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오시는 날
하늘 어둑어둑해지더니, 남산 쪽이 먼저 캄캄하다. 교과서를 읽다 힐끗 창 밖을 보니 흡사 초저녁 같다. 금방 비가 쏟아질 분위기다. 유월 말부터 장마라는 기상대의 예보대로 지금부터 시작인 듯 싶다.
교실 구석구석 습습한 기운이 맴돈다. 아이들도 착 가라앉아 있다. 습기는 인간을 비활동적으로 만드나보다. 평소 같으면 수업시간이거나 말거나 소근소근거리기 십상인데, 요 며칠은 아이들이 눅눅해져 있다.
교과서를 읽으며 힐끗 창 밖을 내다본다. 먼지 자욱하게 날리던 운동장도 습기를 잔뜩 머금고 주저앉아 있다. 푸른 잎새가 싱그러운 목련나무도, 아름드리 고목을 휘감고 하늘을 타넘는 능소화도, 아직 푸른 기가 많은 앙징스런 열매를 달고 있는 꽃사과나무도 모두 어두컴컴한 세상을 향해 서 있다.
수업이 중간쯤 진행되었는데, 마침내 빗줄기가 후두둑 내리기 시작한다. 창가에 있던 아이들이 힐끗힐끗 밖을 내다보더니, 슬며시 창문을 닫는다. 아마도 빗줄기가 창을 넘어 교실에까지 쳐들어오는 때문이리라. 그러나 습습한 기운은 이미 온 교실에 다 퍼져버린 상태다. 마치 물통에 먹물이 퍼지듯 내 몸 속으로도 그 습기가 파고드는 것 같다.
물기를 빨아들이는 솜처럼, 내 마음 차분하게 가라앉는다. 분필을 들고 칠판에 몇 자 적는데, 분필이 툭 부러진다. 다른 분필을 잡아들고 계속 써보지만, 역시 툭툭 부러진다. 습기 때문이다.
이제 장마가 본격적으로 시작될 낌새다. 며칠 변죽을 울리며 빗방울이 듣더니, 드디어 장마철이다. 그리고 머지 않아 기말고사가 실시되고 나면 한 학기가 끝나리라. 그렇게 세월이 흘러가고, 나는 물가에 선 나그네처럼 이 자리에서 흐르는 시간을 바라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에 잠기는데, 길게 끝나는 종이 울린다. 아이들은 인사도 하는 체 마는 체 우루루 교실을 빠져나간다. 나는 다시 한 번 힐끗 창 밖의 빗줄기에 눈길을 주고, 천천히 교실에서 나온다. 비 때문에 운동장에 나가지 못한 아이들이 복도 이곳저곳에 모여 재잘댄다. 어린 시절 비오는 날 처마 밑에 모여 부리를 부벼대던 참새떼 같다.
어떤 개인 날
며칠째 장대비가 쏟아지더니 오늘은 하늘이 더없이 맑다. 눈부시게 푸른 유월 하늘이다. 바라보면 금세 눈물이 쏘옥 쏟아질 것같이 맑다. 평소에는 침침하던 도시가 가슴까지 시원하도록 환해진다. 길 건너 아파트 숲도, 멀리 남산도 손에 잡힐 듯 가깝다.
그 맑은 하늘이 너무도 고와 수업시간 내내 힐끗힐끗 창 밖만 바라본다. 그런 내 마음을 눈치챘는지 아이들도 내 시선을 따라 창밖에 눈길을 준다.
세상이 온통 오늘처럼만 맑다면 얼마나 좋을까?
"와, 정말 하늘 맑다."
"시원해 보인다, 그지."
그렇게 소곤거리는 아이들의 목소리조차 맑아 보인다.
마음 더 없이 차분하게 가라앉는다. 어떤 개인 날, 유월 하루가 그렇게 해맑은 강물처럼 흘러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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