지 그 후로는 아무런 얘기가 없다.

일반 국민들은 그렇다 치자. 그러면 문화예술인들은 도대체 무얼하고 있단 말인가? 평소에 글 쓰네, 문화공연 하네, 예술 합네 하며 떠들던 사람들은 이 중요한 사태를 앞에 두고 다 어디로 가고 없는가.

그런 문화예술질한다는 자들도, 관료질하는 자들도 모두 제 정신이 아니다. 언론질하는 자들도 미쳤고, 정치질하는 자들도 미쳤다. 전 국민이 제 정신이 아니다. 도대체 무엇이 부끄러운 일인지도 모르고, 멸시를 멸시로 받아들이지 못할 정도로 제 정신이 아니다.

그리하여 나는 진지하게 묻는다. 우리가 과연 문화국민인가? 누가 나의 이 질문에 진지하게 답해주기 바란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대자보에도 올렸습니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은 대자보에도 올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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