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압은 풀고 죽음은 살리는 '춤꾼'

[인터뷰] 6월 항쟁 시국춤꾼 이애주 교수

등록 2002.06.26 14:12수정 2002.07.04 0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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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애주 교수는 혼의 신명을 다해 '시국춤'을 추며 6월 항쟁의 불씨를 지폈다.

그의 춤은 산 자와 죽은 자를 진혼하는 데 그치지 않았다. 죽은 자는 죽음의 불꽃으로 온 강산을 불태우게 했고 산 자들은 산 자의 부끄러움과 분노로 폭압의 사슬을 끊도록 떨쳐 일어서게 했다. 그의 춤은 절망의 역사와 몸짓에 신명을 돋게하고 항쟁의 함성을 지르게 했다. 그의 춤은 배후조종자였다.

하 수상하던 시국도 시절도 끝나 어느덧 15년의 세월이 흘렀다. 억울한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 모였던 시청 광장에는 붉은 악마의 물결로 채워졌다. 6월의 죽음과 부활의 싸움으로 인해 워키토키와 검문의 군대들은 사라졌고 사람들은 자유의 걸음으로 마음껏 활보하고 있다.


87년 6월의 뜨겁던 아스팔트에 휘몰아치던 그의 춤을 가리켜 사람들은 '시국춤'이라 불렀다. 한 시절 시대의 부름에 충실했던 사람들은 '이애주'를 마음에 새기면 몸과 마음이 달아오른다. 격렬함을 뛰어넘어 혼의 신명을 다한 그의 춤과 그의 이름을 부르면 뜨거운 노래가 튀어 오른다.

▲ 6월 항쟁당시 이한열 열사의 죽음을 달래주었던 이애주 교수의 '시국춤', 역사를 소용돌이를 피하지 않은 사람들은 그의 춤을 잊지 못한다.
87년 6월 항쟁 당시 고 이한열 장례식에서 '시국춤'을 추었던 이애주(56·서울대) 교수가 29일 국립극장에서 열리는 '한-베트남 평화예술제 2002(총연출 박치음)'에서 '한춤공동체'와 함께 이번 공연을 위해 창작한 '연꽃춤'을 처음으로 선보인다.

이 교수는 이번 연꽃춤을 통해 죽음의 진흙탕에서 생명의 꽃을 피워내려고 한다. 그리고 평화의 시대를 갈망하며 죽음의 시간들을 씻어내고자 한다. 지난 21일 과천의 작업실에서 그를 만나 그의 춤 이야기를 통해 지난 시대와 현재를 되돌아보았다. 다음은 이애주 교수와의 일문일답.

- 6월 항쟁의 '시국춤'이 15년 흐른 오늘, 베트남 양민의 억울한 죽음을 진혼하는 '연꽃춤'을 추게 된다. 이 두 춤의 연관성은 무엇인가.
"'시국춤'이 민주화의 열망을 불꽃으로 점화시킨 춤이었다면 '연꽃춤'은 평화와 생명을 꽃피우고자 하는 춤이다. 연꽃은 진흙탕에서 모든 더러운 것을 정화시키며 피어나는 꽃이다. 베트남의 진흙탕은 죽음이 산화되고 피와 뼈가 엉켜진 지옥 같은 곳이다. 핵무기, 총칼 등 온갖 무기들과 인간의 처절한 죽음이 스며 있는 그 진흙탕에서 순고하고 청결한 생명을 피어내고자 하는 게 연꽃춤이다."

- 이번 평화예술제를 통해 서로 총구를 겨누었던 베트남과 한국의 평화예술인들이 손을 맞잡고 새로운 평화의 세기를 갈망하게 된다. 이 행사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생명력이 가야할 바람직한 방향이다. 한국군이 개입한 것은 베트남 민족의 생존과 역사의 자주성을 훼손한 잘못된 선택이었다. 전쟁은 모든 생명을 죽이는 데 기여할 뿐 그 무엇도 새롭게 하지 못한다. 베트남 전쟁뿐 아니라 지구촌의 모든 전쟁은 중단되어야 한다. 지구촌 모든 것이 화해하고 용서해야 한다. 양국의 예술인들이 평화의 손을 맞잡는 것은 매우 소중한 출발이지만 한국은 베트남에 대해 반성하고 자각하는 근본의 바탕에서 진정한 화해를 이루어야 한다. 잘못된 역사와 오류를 방치하고 무조건 손 잡는다면 진정한 친구가 될 수도, 화해를 이룰 수도 없다고 생각한다."


