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3선거, 뭐 하나 제대로 준비된 게 없었다"

개표 사무원의 13시간

등록 2002.06.16 14:28수정 2002.06.16 1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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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표위원 여러 해 만에 이번 같은 경우는 처음이다. 이리 준비도 없는 곳은 진짜 처음이다. 진작 시작해야했었는데 이게 뭐꼬? 이래가지고 재미나게 개표하겠나?"

공문에 3시 50분까지 개표장으로 모이라고 하여 미리 시간을 맞춰 제 시간에 도착했는데도 사람들이 바깥에 모여 있을 뿐, 첫 절차인 등록도 시작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시간이 지날수록 운동장엔 차와 사람들이 많아졌다.

대부분 교사로 이뤄진 개표 사무원들은 불만을 내놓으며 화를 냈지만 누구하나 선관위 측에 말하는 사람이 없었다. 50분이 지나서야 등록이 시작되는 지 사람들이 한 줄로 선다. 마치 지네발처럼 꿈틀꿈틀 움직이고 있었다.

등록은 참 허술했다. 신분증과 도장은 그냥 하는 말이었고, 자기 이름을 찾아 서명만 하면 개표 작업료를 받을 수 있었다니 아침 내내 찾았던 수고가 민망할 정도였다.

함께 간 선생님이 하도 답답해서 선관위 사람에게 물었다.

"등록을 왜 이제야 시작합니까?"
"저는 잘 모릅니다. 그저하라고 하니까 하는 겁니다."

황당해진 우리는 처음으로 방송을 듣게 되었다. 개표할 함들이 아직 다 도착하지 않았으니 저녁을 먹고 시작하자는 것이었다. 결국 사람들은 또다시 줄을 서게 되었다.


옛말에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는 말이 있다. 시간 약속을 어긴 행위에서 시작하여 시간이 지날수록 제대로 된 구석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오죽했으면 개표 사무원을 처음 해보는 우리가 허술하다고 느낄까.

결국 우리는 7시가 되어서야 개표에 관한 오리엔테이션을 듣게 되었는데, 넓은 강당에 울려퍼지는 마이크 소리인데도 무슨 말인 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책상 위에 놓여진 안내 책자도 볼 사람 보라는 식으로 달랑 하나씩만 놓여져 있었다. 차라리 두 사람 당 하나씩이라도 있었다면 그 불편함을 덜어줄 수 있었을텐데.(유·무효 분별이 너무 애매하다) 책자를 읽느라 50여분이 흐르자 어떤 사람이 그만 개표 시작하자며 말을 던졌다. 그때서야 그럼 시작하겠노라고 하는 것은 무엇인지.


함이 모두 들어온 시간은 8시 30분. 그 때부터 새벽 5시까지 꼬박하고 나니 투표용지의 파란색이 하얀색으로 보일 정도였다. 이미 동은 터있고 어깨와 손가락을 주무르며, 집으로 돌아오는 데 모두들 아무 말도 없었다. 13시간. 한 시간당 4,800원 꼴의 노동은 돈 생각이 나도록 만들었다. 오죽하면 계산까지 했을까. 6만원이 그냥 6만원이 아니었다.

더 맥이 풀린 것은 우리나라 사람들은 "찍어야할 사람"과 "될 사람"을 너무 잘 알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개표 도중 월드컵의 영향인 듯 "안정환"과 "황선홍"이 씌여진 표도 나왔다. 무시할 수 없었던 것은 무효당이라고 이름 지을 만하게 무효표가 많이 나왔다는 것이다. 아예 투표를 하지 않는 사람도 있었지만 당당하게 무효표를 낼 수 있다는 것도 사회의식을 잘 반영하는 듯 하다.

처음 개표사무원을 경험하며 느낀 점과 검토·수정해야할 사항을 여러 사람의 의견을 참조하여 모아 보았다.

1. 등록 절차 나 기타 일정에 대한 안내 벽지나 안내 방송이 없었다.일부 방송이 있었지만 방송 시설이 미비하여 무슨 소리인지 알아 들을 수가 없었다.

2. 등록 절차 미비 : 신분증과 도장을 지참하라고 했지만, 신분증은커녕 도장 대신 대부분 사인을 했고, 본인 여부는 가리지도 않았다.