▲ 이애주 교수는 29일 열릴 '한-베트남 평화예술제'에서 선보일 '연꽃춤'의 막바지 연습에 몰두하고 있다. ⓒ 오마이뉴스 조호진
- 양민학살로 인해 구천을 떠도는 영혼들이 베트남과 이 땅에 너무 많다. 선생의 춤이 이들 억울한 영혼들을 위해 어떤 몫으로 작용되길 바라는가.
"우리 춤에는 버림받고, 짓눌리고, 억울한 죽음을 당한 이들의 몸짓이 담겨 있다. 87년 '시국춤'은 그러한 눌림의 터져나옴이었다. 억울한 죽음들이 산 자로 하여금 역사적 자각을 일깨우게 한 것이다. 당시 시국춤(일명 바람맞이춤)은 한 인간이 타인에 의해 짓밟히고 인간성을 말살 당했지만 우리에게는 그것을 극복할 힘이 있다는 몸부림에서 탄생됐다.

지금 상황도 그때와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역사의 겉모양은 달라졌지만 곧은 정신이 굽혀지고, 짓밟힘 당하고, 짓눌려지고 있다. 역사적 과오가 씻겨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구천을 떠도는 영혼들을 진혼하면서 맑게 정화해야 한다. 연꽃이 피어나듯이 깨끗하고 청결한 생명력이 다시 일어나 솟구쳐야 이 세상은 가름질치며 앞으로 정진할 수 있다. '연꽃춤'이 편하게 웃고 나눌 수 있는 세상을 위해, 전쟁과 학살에 의해 죽어간 이들이 원혼을 풀 수 있는 춤이 되길 원한다."


- 춤을 통해 반독재 투쟁과 반전반핵 평화운동을 해왔다. 또 대중들은 선생의 강렬한 춤을 또렷이 기억하고 있다. 그런데 뜸해졌다. 그 동안 어떻게 지냈는가 궁금하다.
"겉으로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요즘도 역사적 진혼을 위해 춤을 추고 있다. 얼마 전에는 동학진혼 굿춤을 추었다. 백년 전에 우금치에서 퇴각 당한 동학군 2만 명이 전남 장흥에서 관군과 싸워 산화했다. 그러나 억울한 죽음의 피를 달래는 동학비가 아직 세워져 있지 않다.

마침 연어사랑 모임이 장흥에서 연어 방류하는 행사가 있어 동학진혼굿을 했다. 동학군뿐 아니라 희생된 관군을 위한 진혼굿도 겸했는데 역사적 화해를 통해 갈등과 대립이 씻겨나가길 빌었다. 이날 진혼춤 역시 죽음을 딛고 생명의 살아남을 기원하면서 탐진강 물줄기에 광목 150마를 펼치며 길닦음을 했다. 시대 상황이 변해 눈에 안 띄었지만 역사적 진실과 원혼을 달래는 일들을 지속해 왔다."

- 선생과 함께 하던 진보 예술인들이 뿔뿔이 흩어져 제 갈 길로 가면서 대중들에게 실망을 준 경우가 있다. 선생께서는 87년 이후 어떤 고민을 하며 살아왔는지 궁금하다.
"88년 범민족대회의 평가회에서 이런 판에서 일할 수는 없다, 반성해야 한다는 문제 화두를 남기고 현장을 떠났다. 그리고 춤에 대해 고민하면서 우리 몸짓과 우리 춤 안에는 굉장한 역동과 진보가 무서울 정도로 담겨 있는 것을 다시금 깨달았다.

춤은 역사와 시대 상황과 함께 간다. 그것은 우리 몸짓의 본질이다. 지금은 87년 상황보다 어떤 면에서 더 많이 들떠있고 난장판이고 어지러운 상황이다. 들뜬 것은 눌러주고 안으로 끌어 당기며 본질적인 힘을 밖으로 내보내는 몸짓이 필요하다. 그동안 내면을 다지기 위해 고민했다.

87년 이후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들뜨고 각자 정리가 안된 상태에서 10년 후 통일이 되면 누가 책임질 것인가. 북쪽이 할 것인가, 남쪽이 할 것인가. 이건 뭐 다 정리가 안돼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각자 자기 자신을 성찰하고 자각하고 반성하며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마음을 가졌다.

날치는 몸짓 대신 발걸음 하나, 팔 하나 드는 것부터 새롭게 시작하면서 그렇게 10년을 정리하다 보니 중요 무형문화재 27호 승무예능보유자가 됐다. 전통춤에 몰입했지만 틀에 얽매여선 안 된다고 생각한다. 때로 진보적인 사람들은 전통춤을 오해하지만 그 전통춤에는 1만년의 역사가 축적되어 나온 몸짓이다."

1만년의 역사가 축적된 몸짓, 거기서 87년 항쟁의 몸짓이 나오고 베트남의 연꽃춤이 태어난다고 본다. 어마어마한 1만년의 몸짓을 어떻게 깨달은 것인가. 그런데 요즘 후배들은(다는 아니지만) 만년의 몸짓을 단순한 감각으로 흉내내려는 것 같아 걱정이다."

▲ '한-베트남 평화예술제에 대해 의견을 나누고 있는 박치음 교수(총연출)와 이애주 교수. 이애주 교수는 이번 공연의 춤감독을 맡아 한춤공동체와 함께 공연을 펼칠 예정이다. ⓒ 오마이뉴스 조호진

- 역사적 고민을 통해 생산된 춤과 감각에 의해 날뛰는 춤은 분명 차이가 있는 것 같다. 우리에게 춤은 무엇이고, 어떤 춤을 추어야하는지 듣고 싶다.
"춤은 마음을 통해 나온다. 몸과 마음이 합해져 춤을 추면 무심(無心)하고 연결된다. 몸과 마음, 숨, 정신이 연결되는 것을 선이라고 하는데 이 네 가지 단계가 일치될 때 비로소 춤이 된다. 그런데 요즘은 기능, 기법으로 움직이는 걸 춤이라고 부른다. 정신과 연결된 몸짓이 춤으로 이어질 때 삶과도 일치된다. 그런데 삶과 춤이 분리됐다. 춤뿐 아니라 모든 문화와 운동까지 그런 것 같다."

- 시대의 변화를 운동이 뒤따르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 있다. 진보적 예술인으로서 좋은 세상을 만드는 사람들이 어떻게 해나갔으면 좋겠는가.
"춤의 정신과 철학에서는 바르게 살고, 바르게 걸어나가고, 바르게 생각하는 것을 정도라고 부른다. 그런데 정도가 아닌 행동이 일어나기 때문에 문제가 발생한다고 본다. 시대와 세상은 변화하는데 자꾸 87년 상황에 사로잡히는 게 문제인 것 같다. 우리 춤에는 무한한 영원성과 해방성, 자율성이 있다. 그리고 그 안에는 중심이 있는데 역사를 변화시켜야 할 사람들마저 중심 없이 너무 흔들리는 것 같고 너무 떠 있는 것 같다. 가라앉아야 된다."

- 문화권력에 의해 우리 문화가 정체성을 상실했다는 지적이 있다. 춤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 무엇을 고민하고 있는가.
"춤이든 문화예술이든 정치상황과 사회상황과 함께 맞물려 간다. 어느 것이 앞서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각자 중심을 잡고 바르게 살고, 바른 정신으로 바른 사회를 일굴 때 춤도 바르게 출 수 있다. 춤만 잘못된 것이 아니라 여타의 문화예술 분야도 일그러졌다. 일제시대에는 '춤'을 '무용'이라 불렀고 '그림'을 '미술'이라고 부르며 우리의 문화를 일그러뜨렸다. 그때(일제 잔재)의 틀로 우리 학문이 인식되고 더군다나 서구학문이 어지럽게 들어오면서 문화예술, 학문 등 모든 것이 난립됐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고 본질도 모른 채 떠 있다. 춤도 사상도 자기 자신을 찾아가야 한다."