3. 개함·점검부와 심사부, 집계부로 나뉘어져있었지만 한 책상 당 15인이 넘는데도 안내지는 달랑 한 장이었다. 안내 지 속에 유·무효를 식별하는 안내문이 있었지만 자세히 연구하지 않는 한 거의 무효표에 가깝게 보여 다시 만들어졌으면 한다고 입을 모았다.

4. 개표사무원이 오랫동안 일을 할 것을 대비하여 책상과 의자의 높이를 알맞게 맞춰야하는데, 책상이 너무 높아 쉽게 피곤해졌다.

5. 음료수나 차 및 간식의 준비가 소홀했다. 음료수대에 컵도 제대로 챙겨져 있지 않았고, 과자와 빵을 주면서 음료수가 떨어졌으니 물을 마시라는 말을 했다. 어차피 규정에 나와 있는 간식비였을텐데 어떻게 사용하는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갖다주어야되는게 아니냐고 큰 소리를 내자 어디선가 뺏어왔다며 내밀었다.

6. 화장실의 경우 여자 화장실 한 칸(처음엔 문도 닫혀있었다.)과 남자 화장실 하나였다. 남자고등학교여서이긴 하지만 그런 배려도 없었다니 실망이었다.

7. 모이는 시간부터 점점 늦어진 시간에 대한 공식적 사과도 없이 단지 투표함이 늦게 도착하여 일이 늦어진다고 변명을 했다. 위원장에게 쪽지를 써서 공식 사과를 하라고 해서야 겨우 '불편'을 끼쳐 죄송하다고만 했다.

8.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서 마련한 "유·무효 투표예시" 안내문 다시 만들어야한다. 개표위원이 보기에 유표투표 예시와 무효투표예시에 많은 혼동이 있고, 아무리 봐도 거의 대부분은 무효투표 예시가 아닐까 싶다. 실제로 개표할 때 그런 경우가 종종 나와 심사부로 넘겼지만 참 고욕이었을거라 생각한다.

대부분 정확하게 투표용지에 기입을 하지만 무효표를 만들려고 할 때나 여러 장난(?)을 해놓는다고 생각한다. 가령 투표용지에 기표를 해놓고 용지 맨 아래 "안정환"이나 "황선홍"을 써놓은 경우나 여러 후보의 란에 기표를 해놓은 경우는 바로 판명이 나지만, 두 후보의 경계선 상에서 더 많이 기표가 가 있는 것은 유효표라고 보고, 아예 절반 똑같이 경계선 상에 있다면 무효표로 본다는 것은 얼마나 잘 못된 것인가. 내가 보기엔 다 무효다. 무효표를 만들려고 한다면 굳이 그렇게 정확히 반을 갈라 경계선 상에 기표하지도 않고, 유효표를 만들기위해 지지하는 후보쪽에 기표를 더 가게 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 더 예를 들면, 정확히 기표를 하고 그 옆에 투표자의 "무인"이 묻어있을 경우는 무효다. 하지만 인육(도장밥)이 묻어있는 경우는 유효다. 내 보기엔 다 유효든지 다 무효라고 해야한다 생각한다. 선관위에서 그렇게 만든 이유는 있겠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분별이 되지 않는다. 이렇듯 중앙선관위에서 만들어놓은 "유·무효 투표예시 "는 다시 검토해보고 수정되어야한다.

9. 선거관리위원회 관계자들이 책상에만 앉아서 이래라저래라 시키지만 말고 직접 돌아다니며 무엇이 문제인지 파악하고 신속 정확하게 개표할 수 있는 조치를 취해야한다. 제대로 들리지도 않은 마이크에 대고 개표하는 사람들에게 하는 말인지 참관인에게 하는 말인지도 모르게 하고, 화만 버럭 지를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개표를 도와주지는 못 할망정 개표에 방해를 하지 않았으면 하는 생각이 굴뚝 같았다. 형식에만 치우치지 말고 좀더 실속있는 행정이 실시되길 바란다.

10. 개표를 담당하는 사무원이 대부분 현직 행정담당자이거나 교사라고 알고 있다. 그들의 신분을 믿어서 그렇게 많이 뽑혀왔는 지 모르지만 자의든 타의든 개표 사무원으로 왔다면 그 의무를 다해야한다고 본다. 어떤 부분의 사람들은 손놀림이 빨라 여러 통을 개표하는 데 어떤 부분의 사람들은 늦장을 부리는 것을 보았다. 나중에는 화가 나서 일부러 바깥에 나가 쉬고 왔을 정도인데 더 우스운 것은 일을 많이 한 사람들에게 또 돌아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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