- 분단이 극복되지 않는 한 평화는 위협받을 수밖에 없다. 전쟁이 사라지는 날, 그리고 평화의 시대를 위해 추고 싶은 춤은 무엇인가.
"엊그제 금강산에서 남북통일 대축전할 때 금강산에서 춤을 췄다. 분단된 이후 처음으로 남북한 해외동포가 금강산에 모여 춤과 소리와 시로 만났다. 일단 시작은 됐다. 그런데 틀에 박힌 부분을 어떻게 트면서 완전히 풀어야할지 숙제다. 이날 막판에 손에 손잡고 평화의 강강수월래를 추었는데 앞으로도 끊기지 말고 이어져 평화의 민족으로 하나가 됐으면 좋겠다.

단군 이전에 심신수련 영강도라는 소리가 있었다. 거기에는 오장에서 소리가 뿜어져 나오는 데 그것은 우리 민족 고유의 평화의 몸짓이고 소리다. 이 땅의 선조들은 그렇게 살았는데(평화의 몸짓과 소리로) 근현대를 맞으면서 잘못되기 시작했다. 차츰 역동적인 역사에 의해 무엇인가 원점을 향해 움직이고 있는데 조금만 되돌리면 원점으로 돌아갈 것 같다. 원점으로 돌아가 중심을 잡을 때 모든 세계도 바른 자리를 잡을 것으로 본다.

우리의 몸짓은 평화와 신명의 몸짓이다. 우리는 몸을 완전히 해방시켜 실방살방으로 사위를 한다. 요즘 월드컵 응원할 때 태극이 빨갛게 움직이는 것을 보면 그게 우리 춤으로 그걸 보면 흥분이 된다. 그 안에는 평화와 역동성이 자리잡고 있다. 그게 바로 진보다."

▲ 이애주 교수는 "한국은 베트남에 대해 반성하고 자각하는 근본의 바탕에서 진정한 화해를 이루어야 한다"며 이번 행사의 의미를 설명했다. ⓒ 오마이뉴스 조호진
- 세계가 우리의 월드컵 응원을 보면서 놀라고 있다. 또 국민들도 집중하면 터져나오는 힘이 우리 민족에게 있다며 자부심을 맘껏 표현하고 있다. 반면 상업주의에 왜곡된 월드컵에 의해 월드컵이 끝나고 나면 어떤 것도 추려내지 못할 것이란 우려스런 시각도 있다.
"우리 민족 안에 흐르는 끈기와 무서운 역동성이 열광적인 응원과 좋은 성적으로 나타났다고 볼 수 있다. 태극 물결을 보면 국민의 일체에서 전 우주적인 움직임과 축이 드러난다. 그게 우리의 속성이고 본질이고 춤의 움직임이라고 본다. 피파가 철저한 상혼으로 월드컵을 치르는 것을 보면서 굉장히 기분이 나빴다. 뛰고 뒹굴고 볼을 차는 경기를 보면서 함께 신이 나지만 경기가 끝나면 상업주의가 판을 치는 것을 목격하게 된다. 몹시 불쾌하다, 하지만 전 지구가 자본주의에 둘러싸여 있는 현실에서 어떻게 상업 자본주의를 극복하고 또 조화를 이룰 것인가 고민해야 하는 게 현실이다."

- 역사변화를 꿈꾸는 진보예술인으로서 어떤 일들을 하고 싶은가.
"역사성이 자연스럽게 배인 것이 우리 몸짓이고 춤인데 지금은 그렇지 않아 안타깝다. 시대의식과 역사정신이 배인 춤을 생산하고 정리하고 싶다. 그런데 여건이 좋지 않다. 현재 문화예술판은 거의 서구예술이 틀어잡고 있기 때문에 물질적 토대를 만들기가 정말 힘들다. 문화정책이 거꾸로 가고 있다. 어렵지만 이 일을 해내기 위해 '한춤공동체'를 만들고 모였다."

- 사회변화를 꿈꾸었던 사람들로부터 춤꾼 '이애주' 혹은 사회변혁운동가였던 '이애주' 선생이 어떻게 기억되길 바라는가.
"그때 그 시대를 열정과 희망으로 매진했듯이 그 마음을 잊지 않고 같이 가면 좋겠다. 그리고 생명은 살리고 죽음은 풀어주는 역사적인 춤꾼이 되고 싶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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